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다툼
─아아아주 예에에전에 따악 한번 한 적이 있었지요. 영주님께서 첫 승전하시고 휴가 받으셨을 때 일입니다. 저어기, 저 2차 성곽에서부터 카퍼레이드를 했었어요. 저희는 오와 열 맞춰가지고 분열해서 고대 성벽 안까지 들어오고요. 아주 인상적인 승리였기 때문에 전 중대원이 다 포상휴가를 받았었거든요.
─우와, 그 정도면 거의...!
─그럼요. 그때 진짜 대단했죠.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다 나와 도열해 서서 꽃종이 뿌려주고... 선대 영주님께서는 아예 곳간을 싹 다 털어서 빈자들에게 나눠주시고는 눈물까지 흘리셨습니다.
─정말 기쁘셨겠어요.
─그런데 그게, 그 다음 휴가부터는... 크흠! 영주님께서 포상휴가 받으시면 선대영주님께서 자꾸 자리를 비우시는 바람에... 뭐 때맞춰서 중요한 약속 잡으시고... 크크크크.
─푸흡! 정말요?
─그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죠. 저랑 괴현이, 석구 같은 애들은 곧바로 전쟁 뛰러 다시 올라가서 몰랐는데, 나중에 들으니까 그때 선대영주님께서는 정말 파산할 뻔하셨다더군요. 이제는 그때처럼은 절대 못합니다. 기둥뿌리 흔들리니까요. 감시관도 가만 안 있을 거고... 혹시 종전이라도 된다면 또 모르겠지만요.
─아... 그러면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는 제가 어떻게 환영해 드리는 게 좋을까요?
영기 옹이 정색을 한다.
─도련님. 도련님께서는 그냥 자리만 지켜주시면 됩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영주님께서도 좋아하실 거예요.
말이 궁해진다. 먼 산만 바라볼 수밖에.
─...어? 대대장님, 저게 뭐죠?
─잘못 들었습니다?
─저어기, 흙먼지 안 보이세요? 붉은 기旗도 보이는 것 같은데.
예비역 노인들이 눈을 찡그린다. 단체로 가는귀가 먹었다는 것 말고도 공통점이 또 있네. 다들 노안이 오셨구나. 대대장이 품에서 망원경을 꺼내 들여다본다.
─오! 이제 오시나 봅니다. 예정시간보다 빨리 오시네요?
그때 멀리서 나팔 소리가 들려온다.
뿌우우우! 뿌우우우! 뿌우우우우!!!
─눈이 좋으시군요, 도련님. 영주님께서도 역시 가족들 다시 만날 생각에 서둘러 오신 거 같습니다. 이제 저희랑 내려가시죠. 북문 광장에 자리가 준비돼 있습니다.
성벽 계단을 내려가는 노병들의 걸음이 어째 가볍고 조급해 보인다. 어제 나랑 같이 오르내리던 때와는 딴판이다.
만나고 싶어 하는 거다, 젊은 시절부터 함께 싸워온 지휘관이자 전우를. 이것만 봐도 어느 정도로 부하들의 신망을 얻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아마도 좋은 영주가 아닐까 싶은데.
두근거린다. 이쪽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일까.
아, 여기 광장이 있었네? 간이의자들이 광장 한복판부터 옆으로 오를 맞춰 나란히 놓여 있다. 성내 주요인물들이 다 나와 각자의 의자에 앉아있다.
나를 보자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한다. 다시 앉지 않는다. 영주를 영접하기 위한 좌석 같은데, 그럼 나는 저 빈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면 되는 건가?
석구 옹이 먼저 보인다. 역시 단체생활과는 좀 거리가 있는 분인 듯싶다. 응?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당장 자리 바꿔놓으라고! 귓구멍에 ㅈ박았냐, 이 씹할 새끼들아!
궁금하지만, 왠지 석구 옹 가까이 가는 건 좀... 무섭다. 잠깐만 떨어져서 상황을 봐야겠어. 영기 옹이 석구 옹에게 다가간다.
─뭐하냐, 석구야? 왜 그러는데?
─형, 이 씹새끼들이 자리를 이 따위로 깔아놨잖아!
내 옆에 서 있던 대대장 얼굴도 따라서 심각해진다.
─여기가 우리 자리라고 이 병신새끼들아! 도련님이 의전서열 2위인데 누구 맘대로 자리를 바꿔놔?!
우어? 그럼 내가 영주 다음으로 의전서열이 높은 건가? 그런데 나는... 그깟 자리 좀 바뀐다고 해도 그다지 억울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냥 놔두면 안 될까요?
