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치에라의 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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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베
작품등록일 :
2017.11.07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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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0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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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12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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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5)

DUMMY

마을이, 불타고있다.


"..아...아? 어.."


입에서 나오는 건, 말이 되지 못한 그저 신음소리와도 같은 숨소리 뿐.

건물 한켠이 무너질정도의 충격이 갑자기 전해져왔던 탓에 잠시 정신이 마비되는 것 같았던 영향인걸까?


아니면, 눈 앞에 보이는 도저히 믿기 힘든 마을의 광경을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걸까.


"어...어어언니이...."


품 안에서 오들오들 떨고있는 니르의 머리를 돌리지 못하도록 꼭 껴안는다.

눈 앞의 현실이 현실이 아니기를, 그저 갑작스레 찾아온 꿈이기를 빌면서.

그 꿈이 니르가 이 광경을 두 눈에 담기전에 깨기를 바라면서.


"언니이...언니, 언니..."


니르가 고개를 파묻은 가슴께의 셔츠가 축축히 젖어가는 것을 느끼며 찢어진 듯 뚫린 구멍 바깥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눈을 수없이 감고 떠봐도,

세게 감았다 떠봐도,

밤하늘에 떠있는 달을 잠깐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내려봐도,

구멍 안쪽에서 보이는 최대한의 마을을 모두 훑어봐도,


현실이다.

마을이 불길에 휩싸여 있다.


"...흐읍"


나도 모르게 입 바깥으로 튀어나올뻔한 비명을 삼켜내고 품 안의 니르를 더욱 꼬옥 껴안는다.

니르가 보지 않았으면 해서, 그리고 바스락 소리를 내며 조금씩 부서져가는 정신을 이 아이에게 기대어 조금이라도 부여잡아보고 싶어서.


꿈이라면 악몽.

하지만, 현실이기에 지옥.


어제도, 엊그제도, 그 전날도..심지어 몇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축제의 분위기로 가득차있던 마을이 갑자기 불에 휩싸여있는 모습에 이것이 현실이리란 감각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


"?!"


그리고 정말 지옥같게도, 희미하게 들려오던 무언가의 소리가 점차 크게 귓가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비명소리가.


"! 어, 언니..!!"


"아냐, 아냐 니르야. 이건 니르가 잘못 들은..."


잘못 들을리가 없다.

이만큼 크게 들리는데, 나도 듣고있는데.

니르가 잘못 들을리가 없잖아.


하지만, 부디 잘못 들은거라고 믿어줘.

니르 너만이라도 제발 현실을 보지 말아...


"우...우카 아저씨 목소리가 들려 언니...!

네빌 아저씨도...코리엘 오빠도..!"


품 안에서 니르의 떨리는 몸이 그 정도를 더해간다.


이 아이에게 현실은 나와는 달리 찾아와버렸다.

내가 어찌 할 방법이 없게끔.


"다들, 다들 왜 비명을 지르고 있는거야...?

언니, 언니..! 왜, 왜 마을 사람들이 비명지르고 있는 소리가 들리는거야..?"


"...."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눈은 막았더라도, 귀는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여린 여자아이의 귀엔 익숙한 목소리들이 싫어도 닿을 수 밖에 없었던거다.


오랜시간 익숙히 들어온 목소리니까.

자신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던 상냥한 목소리니까.


그런 그 따뜻했던 목소리가...끔찍히도 뜨거운 열기를 품은 채 마을을 한가득 메우고 있었다.


우지끈!


"?!"


차라리 환청이라고 하는건 어떨까,라는 효과가 전혀 없으리란걸 나조차 뼈저리게 알것같은 궁여지책을 생각해낸것도 잠시.


큼지막한 구멍을 만들어낸 무언가의 충격에 건물 이곳저곳에서 뼈대를 이루고있던 부분이 부러지는 소리가 연신 울려퍼진다.


그나마 니르와 나의 시선과 인식을 저 불길과 조금은 떨어트려주었던 이 집이 무너진다면...


'그전에, 여기 계속 있다간 휘말려버려!'


니르가 저 광경을 언제까지고 보지않을수는 없다.

여기서 나가면 필히 볼 수 밖에 없을테니.


그 전에 더 위험한것부터 피해야해!


"니르야, 언니 꼭 잡고있어야해!"


"?! 꺄...!"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품 안에 니르를 꼭 부여잡고 일어선 나는 집이 이미 어느정도 기울어진 탓에 힘없이 열린 문 바깥으로 몸을 날린다.


쿵!


"으윽?!"


나가야한다는 일념하에 뛰쳐나가듯 몸을 날린 탓인지 문 바깥 복도 벽에 온 힘을 다해 부딪혀버린 어깨에서 둔탁한 고통이 온 몸으로 퍼져나간다.


입가를 새어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삼키며 이 집에 들어왔던 길을 되짚어 달려간다.


우지끈! 쿵!


"!!"


한발자국 전에 있던 곳으로 천장의 커다란 뼈대의 한 부분이 떨어져내리며 먼지를 사방으로 풍겨낸다.

그 위협스러운 소리와 발에 전해져오는 충격때문에 등골이 서늘해지며 식은땀이 흐르지만, 잠시 돌아보는 그 시간마저 지금은 아쉬운 상황.


멈추지말고 달려야 해!


'집의 구조는 어렵지 않았으니까, 저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바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탁! 타닥!


