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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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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9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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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1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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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봄 #16

DUMMY

무대로 올라서는 게 얼마만일까.


정말 거의 1년만의 일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른 두근거림이다. 예전의 나는 무대에 오를 때마다, 곧 사람들을 얼마나 실망시키게 될지 두려워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두렵지 않다. 알고 있으니까.


더이상 내 연주는 실망에 가깝지 않다는 걸. 만족과 기대 위를 걷고 있다는 걸.


무대의 뒷편에 설 때쯤이었다. 때마침 평가를 다 받은 장마루가 내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발을 멈췄다. 그리고 그에 맞춰 그 녀석도 자리에 섰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우리 둘 중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은 나이다. 아마 지금 섣불리 입을 열어봤자, 말하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를 낳을 거란 걸······ 우리 둘 다 느끼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서로를 지나쳤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그게 지금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최선의 대화였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뭔가 장마루에게서 많은 말을 들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 녀석도 같은 걸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무대의 입구에 서자, 조교가 힐끔 나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올렸다. 아직 교수들끼리 나눌 이야기가 남았나 보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장마루의 연주다. 마음만 먹으면 서로가 느낀 걸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보낼 수도 있겠지.


'······내 하이든과 비교하면 어땠지?'


일단 콩쿠르였다면, 장마루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단순한 콘서트였다면 취향의 영역으로 나눌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난 취향으로 따져도 장마루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런 연주였다. 하이든의 바닥을 들여다본 것 같은 연주. 녀석은 나랑 동갑인 나이에, 벌써부터 거장의 소리를 손가락에 담고 있었다.


손가락을 들여다봤다. 손톱을 바짝 깎은 손가락. 이 손가락이 그동안 얼마나 많이 고생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오늘은 그 고생을 잔뜩 티내야 할 시간이다.


그 때였다. 조교가 드디어 손짓을 했다. 무대로 발을 옮겼다. 1년 동안 몇 번이고 생각했던 순간이었지만, 무대 위에 발을 올리는 지금 이건, 정말 평소와 조금도 다를 것 없는 평범한 걸음이었다.


우아한 조명이 나를 반긴다. 어두침침한 객석 속에서 교수님들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재판이라도 받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최선의 연주를 선보이고, 만약 그게 부족하다면, 저들이 금방이라도 나를 지옥 속으로 밀어넣을 것만 같다.


"베토벤의 비창? 어우 야, 센 것도 골랐다. 자신 있어?"


최연경 교수의 목소리였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신 있습니다."

"어떤 느낌으로 연주할 생각이니? 네가 이해하고 있는 비창에 대해서 이야기해봐."

"비창은 베토벤의 초기작인 만큼, 아직 낭만주의의 냄새조차 제대로 묻지 않은 곡이죠. 그의 다른 피아노 소나타에 비교해서도 훨씬 더 고전주의적인 면이 남아있어요.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시대의 흐름이 아니라······ 베토벤 자신의 흐름에 이끌린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낭만주의의 영향을 덜 받아서?"

"길을 찾으며 만든 곡이랑, 길을 찾은 후의 곡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더 길게 설명하려면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략적인 생각을 전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교수님들이 보려고 하는 건, 내가 원하는 연주와 내가 실제로 하는 연주가 일치하는지를 보려는 거니까.


어둠 속에 잠겨있는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보이지가 않았다. 하지만 하나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이 연주는 그를 위한 연주는 아니다. 나를 위한 연주다. 하지만 나를 위하기에, 그가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연주였다. 그가 똑바로 마주해야 하는.


당신이 버렸던 가능성을, 그만큼은 돌아봐야 할 의무가 있었으니까.


"이제 연주해줘. 기대한다."


대답 대신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피아노의 의자에 앉았다. 스타인웨이 피아노, D 사이즈. 연식하고 세부적인 디테일은 집에 있는 것과 좀 다른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같은 회사의 모델을 쓴다는 것만으로도 괜히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는 한참 동안 그 가라앉은 마음을 바라보았다. 1분이 지났을까. 어쩌면 조금 더 지났을지도. 교수님들이 아직까지도 재촉하지 않는다는 게 용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쉽게 연주를 시작할 순 없었다. 아직 마음 속에 잡생각이 너무 많이 남아있었다. 장마루에 대한 질투와, 아버지에 대한 원망. 그 모든 걸 내려놓았다. 누군가는 그조차도 건반 위에 담아내면 더 좋은 연주가 되지 않겠냐 묻겠지만, 아직은 내 수준이 그 정도는 아니었다. 베토벤을 온전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이라미가 말했듯, 이곳에 있어야 되는 건 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다.


