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봄 #12
단순한 짐작이 아니었다. 이미 이라미의 눈에는 곧 벌어질 그 참상이 선히 보이고 있었다. 지금 박수진이 한정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한정우는 다루기 쉬운 말이었다. 자기 고집 없이, 지휘하는 사람에 손에 이끌려 명령 받은 연주만을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막상 한정우를 만나게 되면 박수진도 알게 되리라. 한정우를 입맛대로 써먹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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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상황은 이라미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적어도 그녀의 생각은 옳았다. 사람들이 변한 한정우의 연주를 감당하지 못할 거란 것과, 결과적으로 그의 반주를 받는 사람은 그녀뿐일 거라는 것.
하지만 그 과정은 조금 달랐다. 반주를 부탁하러 온 사람들에게 한정우는 연주 한 번 보여주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여력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물론 이라미의 반주를 맡기로 한 이상, 그렇게 시간이 널널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주 한두 명 더 해줄 여력이 없는 건 아닐 터였다.
"왜 그런 거야?"
"뭘."
"반주 말이야. 사람들이 부탁하러 온 거 그냥 시간 없다면서 거절했다며."
"벌써 소문이 퍼졌어? 되게 궁시렁대고 있나 보네."
한정우가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한정우를 보면서 이라미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열등감에 파묻혀 버둥거릴 때는, 그 고통이 얼굴에서 훤히 보여 참 알기 쉽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고통이 사라진 지금, 그의 무덤덤한 표정은 참 그 속을 읽기가 힘들었다. 문득, 이라미는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한석훈 교수님 아들이 맞긴 맞네.'
눈을 떼었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저었다.
"궁시렁대는 거야 뭐 사람들이 다 그렇지. 근데 왜 그랬어?"
"거절할 거 알고 있었잖아. 이유도 알고."
"알지, 아는데······ 연주 한 번쯤 들려주고 포기 시킬 줄 알았지."
"너라면 그러겠어?"
"······나라면?"
"어차피 나랑 같이 안 할 거 뻔히 보이는 사람한테, 그거 이해 하나 시켜주자고 굳이 연주하겠냐고. 난 아니야. 내 연주, 그렇게 함부로 대하고 싶지 않아. 내 연주로 이해 구걸하는 거, 싫어."
"그건 그렇지만······ 근데 그럼 나한테 연주해준 건 뭐야. 달빛 말이야. 듣고 판단하라고 했잖아."
"거기서 듣고 꼬리 내리면 이라미가 아니지. 포기 안 할 거 알고 있었어."
"헐······."
이라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정우를 바라보았다.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기분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녀를 그만큼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이라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실력이 생기니까 이제서야 본성이 보이네. 못 됐구나, 너?"
"그럼 예전에는 착한 줄 알았어?"
"어······ 그건 아니긴 했는데."
"그럼 다를 거 없네. 슬슬 가라. 나 연습해야 돼. 너만 실기 평가 있는 거 아니다."
"너네는 뭔데?"
"고전주의 안에서 자유롭게. 베토벤 할 거야."
"베토벤이라······."
예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의 한정우로서는 괜찮은 선택 같았다. 베토벤처럼 색이 강한 곡일수록, 한정우의 매력이 좀 더 선명하게 느껴질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뭘 하게? 월광? 템페스트?"
"비창."
"······초기작이네?"
베토벤의 초기작들은 아무래도 낭만주의보다는 고전주의적 색채가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의외인 선택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낭만주의 느낌이 나는 곡을 선택할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비창 또한 여전히 온전한 고전주의라 말하기에는 베토벤적인 특별함이 가득 담겨있는 곡이긴 했다. 이라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쉽네. 나도 그거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실기 평가는 교수님들밖에 못 보니까."
"······그렇지."
한정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이라미는 한정우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한정우의 피아노를 평가해줄 교수들은 세 명의 피아노과 교수들이다. 그 말인즉슨, 한석훈 또한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뜻이었다.
"한 방 먹여버려, 한석훈 교수님한테."
"······."
한정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제 손을 힐끔 내려다볼 뿐이었다.
손이 근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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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거냐."
"느닷없이 찾아와서 뭐라는 거야?"
"무슨 말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잖아."