그리고 생각대로 꺾은 그 오른편에는,


"..거, 짓말..."


계단이 통채로 무너져있었다.

그 파편을 아래에 잔뜩 쌓아둔 채.


얼마정도는 건물의 하중을 버티는 역할을 하는 계단이기에 건물 전체에 충격이 와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지금 계단이 성할리가 없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저 있던 방에서 빨리 빠져나오는데 급했을 뿐.


이제서야 어깨뒤로 돌아본 뒷편 복도는 조금씩 무너져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하지?!


"..우으..흑..! 흐윽! 흐웁, 흡...히끅!"


품 안에서 내 가슴께에 얼굴을 묻고 마치 아기 원숭이처럼 꼬옥 안겨있던 니르에게서 미처 삼켜내지못한 울음이 새어나온다.


니르에겐,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불안하고 무서우리라.


이 어린아이가 뭘 알겠어.

자신을 보호해줄 부모님은 어디가셨는지도 모르겠고, 본지도 얼마 안되어 아직 신뢰가 두텁지 않은 나와 이런 위험한 상황에 단둘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울거다.


어릴적,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나갔던 숲 속에서 조난당했던 기억이 불쑥 떠오른다.


한참을 길을 잃고 헤메다 천길 낭떠러지를 만났을 때.

뒤돌아본 길에 숲이 입을 벌린 새까만 그 안에서 번들거리는 짐승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던 기억.


나를 보호해줄 믿음직한 어른들은 어디에도 없고, 그저 믿을건 나 자신과 손에 들린 장난감같은 활과 두개의 화살이 전부였던 그 때.


그리고, 사냥을 나왔던 순간부터 조난당해 헤메는 와중에도 묵묵히 따라오던 말없는 여자아이.


불과 몇 주전 타국에 다녀오신 아버지와 함께 찾아온 그 여자아이에게 나는 신뢰를 주기는 커녕 잔뜩 경계하기만 했었다.


그 여자아이는, 나.

그 때의 나는, 니르.


"...!"


그리고 떠올린다.

그 때 그 여자아이가 어떻게 했었는지를.


"...니르야"


"흐끕!...으, 으응..히극, 어, 언니.."


"꼭, 잡고있어.

절대 놓치지마"


'..날 잡아. 손, 놓지마. 절대..'


그 여자아이가 했던것처럼.


니르의 등 뒤로 두른 손을 마주잡고 니르가 내 옷깃을 잡은 손에 꽈악 힘을 준게 느껴진 그 순간.


탓!


무너진 계단이 있던 곳으로 몸을 날린다.


쿵! 쿠당탕!


"윽!"


"꺄악!"


고작 1층이지만 이곳은 데릭 톨로즈라는 커다란 거인이 사는 곳.

2층은 그렇지도 않았지만 1층만큼은 족히 3미터를 넘었기에 생각보다도 긴 낙하시간을 거쳐 계단의 잔해 위로 떨어져 내린다.


니르를 품 안에 감싸 안은 채 잔해위에 나뒹군 온 몸이 시큰거리며 아파온다.


"으그그..."


"흑, 아, 아파아..."


나도 그리 큰 체형은 아닌지라 완벽히 감싸 안을 수 없었던 니르에게도 어느정도 떨어진 충격이 전해졌는지 품 안의 니르는 한껏 얼굴을 찌푸린 채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으으..마, 많이 아프니 니르야?"


"히끅! 어, 언니, 언니가 더..."


그럼에도 니르는 자신을 걱정하는 나를 도리어 걱정하는 듯 그 커다란 눈동자에 걱정과 눈물을 한가득 담아 내 얼굴을 올려다본다.


난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으려하지만 마음처럼 쉽게 되질 않았다.

비록 체술을 배우고 어느정도 단련을 해왔다곤 하지만...3미터 가량되는 높이에서 혼자가 아닌 누군가를 이렇게 감싸안고 뛰어내린다는 건 굉장한 부담임에 틀림없었던 것 같다.


그저,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가던 과거의 기억을 몸이 먼저 따라한 것 뿐.


대체 테미는 무슨생각으로 그랬던거지?

아야야 아파...


"괜,찮아 언니는 아무렇지 않아 니르야"


"피, 피 나 언니...흐끅!"


"...."


피?


"...언니는 괜찮을거야"


"..후에에엥~!"


자신의 머리를 감싸안고있던 내 왼쪽 어깨즈음에 박혀있는 뾰족한 나무를 본 니르는 이내 참아왔던 울음을 터트린다.


어째 아프다했어..


"으..!"


일단은 어깨에 박힌 나무부터 빼자.


팔을 들어올리는 것 만으로도 시큰거리는 걸 뛰어넘어 불에 타는 듯한 화끈거리는 고통이 전해져오지만 꾹 참고 상처가 잘 보이도록 어깨를 당겨본다.

다행히도, 그다지 깊게 박히진 않은것 같다.


"단..숨에!"


괜히 아프다고 천천히 빼다간 고통만 더 할뿐.

저릿거리는 오른손으로 뾰족한 나무를 잡아 순식간에 잡아당긴..


팍!


'꺄아아악?!!'


새, 생각보다 훨씬 아파!

하긴 안아플리가 없지!

게다가 보이던것보다 더 크잖아?!


순간적으로 엄습한 극심한 고통을 이를 꽉 깨물며 버티길 잠깐.


