34화.85번 방
그레이와 엘르는 30분 째 대리석 건물 안에서 헤매고 있었다.건물 내부 장식이 서로 다르긴 했지만 커다란 문이 줄지어 있는 모습은 어디든 똑같았다.
스마트폰 나침반으로 현재 위치를 가늠해보고 있었지만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동물 조각상이 조금 달라보일뿐이었다.
그레이는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사자상을 바라보며 엘르에게 물었다.
"정말 살아있는거 같지 않아?"
"정말 그렇군.그런데 이건..음~내 가정이 맞다면 이건 누구나 알만한 인물의 작품일꺼야"
"그게 무슨 말이지?"
"이 작품의 주인말일쎄.오래전 대장장이 출신의 유명한 장인 하나가 있었는데 얼마나 재주가 뛰어난지 그가 손대는 물건은 무엇이든 거짓말처럼 살아있는 작품이 됐다네.지금까지도 그가 만든 많은 작품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희대의 작품이란 찬사를 받고 있지.그런 그가 어느날 갑자기 감쪽같이 사라진거야.매우 유감스런 일이지.."
"사라지다니?조사는 해본거야?"
"그럼~그림자족이 수사대까지 꾸려서 조사해봤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네.심지어 목격자 하나 없었어.하지만 지금 이 작품을 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되는군.그는 어둠의 군주에게 잡혀간걸지도 몰라.사막을 지키는 수호대가 그를 꼭꼭 숨기고 있으니 아무도 못 찾을 수밖에.."
그레이는 엘르의 말을 듣고 비운의 조각가를 상상했다.진짜로 살아있는 것 같은 이 역동감은 그가 현실에서 봤던 누구보다도 뛰어난 것이었다.
그레이는 문뜩 사자가 입을 벌려 물지는 않을까 조심스레 손을 옮겨 사자상의 뒷부분을 어루만졌다.
"이 작품들도 결국 군주의 수집품이 되었군"
"수집품이라니?"
"군주는 지독한 수집가라네.사막에서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이 모래성 안으로 모여들지.군주는 수집품을 모으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네.심지어 우리의 오래된 보물까지도.."
"혹시 그 보물이 열쇠?"
"엇!열쇠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지?"
"디아의 날개에 대한 비밀을 풀어줄 물건이라며 누군가가 찾아보라고 하더군.그 친구도 손재주가 뛰어났는데.."
"어떻게 정보를 얻었는진 모르지만 열쇠에 대한 정보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혹시 그 사람이 누군지 물어봐도 괜찮나?"
"미안하지만 그건 말해줄 수 없어.우린 그한테 큰 신세를 졌거든"
"음..그렇다면.."
엘르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그레이가 어루만지던 사자상의 꼬리가 덜컹 아래로 쑤욱 내려갔다.
드르르륵~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삐걱거림과 함께 커다란 나무문이 연기를 뿜으며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더불어 나무 문 위로 볼록 튀어나온 부분이 점점 도드라져 보였다.
그레이는 큰 문에 가려진 시야를 벗어나려 뒤로 멀찍이 물러나 나무 문의 상단을 유심히 쳐다봤다.
덜컹거리며 육중한 문이 옆으로 젖혀질수록 어떤 글자가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음..저건..무슨 글자지?통나무를 덧댄거 같은데?"
엘르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그레이에게 대답했다.
"85..여긴 85번 방인 것 같군.."
"85번?"
"응.모래성 안에 있는 999개의 방 중 85번째 방이지"
♤♤♤♤♤♤
"군주님은 참 대단하셔.그 서큐버스를 단숨에 제압하시다니"
"말도 마.한 번 손을 쭈욱 뻗으니까 그 사나운 서큐버스가 축 늘어지더라고"
"오오오~"
그림자족이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에 현우의 신경이 곤두섰다.안 그래도 디아가 어딨는지 몰라 조마조마한데 교도관들은 맥주의 땅콩마냥 디아의 이야기를 안주삼아 웃고 떠들며 즐거워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요것들'
곧 스마트폰이 든 바구니가 얄미운 교도관들 사이로 들어갈 것이다.그리고..
현우는 시계를 바라보며 침을 꼴깍삼켰다.머리 속에는 드한의 주기술인 도검난무가 춤을 추 듯 흐르고 있었다.드한의 흑도에는 못 미치지만 긴 봉이라면 어느 정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번 기술은 상당히 고난도의 기술로 자신의 몸을 중심으로 크게 8자를 그리며 몸 전체를 보호하는 기술이었다.방어가 주력이지만 드한이 다룰 때는 주변의 몬스터를 한번에 쓸어버릴 정도로 공격적인 기술이었다.