건조한 목소리가 울린다. 재미 없는 목소리다.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도 섬세하고 감미로운 연주를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이태상은 한석훈을 바라보며 눈을 좁혔다.
"정우 얘기라면, 좀 더 감사함을 담아서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네 아들, 겨우겨우 그 슬럼프에서 빠져나왔는데."
"······네가 한 거야?"
"물론 아니지. 내가 해준 거라곤 고작 지켜봐준 것밖에 없어. 네가 버린 걸, 난 버리지 않았을 뿐이고. 그나저나 너도 참 너답다. 어떻게 이제서야 찾아올 생각을 하냐? 그것도 정우한테도 아니고, 나한테."
"내가 그 아이 찾아가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잖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한석훈이 조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늘 제가 신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도도하게만 굴더니, 이렇게 인간적인 모습도 다 보여주니 이태상으로는 재밌을 수밖에 없었다. 이태상이 손바닥을 보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몰라."
"모른다고?"
"그래. 이번에 복학할 때 와서 보니까, 갑자기 저렇게 연주하고 있더라. 나도 깜짝 놀랐어."
"······."
한석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태상을 바라보았다. 이태상 입장에서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이제서야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무성하게 자란 수염을 매만지는 한석훈을 보며, 이태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혹시나 싶어서 말하는 건데, 정우 데려갈 생각은 하지 마라."
"······내가 데려가겠다고 한다 해서 걔가 오겠어?"
"안 가겠지. 하지만 간다고 해도, 데려갈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마. 넌 그럴 자격 없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세상도 알아. 무엇보다 정우가 알지."
이태상의 차가운 말에 한석훈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태상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정우는 보석이야.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던 보석. 그리고 이 보석을 버린 건 너다. 괜한 욕심 같은 건 부릴 생각 말고, 그냥 아무 것도 하지 마. 네가 그 아이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은 그거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거."
"욕심이 아니라 걱정이라면?"
"걱정?"
이태상이 재미 없는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정색했다.
"걱정도 자격 있는 사람이 하는 거야. 아들 버린 아버지는 걱정할 자격도 없어. 너는 그게 그 아이를 위한 최선이었다고 말하겠지만, 결국은 그것도 네 독선일 뿐이었지. 언제나처럼."
"······."
"그래도 굳이 네가 학부모의 자격이라도 주장하고 싶다면, 그래, 교수로서의 내 소감은 말해주마. 정우는 마루와도 경쟁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거다. 그 아이가 음에 대해 갖고 있는 이해는 내 상상을 뛰어넘었어. 그리고 하루하루 제 이해를 좀 더 선명하게 건반 위에 녹여낼 수 있게 됐지. 스펙트럼도 넓어. 하이든부터 쇼팽에 라벨까지. 뭐 하나 제대로 표현 못하는 게 없더군. 분명 성공할 거야. 단순히 이 좁은 한국 땅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무대에서도 알아볼 거다. 언젠가는 카네기 홀을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잘못했던 거냐?"
한석훈이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짧은 대화 사이에 한참은 더 늙은 것 같았다.
"정우가 가망도 없는 길에 매달리고 있는 걸 지켜만 봐야 했을까? 적어도 그 때는 그랬어. 그 아이에게 가망은 없었어. 너라고 과연 달랐을까? 나랑 다른 판단을 했을까?"
"모르지."
이태상은 차분하게 답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넌 기다리지 않았고, 정우가 준비할 새도 없이 벼랑 너머로 밀어버렸어. 그리고 결국 정우는 자기 가능성을 찾아버렸지. 만약 같은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자, 우리. 정우는 날개를 폈고, 넌 정우가 날지 못할 거라 믿었어. 그게 다야. 그게 지금이고, 현실이야."
"······난 최선을 다했다."
"너의 최선이 정우의 최선은 아니었던 거지."
이태상의 말에 한석훈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곧 아무 말도 없이 벌떡 일어나 교수실을 나섰다. 그런 한석훈의 뒷모습을 보며, 이태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앞으로 더 배가 아플 거다. 정우는 점점 눈부셔질 테니까. 어쩌면······ 너보다도, 더."
벌써부터 한정우의 실기 평가가 기대 됐다.
한석훈의 앞에서, 이 아이는 과연 어떤 색깔로 빛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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