그제서야 지금껏 무너져내리는 이 집에서 나가려던 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스읍...후아..이, 일어설 수 있겠니 니르야?"


다친 왼쪽 어깨에선 아직 고통이 가시질 않기에 더이상은 니르를 품에 안고 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안으려면 안고갈순 있겠는데, 그러면 고통때문에 움직임이 둔해지니까 더 위험할지도 몰라.

니르가 걸을수만 있다면 일단 이 무너져내리는 집에선 나갈 수 있을것 같은데..


"히욱..훌쩍! 우, 우응..."


계단의 잔해위로 떨어진 순간에 피어오른 먼지가 얼굴 한가득 묻은 니르는 그 얼굴에 눈물자국을 선명히, 끊임없이 새겨내며 비척비척 품 안에서 일어선다.


어디가 아픈지, 다친덴 없는지 천천히 둘러보고 싶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어...!


"그, 그럼 나가자 니르.

여긴 곧 무너질것 같으니까"


"..흐윽, 흑...히끅!"


따라 일어난 나는 축 늘어진 왼팔에서 퍼져오는 고통을 애써 무시하며 오른손으로 니르의 손을 잡고 바깥으로 나가는 곳을 찾는다.


지금까지 딱 두번 와본 곳이지만 나갈 수 있는 출구는 금방 찾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벽이 무너져있었으니까.

저 위치면 아마도 나와 니르가 있던 방 아래...

무너지던 이유를 알겠네.


"흐급...지, 집이...화덕이..."


그 벽이 무너져내린곳으로 혹여나 꺼진 바닥이나 곧 무너져내릴듯한 천장이 있는지 살펴보며 조심히 걸어가는 와중, 니르는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렸는지 주변의 모습들을 조금씩 둘러보기 시작한다.


처참히 부서져내린 화덕이었던 흙과 돌무더기.

화덕이 있는 주방과 가게가 통하는 곳이었던 쪼개진 문.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바닥.

사방에 널브러져있는 제빵도구들.


커다란 덩치의 민머리 남자가 바삐 움직이며 빵을 굽는데에 여념이없던 그 공간은 이젠 흔적만을 남긴 채 원형을 잃어버린 모습으로 조금씩 조금씩 더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니르에겐 살아온 터전이었던, 그리고 가족들끼리 행복한 기억을 쌓아나갔을 집이 그렇게.

와르르, 쌓여있던 화덕의 잔해가 한번 더 무너져내린다.


"..으으..흐으윽...히꾹!.."


믿지못하겠다는 듯 두리번 두리번.

눈동자에서 눈물을 한가득 흘려내며 니르는 눈 앞에 놓인 현실을 마주하고있었다.


아직 어린 이 꼬마 아가씨에겐 너무나도 가혹한 현실을 조금이나마 가려주는 건, 두 눈에 글썽이는 눈물 뿐.


'...나, 때문인걸까'


빠직, 천장에서 떨어져내린 듯 천장과 같은 색을 띈 나무를 밞으며 출구를 향해 걷는 도중 문득 그런생각이 들었다.


비약이겠지만, 왠지모르게 그렇진 않을까란 생각이.


내가 옴으로해서 마을에 화가 일어났을거라는 생각이 드는게 아니다.

무엇보다 그런 일이 일어날리가 없을테니까.

내가 뭐라고..그저 공작가의 여식에 불과할 뿐인 내가 왔다고 이런일이 일어난다는게 상식적이진 않잖아.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토록 갑작스레 일어난 재앙에 시위를 당긴건 내가 이 마을에 온것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거다.

비록 출발하기 전 스카치에라로부터 존재 유무에 대해 주의를 받았긴 했지만 내가 온 이후 크니쿨의 잔해를 실제로 발견하였고, 숲에선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루시안님도...내가 마을에 있음으로 인해 일어날 일을 걱정했었고.


그리고, 마을이 불타오르고 있는 지금 난 그 한가운데에 있다.


전혀 서로 연관이 없을 우연에 우연이 겹친 일들이고 지금 이 순간엔 딱히 중요한것도 아닌, 그저 갑자기 든 막연한 그 생각은 점점 나를 좀먹어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신경을 갉아먹듯 계속 지끈거리는 어깨의 고통과 오른손에 쥐어진 자그마한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그 감촉 때문에 더욱 더.


'..정신, 차리자'


쉽지는 않다. 이런 말을 속으로 되내여본다 한들 어깨의 고통이 가실리는 없는데다 눈 앞의 현실이 바뀌지도 않을테니.

그래도 그 의지를 조금은 다잡을 수 있도록.


계속, 계속 같은 말만을 되새겨본다.


이 자그마한 손의 떨림을 멈출 수 있는 건 당장 나밖에 없을테니까.

그런 내가 도리어 내 자신이 만들어낸 상상에 겁먹으면 어떡해.


떨어진 충격이 가시지 않은 탓인지 제대로 디뎌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한걸음 한걸음 주의깊게 내딛으며 무너진 벽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이제 한걸음, 우지끈거리는 소리를 연신 퍼트리며 머리위로 먼지를 떨어트리는 이 위험한 곳에서 나가기 바로 직전.


당장의 위험은 넘겼다는 안도가 가슴속에 무거이 내려앉은 불안감을 조금은 가시게 해주며 힘이 잘 들어가지 않던 오른손을 조금 더 꼭 쥘 수 있게 된 그 때.