인간 한정우도 아니다. 그들 중 인간으로서의 한정우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피아니스트 한정우를 보여줘야 했다.


손가락을 든다. 피아노 너머에 있을 베토벤을 바라보았다. 그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아직 세월에 여물지 않은 베토벤이, 비창에 담아내고자 했던 마음을.


그것은 세상에 대한 이야기였을까. 아니면 순수히, 이 곡의 울림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였을까.


평생이 지나도 알 수 없으리라. 그렇기에 이 세상에 울리고 있는 베토벤은 다 제각각인 것일 테고. 그렇다면 내가 표현하고 싶은 베토벤은 어느 쪽일까.


······여전히, 모르겠다.


베토벤을 잊었다. 고전주의고 낭만주의고 그런 형식들도 다 잊어버렸다. 생각을 지웠다.


그리고 건반을 눌렀다.


그 순간이었다. 스위치라도 누른 것처럼,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져있던 악보가 끊김 없이 내 손가락을 통해 터져나왔다. 묘한 기분이었다. 꼭 내가 연주를 하는 게 아니라, 내 손가락이 멋대로 연주를 하는 것만 같은 기분. 뭘 쳐야 된다는 생각이 하기도 전에, 나의 모든 신경과 감각이 악보가 말하는 바를 그대로 녹여내고 있었다.


1악장의 서주가 갖고 있는 그 비장함이, 마치 늪처럼 피아노의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끈적끈적하면서도 거친 소리가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다. 베토벤의 무게가 내 손가락 끝에 달려있다. 황홀한 기분이다.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서주가 끝나고 1주제와 2주제를 거치는 동안에도, 손가락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자기가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다는 듯이.


2악장으로 들어섰을 때는, 베토벤의 여린 얼굴이 나를 바라보았다.


몸이 떨려왔다. 소리 하나하나가 만들어내는 음색이 오르가즘이 되어 내 살갗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내 소리는 점점 더 느려졌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베토벤이 이 곡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건, 소리가 아니라······ 소리가 울리는 와중에도 느끼고 마는 그 고요함이 아닌지. 그 침묵이 아닌지.


베토벤의 소리가 내게 손을 흔든다. 부드럽게, 여리게. 나는 너를 응원하고 있다는 듯이. 2악장은 그런 구간이었다. 사람을 응원하는 것 같은 곡. 우울함과 비장함 속에 숨겨진, 베토벤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그런 의미에서 3악장은 묘했다. 1악장이나 2악장과 달리, 3악장의 청량한 분위기는 내게 온전한 몰입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빵 굽는 냄새가 났고, 어린 아이들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물론 처음의 이야기였다. 나는 베토벤이 이 따스함을 얼마나 비틀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행복에 대한 질투, 그리고 그 행복이 얼마나 덧없는지 말하고자 싶어하던 그의 비틀린 조소. 그 모든 삐딱함은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빠르게 고조되기 시작하고, 마지막에 폭발적으로 떨어져내리는 아르페지오가 증명했다.


그리고 나의 소리가 증명했다.


종반부, 뚝 떨어지는 그 아르페지오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희망, 절망, 행복, 질투, 용기, 겁, 그 모든 것들을 싸늘하게 내다버리는 베토벤의 비정함을, 비장함을, 이 소리의 절규를······ 온전히 전달해야 했다.


건반을 때리듯이 연주했다. 나의 마음 속 정리되지 않은 모든 생각과 마음을 때려박았다. 피아노 위로 솟아올랐던 모든 아름다운, 가녀린, 안타까운 소리들이 마치 쓰레기처럼 구겨져 땅바닥에 떨어졌다. 어쩌면 그 중에는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시에 없을지도 모르지.


연주가 끝날 때쯤에는, 소리의 잔향이 마치 찢겨진 옷자락처럼 내 주변에 눈처럼 내리고 있었다. 바닥은 늪이 되어 질척질척해진지 오래였고, 건반들은 박살이 난 것처럼 거칠었다. 끝이었다.


그래. 끝났다. ······끝났다? 정말로, 이걸로? 1년의 시간이 이렇게 순식간에 끝나버린다고?


손을 바라보았다. 땀에 젖었지만, 아직도 더 치라면 더 칠 수 있을 것 같다. 더 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박수 소리가 들렸다.


작가의말

*후반부 연주 파트 수정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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