'봉의 회전력을 최대한 이용해야 해.그리고 적당한 때 스마트폰도 회수하자'
어느새 음식 바구니는 그림자족이 모여있는 동그란 식탁으로 옮겨져 얌전히 놓여지고 있었다.교도관들은 배가 고팠는지 바구니의 도마뱀을 보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제법 교도관들이 모여든 순간 절묘하게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감미로운 리듬에 교도관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도마뱀 다리를 뜯다가 멍하니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간혹 도마뱀을 든 채 침까지 흘리며 꾸벅꾸벅 조는 교도관도 있었다.
짧은 클래식 음악이 끝나자 교도관들이 하나둘 하품을 해대며 나른함을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반전의 총소리가 교도관들을 강타했다.
탕탕탕~
교도관들은 마음을 놓고 있다 미친듯 몰아치는 시끄러운 소리에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가거나 우왕좌왕하다 무기 진열대에 놓인 방패를 들고 몸을 숨기기 바빴다.
이때다 싶어 현우가 거침없이 뛰어나가려는데 갑자기 음악소리가 변해버렸다.총소리가 한동안 이어지리라 생각했던터라 현우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현우의 발걸음이 멈춘 순간 화염이 이글거리는 소리가 바구니 안에서 뿜어져 나오더니 어둡고 무거운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이곳에 들어온 자 영원한 죽음을 맛보리라.조금이라도 더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이곳을 벗어나거라.흐흐흐~'
목소리가 동굴벽에 반사되어 사방으로 퍼지자 원래 설정했던 소리보다 몇 배는 증폭되어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군주님 잘못했습니다.어서들 일어나지 못해?빨리 자리로 돌아가 썩~"
탁자 근처에 다닥다닥 모여 있던 교도관들이 도마뱀 요리를 던져버리고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아~~하'
현우는 손가락을 튕기며 탄성을 내질렀다.절묘하게도 게임 시네마틱 영상에서 나오는 음성이 재생된 것이다.
평소 좋아하던 성우가 녹음에 참여해서 주목을 받았던 바로 그 게임.목소리가 맘에 들어 따로 음악 으로 저장해놓았던 그 파일..오픈월드의 시네마틱 영상 속 주인공은 바로 어둠의 군주였다.
♤♤♤♤♤
끼이이익..
"들어가봐도 되겠지?"
"이렇게 열리는걸 보니 오픈된 방인 듯하군"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살짝 열려진 문 틈으로 발을 내딛었다.주변은 전체적으로 어두웠지만 통로보다 밝게 느껴졌다.방은 건물의 규모만큼이나 컸고 천장이 상당히 높은게 특징이었다.벽에는 사막에서는 보기 힘든 푸른 초원을 그린 그림이 펼쳐져 있고 그 위로 눈이 흩날리는 풍경이 시선을 압도했다.
'멋진 방이군'
방을 정면으로 바라보자 이 큰 방에 아무것도 없이 달랑 커다란 철장 하나가 놓여 있었다.그레이가 가까이 다가서자 철장에서 구슬픈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철장을 본 엘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엘르는 철장의 기둥을 손으로 매만지며 감정에 북받쳐 주루룩 눈물까지 흘렸다.
"정말너무 하는구나..한 때는 평화를 사랑하는 군주였는데.."
철장 안에는 푸른 빛이 도는 잘생긴 말 한 마리가 외로이 서있었다.
"이 말은 처음 보는데 무슨 말이지?"
"라그라노스라는 세상에 단 세 마리만 존재하는 푸른 말이라네.달릴수록 몸의 푸른 빛이 선명하게 빛나고 더욱 가볍게 달리지.이 귀한 말은 자연에서 마음대로 뛰어다녀야 하는데..이런 풍경화가 다 무슨 소용인가?"
그레이는 자신이 키우던 말이 생각나 철장에 갇힌 푸른 말이 불쌍하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은 디아가 먼저였다.
"엘르! 안타깝지만 나가자"
그레이는 이 보이지 않는 감옥에서 꼭 푸른 말을 꺼내주리라 다짐하고 문을 나섰다.
♤♤♤♤
군주의 효과는 대단했다.잘못하면 17대1로 싸웠어야 했는데 다행히 모두 꽁무니를 빼고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현우의 눈은 계속 스마트폰이 담긴 바구니를 주시하고 있었다.적당한 때에 스마트폰만 챙기면 이 상황은 끝나는 것이다.의외로 순조롭게 일이 풀려갔다.
순식간에 교도관들이 빠져나가자 현우는 잽싸게 탁자로 다가가 스마트폰을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바구니에 담긴 도마뱀을 보자 어서 빠져나가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일었다.
현우는 혹시나 남아있을지 모를 교도관들을 경계하며 슬쩍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다들 돌아갔군.혹시 몰래 쉬고 있다 들킨건가?하하'
히죽 웃으며 다시 정면을 바라보는 순간..
쿵~털썩~
현우는 무언가 물컹한 물체에 파묻혔다 튕겨나와 바닥에 가차없이 내동댕이쳐졌다.충격을 받은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는 현우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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