[끼롹?]


"...?"


눈 앞에 나타난 새까만 그림자.


얼마간 떨어진 길 한켠에서 바닥에 착 달라붙어있는 그 그림자는 마치 커다란 들개처럼 연신 코를 킁킁거리며 바닥을 헤엄치고있었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먹잇감의 냄새를 찾는듯.


마을 주민들 중 누군가가 키웠던 동물인걸까?

그런것 치고는 너무나도 새까맣다.

몸에 난 털이 새까만 색을 띄고있다는 것이 아닌, 정말 말 그대로 '그림자'처럼.


이게...뭘까?


"....흐극.."


꼬옥 쥐어오는 손에 고개를 내려 니르의 얼굴을 바라보니 니르도 눈 앞에 있는 것을 두 눈에 담고있었다.


두려움이 느껴지는 눈동자로.


...두려움?

처음보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일까?

하긴 좀 기괴한 모습이긴 하...


"어..언니..저, 저거..."


이내 파랗게 질려버린 입술을 힘겹게 달싹이는 니르는 귀기울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무언가를 내게 전하려한다.


마치 저 동물에게 들리지 않게하려는 듯.


"여기...숲에서 사는..."


그리고 그 뒤는, 미처 들을 수 없었다.


[크롹? 킁, 크룩. 키롸악!]


바닥에 달라붙어있던 저 새까만 동물이 그 몸을 일으키며 이곳을 바라보기에.

웅크려있던 모습과는 달리, 그 덩치가 네 발을 땅에 붙이고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허리춤까지 오기에.

그리고 그 커다란 짐승이 새빨간 두 눈을 번들거리며 나와 니르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기에.


그 두 눈에 담긴 명백한 '살기'가 이쪽을 향해 한가득 쏘아져오고 있기에.


"!!"


[키라롸라락!]


목 깊숙한곳을 위협적으로 긁어내는 듯한 소리를 하늘을 향해 내지른 그 짐승이 아무런 준비동작도 없이 달려든다.


"?! 아, 아아악?!"


"꺄아아아!!"


그 커다란 덩치에서 풍겨지는 중압감과 위험하게 일렁이는 살기가 온몸으로 찔러오듯 쇄도해온다.

눈 깜짝할 사이에 좁혀져버리는 족히 여섯걸음은 떨어져 있던 거리.


그래도 차마 다행인건 그 '여섯걸음'이라는 거리.


쾅!


[크롸아악!!]


반사적으로 니르의 몸을 껴안으며 옆으로 몸을 날려 그 진행방향에서 벗어난다.

바닥에 나뒹군 몸이 여기저기 비명을 질러대지만 제 속도를 이겨내지 못한 채 약해진 집 안으로 쳐박혀버린 짐승은 곧 무너진 잔해속에서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니르를 품에 안고 바닥에 누운 채 그 모습을 생생히 바라본다.


"다...다행이다.."


니르의 집이 무너져내린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혹시나 저 녀석이 몸을 피한 이후에도 건재했더라면...

갑작스럽게 뛰는 와중에 접질렸는지 발목이 욱신거려온다.

바로 일어날 수 없을만큼.


죽을뻔했다...


"히극!..회, 회색늑대가 왜 마을에..."


꼭 감았던 눈을 뜨며 나와 같이 그 장면을 바라본 니르의 말에 무심코 품 안을 내려다본다.


회색..늑대라고?


"회색늑대가 저렇게 컸니..?"


분명 좀 큰 개만한 크기였었는데..


"마을 주변..흐급, 킁!..숲속에 사는 회색늑대는...히끅! 다른데보다 더 크대.."


"..전혀 다른 동물처럼 보였는데"


물론 그 새까만 색때문에 일치하는 동물은 찾을 수 없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회색늑대라기엔 너무 크잖아..

회색늑대는 안그래도 무리지어 생활하는데 저만큼 덩치가 크...


"....."


...이런.


[크와아아!]


[끄롸락!]


[크루룩! 킁!]


"니르야! 꽉잡아!"


다행히 살았을 줄 알았는데 이게 뭐야!!


발목을 부여잡던 고통도, 어깨에서 여전히 욱신거리는 아픔도, 품에 안고있는 니르가 점점 무겁게 느껴지는 감각도,


그 모든것을 잊은 채, 누워있던 곳에서 벌떡 일어선 나는 니르를 들어안은채 길 맞은편 건물의 벽을 부수며 나타난 세마리의 커다랗고 새까만 늑대를 뒤로하며 온 힘을 다해 달려나간다.


테미, 테미는 대체 어딜간거야?!


"후우, 아아아아!!"





"..아아악!!"


단 한순간도 입을 열지 않더니..고통에 대한 표현은 확실한 습격자들이다.


"크아악! 아악! 으아아악!!!"


"..저기, 그쯤 해두는게.."


"그럴까요?"


푹.


"큭!"


목덜미에 짧은 단검이 박혀들어간 습격자는 얼굴에 싸맨 검은 천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의 생기를 잃곤 땅으로 스르르 쓰러져간다.


그 비슷한 인영이 벌써 주변에 다섯.


"그 누구도 정체를 토해내는 자들은 없군요"


"얼굴을 그렇게 쥐어버리면 말을 할래야 할 수 없을테지만요"


"의지가 부족한겁니다 습격자주제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젓는 데릭을 올려다보는 테미의 눈동자엔 단 한줌의 감정도 깃들어있지 않았다.

마치 사람의 숨통을 예리하게 끊어내는 날붙이마냥, 그녀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나 감정의 표현없이 그저 자신에게 덮쳐져온 습격자를 죽이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러는 데릭님께선 무언가 들으셨는지요"


"저 말입니까?"


주변을 둘러본 데릭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지만 테미의 눈동자에 비추는 데릭 주변의 광경도 자신이 만들어낸 광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쓰러트린 습격자들은 자신보단 적지만 그 참혹함은 족히 두배 이상?


저정도로 곤죽이 되었다면 도중에 말을 하고싶어도 할 여유조차 없었으리라.

누가 누구한테 뭐라고 하는지..


"..저는 힘조절이 워낙 안되서 말입니다"


테미의 시선속에 오랜만에 깃든 감정을 읽은 데릭은 뒷머리를 긁으며 머쓱한 웃음을 내뱉는다.


옛날부터 그랬다. 돈을 받고 '힘'이 필요한 곳에 쓰이던 떠돌이 시절부터.

애초에 힘을 조절할 필요가 없는 일상을 살아오며 그래왔던거니 그때완 달라진 이젠 조절을 좀 해야하는데..


그를 위해 시작한 빵집도 루디와 아이들의 도움으로 점점 능숙해져가곤 있지만 아직 완벽히 '일반인'의 수준까지 도달했다고 하긴 어려운듯하다.


사실 요즘도 가끔 반죽에 힘을 너무 준 탓에 못쓰게 되어버리기도 하니까.


게다가 정말 오랜만에...


'무기'를 휘둘러봤기도 했고.


"일단 그 손에 드신건 좀 내려놓으시는게 좋으실듯 하군요.

미관상 그리 좋은 그림은 아니네요"


"..그런가요?"


탁, 데릭의 손에서 던져진 길다란 나무막대가 땅 위를 뒹군다.

본연의 색은 어디로 갔는지 가까운 건물에서 불에 타지 않고 남은 나무를 집어들었을 때와는 달리 온통 붉은색으로 물든 그것을 시선에 담던 테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쉬지 않고 내리는군요"


그녀를 따라 고개를 든 데릭의 시선 안에도 여지없이 '그것'은 눈에 들어왔다.


"눈이 올만한 계절은 아닌데말입니다.."


"제 아무리 혹한이 몰아치는 겨울이더라도 저런 눈은 내리지 않겠죠"


"지옥, 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본적이 없으니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군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네요"


그저 비유일 뿐이다.

허나 그 이외의 저것을 묘사할만한게 있을까?


하늘에서 내리는 수많은 덩어리들.

달빛으로 메워진 밤하늘보다도 더욱 새까만 색을 지녔기에 어두운 하늘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보이는 그것은 마을 이곳저곳에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한겨울 데뉴브가 찾아온 날에 저만한 눈이 내리면 성야의 노래를 하늘 높이 불러주겠지만, 지금 마을의 밤하늘을 메우고있는 건 사그라들줄 모르는 곳곳의 비명소리였다.


"공작영애는 그대로 집에 두고와도 괜찮았던겁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이라도 돌아가고싶지만..."


여전히 밤하늘에 시선을 고정시키고있는 테미는 그 덩어리들이 떨어질곳들을 머리속에서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이틀 전 루시안님께 마을 안내를 받으며 머리속에 미리 그려둔 마을 전경도에 표시를 하나 둘.


"아가씨께서 피신하실 만한 곳을 찾아야하니까요"


그 어디에도 빈틈이 없다.

마을을 빽빽하게 메운 머리속 전경도의 표시들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지만 그 어디에도 '안전'이라는 단어가 어울릴만한 곳이 영 보이질 않는다.

그나마 아직까진 아가씨가 계신 곳에 떨어지지 않은게 다행이랄까.


저것들이 마을에 떨어져내리면 어떤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마당에 함부로 움직이는 건 더욱 위험한 일일수도 있으니.


"아, 그렇다면 좋..."


"?"


갑작스레 말을 끊으며 입을 다문 데릭의 얼굴을 의아하게 올려다보는 테미의 눈동자 안에서 데릭의 아차,한듯한 표정이 곧 당황으로 바뀌어간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던거죠?"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생각해보니 마을에 피신하실만한 곳이 영 마땅치않아서요"


"...."


테미의 눈동자에 의혹의 빛이 고여져간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데릭의 눈동자에도, 한층 더 심한 당황이 그대로 쏟아져나온다.


뱃속에 수백마리의 뱀을 넣어놓은 상인들과 다루기 까다로운 귀족들을 지금껏 수도없이 마주해온 테미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단번에 눈치챌만한 이정도 변화를 그녀가 놓칠리없었다.


"제가 꼭 들어야할 말씀을 하시려던것 같은데, 괜찮으시면 그 뒷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아니, 아닙니다. 머리속에 떠올렸던 곳이 지금 사용하기엔 그다지 좋을것같진 않아서요"


거짓.


"그러니까 그곳이 어디죠?

일단 직접 봐야 판단이 가능하겠는데요?"


"어, 예?

아...음, 저, 저도 함부로 갈 수 없는 곳이니까요 아무래도 알려드리진 못할것 같네요"


거짓.


"위치만이라도 알려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저도 그 위치는 모릅니다"


..사실?


"실은 저도 말로만 들어온 곳이라서요.

실제로 있는 곳이라곤 하는데...저는 자세히 알고있지 않아요"


이것 또한, 사실.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그가 말하는 그 '장소'가 영 신경이 쓰인다.

위치를 알고있지 않다면 실제로 본적도 없다는 말일테니.


그런데 그런곳을 에밀리 아가씨가 피신하기 좋은곳으로 떠올렸다?


대체 어떤 곳이기에..


"..어떤 곳인지만 알려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마을에 그런곳이 있다면 유사한 장소가 있을 수 있으니 참고를 위해서라도.."


"마을 주민들에게 그것에 대해 물어도 원하는 답을 들을 순 없을거요"


문득 들려온 약간은 쉰듯한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주변이 피부를 따갑게 찔러오는 화염으로 뒤덮인 길.

그 일렁이는 새빨간 화염의 한 가운데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점차 형태를 띄어간다.


"무엇보다, 그 위치와 어떤곳인지에 대해 상세히 알고있는 사람은 이 마을의 광산조합장인 나밖에 없으니 말이오.

데릭은 그저 그 존재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


"..로번 리가튼 영지관리관"


주름이 가득한 얼굴 이곳저곳이 재 투성이로 얼룩진 채 걸어나오는 그의 당당한 풍채에선 주변을 메운 화염에도 지지않을 만큼의 위압감과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데릭을 향해 날카로운 감을 세우고있던 테미는 그 속에서 로번이 전하려하는 메세지를 민감하게 잡아낸다.


'더이상 그것에 대해 묻지 말게'


그 무언의 경고는 문답무용.

공작영애를 피신시켜야하는 급박한 상황의 테미에게 있어선 절대 물러설 수 없는 문답의 공방이었지만, 그는 이 이상 그 어떤 질문에도 대답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선을 그으며 테미와 데릭 앞에 다가와 섰다.


로번의 옷을 태우고있던 불 하나가 불지도 않은 바람에 휩쓸려 꺼지듯 훅, 스러진다.


"루디는, 자경단원들을 모으러갔는가?"


"네. 영문모를 폭발음이 들리자마자 집을 뛰쳐나갔습니다"


"역시 마을의 위기엔 항상 누구보다 빨리 움직이는군.

영 무릎이 안좋은 탓에 늦장부리며 나오는 난 더 늙기전에 일선에서 물러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어"


곧 기세를 거둬내며 씁쓸한 미소를 띈 채 고개를 젓는 로번의 자조섞인 말에 데릭은 당치도 않는다는 듯 양손을 들어 손사레친다.


"세상에 어느 누가 조합장님의 손을 보고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음? 이거말인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들어보이는 로번의 손바닥은 재가 묻어 새까맣게 물들어있었다.

아니, 그건 붉은색이 섞인 검은색이다.


화상에 이미 피부란 피부는 모두 벗겨져버린 일그러진 손.


"조합장님의 성격이시라면 그러실줄은 알았습니다만..."


"집을 나서자마자 불길에 휩싸인 집 앞에 주저앉은 에툴을 보곤 차마 가만히 있을 순 없더군.

집 안에 에툴의 아들들이 있단 이야기를 듣곤 나도모르게 몸이 움직였다네"


"그것 뿐만이 아니실것 같은데요?"


"여기까지 오는동안 에툴과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한둘이어야지"


잔뜩 일그러진 손.

이곳저곳이 불타 본연의 기능을 대부분 잃어버린 옷.

꼬불꼬불해진 머리카락.


무엇보다, 그가 걸어나온 장소와 그의 몸에서 풍겨져나오는 뜨거운 열기.


"조합장님의 집이 여기서 반대편이신데 그런곳에서 나오신다는건..."


"흠, 불이 계속 번져가더군"


자경단원들처럼 많은 수가 모여 화재 진화 또는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구조하는건 어렵더라도 로번은 로번 나름대로 본인의 몸을 살라가면서 마을 주민들을 구해온거다.


뜨거운 불 속도 마다않고.


그런 사람이 늙었다느니 일선에서 물러난다느니 하는건 오히려 과시 아닐까?


애시당초 그러실 분은 아니지만, 그의 과거가 어땠는지 알고있는 데릭에겐 로번이 노쇠한 모습은 쉬이 상상하기 어려웠기에 그의 그 말이 그저 투정처럼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데릭, 자네 집은 어쩌고 여기있는가?"


"예? 아, 저도 무슨일인지 알아보려 나왔습니다만..."


"예끼 이보게. 자네 아이들은 어찌하고?"


"필은 콜햄씨 집에 가있고 니르는 공작영애와 집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왜 집을 비우고 여기있냐는 얘길세"


어째서 말을 알아듣지 못하냐는 듯 답답한 한숨을 내쉰 로번이 뒤이어 꺼낸 이야기에 데릭의 시야가 순간 하얗게 새어버린다.


"저 위에 내리는 것들 중의 하나가 자네 집쪽으로 떨어져 내리는 걸 보았네만?"


"?! 그 무슨...?!"


그럴리가 없다.

로번의 말을 들은 테미는 눈을 부릅뜨며 그를 바라본다.


머리속에 그린 전경도엔 아가씨가 계신 데릭 톨로즈의 집은 그 주변을 포함해 아주 깨끗했다.

체크 하나 없이.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을 궤적이다.


"높은 하늘만 바라보다 낮게 날아가는 새들을 놓치는 건 사냥에 있어서 아주 흔한 실수지"


"!!!"


낮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닌 '날아오는 것'.

지금껏 그런건 보지 못했다.

눈에 들어온 모든것이 하늘에서 내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마을 안에서 보았기에.

저것들이 어디에서부터 온지 모르는 이상, 그저 떨어져 내리는 것 뿐만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마을에 내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만 했다.


눈 앞의 현실이 숨겨놓은 송곳에 손가락을 찔려버린 기분이다.


"전, 먼저 아가씨에게로!"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몸을 날리는 테미를 따라가려던 데릭은 잡아당겨지는 팔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의 팔을 잡아 제지한 로번은 그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데릭이 잊었던 것을 다시 끄집어올려낸다.


"이보게 데릭, 자네는 빨리 콜햄의 집이 있는 쪽으로 가보게!

자네라도 필을 데리러 가야하지 않는가! 니르와 공작영애는 테미 양에게 맡겨!"


"...알겠습니다"


그말 그대로다.

마을 어디도 안전하지 않다.

저것이 마을에 떨어져 내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이상, 콜햄의 집에 있을 필 또한 위험에 처해있는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습격자들을 단숨에 처리한 테미라면 니르를 맏겨도 괜찮으리라!





"...."


테미와는 반대방향의 화염 속으로 사라져가는 데릭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로번은 긴 한숨을 토해낸다.


마치 자신의 얼마남지 않은 생명 그 자체를 토해내듯이.


"...허어, 영 빈말은 아니었는데.."


늙었다는 말, 요새들어 입버릇처럼 되내이는 그 말은 로번 스스로가 자신을 가장 잘 알기에 하는 말이기도 했다.


옛날같으면 이런것 쯤이야 가벼이 하고도 멀쩡했을텐데..


몸 속을 집요하게 맴도는 매캐한 연기가 남긴 어지러움과 화마의 손길이 쓰다듬고간 상처들의 통증, 그리고 말을 듣지 않는 팔과 다리.


그저 정신력으로만 버티던 몸이 무너지듯 땅에 주저앉는다.


"어서 넘기고 물러나야겠어...먼저간 친구들에게 미안해서 붙들어온 목숨값은 나름 치른것 같으니.."


화마를 뚫고 들어가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을 구해낸건 그다지 힘든일이 아니었다.

그보다도 더욱 끔찍한 곳에도 들어가봤고, 탄트라 광산을 개척하면서 갱도 안에 화재가 일어난적 또한 한두번이 아니니 익숙하다면 익숙한 일.


비록 로번을 찾아온 건 그런 익숙한 것뿐만이 아니었지만.


"...쿨럭!"


등에서 전해져오는 고통이 기침에 섞여 토해져나온다.

붉은 비명으로 땅을 물들이는 그 고통에 로번은 아득함을 느낀다.


옛날이라면, 젊었을 적 자신이라면 이정도 상처는 버텼을지 모른다.

허나 지금의 자신은 화마에 시달려 체력이 떨어진 그저 노쇠한 노인일 뿐.


무너지는 건물 잔해가 할퀴고 지나간 등을 데릭과 테미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던것이 고작이었을 정도로 이미 자신은 많은 부분이 소모되어있었다.


"...크음.."


시야가 뿌옇게 가려져온다.

그 너머에 일렁이는 불꽃의 색 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정도로.


그저 로번이 알 수 있는 건,


'...드디어 때가 왔는가'


가야할 곳으로 갈 때가.


더 이상 미련은 없는 목숨이다.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아들은 좀 못미더워도 이미 한사람 몫은 충분히 하는데다가, 이미 예전부터 그려왔던 때였으니까.


저세상에 먼저 가있는 어릴적 친구들은 뒤늦게 따라온 날 보면 뭐라고 할까.

어째 그리 늙었냐며 깔깔 웃어대겠지.

그럼 너희들이 아직 꼬맹이인것 뿐이라며 마주 비웃어주면 될거다.


그들에겐 그거면 될거다.


하지만...


"..소넬, 보고싶구려..."


죽어서 만날 그녀에겐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을것같다.

수없이 떠올린 그녀의 얼굴이 미소를 얼굴 한가득 피운 채 눈 앞을 메운다.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여인.

귀족의 박해와 착취속에서 피어난 한떨기 야생화같았던 그녀를 지키고자 행했던 도주행은 오히려 그녀를 로번에게서 앗아갔다.

피는 이어지지 않았으나 그 처참함만이 존재하던 고향에서 로번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


탄트라 마을을 개척하고, 어찌어찌 인연이 닿은 다른 여인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은 자신이 어찌 그녀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단말인가.


그 복수를...미처 다하지 못했는데.


"...."


미안함에 이리저리 옮기는 시선에도 여전히 그녀는 미소를 띄운 채 사라질 줄 몰랐다.


달빛에 반짝이는 미소도 있었고,

불꽃에 붉게 빛나는 미소도 있었고,

여기저기서 날아와 쌓인 잿속에도 그녀의 미소는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그 얼굴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를 떠올릴때면 언제나 그래왔듯.


그녀의 얼굴이 항상 미소를 띈 채 떠오르는 이유가 뭘까.

그녀를 떠올린 시간만큼 답을 구해왔지만 그 답의 단 한자락도 로번은 손에 넣을 수가 없었다.

이젠 닿을 수 없는 그녀처럼.


이곳에서 가족을 이루고 살면서 꽤나 나아졌던 상처였다. 그렇기에 한동안은 떠올리지 않으려했었고 떠올리지 않기도 했었다.


나이가 들고, 옆을 지켜주었던 아내마저 떠나가고 난 뒤엔 그런 삶에 익숙해져 잊고 살아왔다.


며칠 전 '그'를 만나기 전까지.


"...후우"


몸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화염에 당한 열기인지, 아니면 자신이 일으킨 또 다른 화마인지..


둘중 어느쪽이더라도 몸을 태우는 것은 같으리라.

그것이 로번을 더욱 죽음에 가까이 하리란것도.


잊고 살아왔던, 삶을 포기했던 그 때 자신이 살기로 마음먹은 그 이유가 눈 앞에 나타나서도 로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게 너무 괴로워서.

그게 너무 허망해서.

그게 너무 아쉬워서.

그게 너무,


애달파서.


"..허, 허허.."


눈 앞에 그려져있던 그녀의 얼굴이 크게 일렁인다.

그림자가 비추는 소넬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고자 눈을 찡그려보지만 뿌얘진 시야 속엔 계속 그림자가 드리워가는 그녀의 얼굴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내, 그 그림자는 사랑했던 이의 얼굴을 삼켜버린다.


옛날, 그녀를 삼켰던 횃불아래 그림자들이 그랬던것 처럼.


"....?"


그녀의 얼굴을 삼켜버린 검은 그림자가 점점 커져온다.

마치 인간의 형상을 한...뜨거운 열기 속에서 태어난 검은 인영.


그게 무엇인지 로번은 잘 안다.


자신을 데려갈 저승의 사자.


하염없이 뿌연 시야 너머의 그를 눈에 담아내며 로번은 드디어 찾아온 이 순간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복수'라는 삶의 가치를 뒤로 미뤄둔 그 순간부터 자신은 그 자격조차도 없으리란 생각에 그저 저 세상에 가면 먼 발치에서나마 소넬을 볼 수만 있길 간절히 바래왔을 뿐이었다.


기력이 쇠한 몸으로 거듭된 구조와 불길속을 맨몸으로 헤집은 지금, 그래도 조금이나마 남은 것들에 대해 마지막 인사는 할 수 있었으니 다행일 따름이다.


번쩍, 무언가가 안개 낀 시야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본다.


어느 순간부터 애타게 기다리던...자신을 소넬에게 데려다 줄 안내자의 도래.

이제 눈 앞으로 다가온 그 소원의 시간을 고대하며 로번은 눈을 감는다.


슈아악! 챙!


"...?"


"..그 기개가 이리도 쉽게 무릎꿇을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이오. 로번 영지관리관"


그 목소리에.

한순간에 밝아진 눈동자 속에 들어온 그 뒷모습에.


고개를 한껏 젖혀 부릅뜬 눈으로 자신에게 또 다른 그림자를 비춘 방해꾼을 올려다보는 로번의 귓가로 그 낮은 목소리는 사정없이 떨어져내린다.


"나 첸드릭 아기오스는 그대에게 아직 할말이 남아있다오.

그러니 여기서 그리 쉽게 스러지진 말아주오. 아시겠소?"


마지막이었어야 할 순간에, 마지막일 순 없노라며 그가 눈 앞에 나타났다.


작가의말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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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치에라의 투사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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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Chapter [만남] : Epilogue. 밤이 밝은 뒤 찾아온 시간은. 18.02.10 111 0 13쪽
45 Chapter [만남] : @. 밤이 밝아오는 사이에. 18.02.10 74 0 34쪽
44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5) 18.02.10 89 0 27쪽
43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4) 18.02.10 79 0 27쪽
42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3) 17.12.22 87 0 23쪽
41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2) 17.12.18 114 0 27쪽
40 Chapter [만남] : 06. 어둠을 찢어내는 달빛. (1) 17.12.16 100 0 19쪽
39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8) 17.12.15 104 0 22쪽
38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7) 17.12.14 109 0 26쪽
37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6) 17.12.13 86 0 34쪽
»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5) 17.12.12 85 0 34쪽
35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4) 17.12.10 92 0 23쪽
34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3) 17.12.09 85 0 32쪽
33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2) 17.12.08 105 0 22쪽
32 Chapter [만남] : 05. 마을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그림자. (1) 17.12.07 134 0 23쪽
31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6) 17.12.06 101 0 27쪽
30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5) 17.12.05 88 0 23쪽
29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4) 17.12.04 101 0 25쪽
28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3) 17.12.03 77 0 22쪽
27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2) 17.12.02 105 0 23쪽
26 Chapter [만남] : 04. 그것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1) 17.12.01 97 0 24쪽
25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9) 17.11.30 122 0 22쪽
24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8) 17.11.29 98 0 24쪽
23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7) 17.11.28 83 0 23쪽
22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6) 17.11.27 90 0 29쪽
21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5) 17.11.26 97 0 32쪽
20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4) 17.11.25 107 0 27쪽
19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3) 17.11.24 150 0 26쪽
18 Chapter [만남] : 03. 아가씨의 비밀. 그리고.. (2) 17.11.23 102 0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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