말리고 나설 줄 알았던 영기 옹이 한 술 더 뜬다.
─이 새끼들이... 누가 시켰냐? 어?!
자리를 준비하던 작은 사람들은 전부 사색이 돼 있다. 내 옆에 선 대대장 얼굴도 일그러진다.
─대답 안 해? 이런 씹할 하루살이 같은 새끼들이 진짜!
─영기 형, 하지 마. 됐어. 의자 몇 갠데 지금 바꿔놓으면 되지. 뭐.
시종들은 감히 말리지 못한다. 그러나 석구 옹이 좌석에 손을 대자마자 멀찍이서 고함 소리가 들린다.
─멈추시오!
허리에 칼을 찬 중년의 남자다. 나보다는 큰 체구지만, 예비역들보다는 현격히 작은 몸집. 딱 중간 정도라고 보면 될까?
아니다. 예비역 노인들이 프로레슬러 체형이라고 하면 저쪽 체형은 모델이나 연예인 체형이라고 하면 되겠다.
망토 왼쪽에 매 문양을 새긴 건 똑같지만 천 색깔이 보라색이다. 갑옷은... 입지 않은 것 같다. 나처럼 망토 밑에 예복만 입고 있는 거다.
석구 옹이 코웃음을 치더니 칼자루에 손을 가져간다. 가까이 오면 썰 것 같다. 아, 오줌 마려.
영기 옹이 그 손을 덥석 붙들더니 칼자루에서 떼어낸다. 석구 옹은 눈으로 항의를 하지만, 곧 수긍하고 몸을 모로 홱 돌려 버린다.
가만 보니까 그건 방금 고함을 지른 중년 남자 때문이 아니고, 그 뒤에서 광장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는 여자 때문인 것 같다.
마치 얼음을 빚어 만들어놓은 것 같은 미인이다. 20대 후반에서 30초반 정도?
─저 분은 누구시죠? 제가 잘 기억이...?
─...도련님 어머님 되십니다.
에엑?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저게 우리 엄마라고? 어머니를 못 알아본 걸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입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예? 아, 제가 그...
─놀라실 거 없습니다, 도련님. 기억 안 나시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죠. 계모니까요. 마님께서 돌아가신 뒤 한참 어려운 시기가 있기는 했지만, 어떻게 저런 게 다 박혀 들어왔는지 원...
내게로 돌아온 영기 옹도 한마디 보탠다.
─주판알이나 굴리던 천것들이...
의기양양해진 사내가 계모라는 사람을 에스코트해 이쪽으로 데려온다.
괜히 놀랐네. 그러니까 아버지의 후처인 거구나? 저쪽 세계와는 달리 내 어머니는 안 계신 거고.
기분이 이상해진다. 어머니를 다시 보고 싶으면 저쪽 세계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겠는데.
그 생각에 울적해하는 사이, 그 계모라는 여자와 보라색망토의 남자는 내 앞을 스쳐 지나간다.
아차, 그래도 어머니인데 인사를 안 했다. 그런데 대대장도, 영기 옹도 나무라는 기색이 없다. 계모 쪽 사람들도 기대를 안 하는 것 같다.
첫 번째 자리 앞에 계모가 선다. 그 뒤로 보라색망토의 남자들이 시립한다.
─아 이런 씹할 ㅈ까고...!
석구 옹은 들으라는 듯 욕설을 뱉더니만 아예 자리를 비우고 사라져버린다.
아, 분위기 진짜 ㅈ같네.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영기 옹, 저기 뒤에 서 있는 젊고 잘생긴 친구는 누구예요?
─도련님의 의붓동생이죠. 물론 도련님과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입니다. 계모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이니까요. 의전서열 안에도 안 들어가는 애인데, 굳이 저렇게 기어 나와서 엄마 치맛자락 붙들고 서 있네요.
─그럼 계모와 아버지 사이에서는...?
─없습니다. 저희로서는 천행이지요. 지금도 저렇게 설치는데 덜컥 애라도 들어섰다간 정말이지...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키 크고 잘 생기기는 했네. 그런데 하루 정도 자리 양보하는 것쯤이야 뭐...
그런데 보라색망토의 남자가 투덜거린다.
─아니, 그러게 평소에 좀 잘 다니든가 하든지. 왜 아무 때나 멋대로 나타나서 자리 가지고 트집이야...?
어? 이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은데? 물론 직접 나한테 대고 한 소리 같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시비를 거는 거라고 밖에는...
성내에는 무슨 파벌 같은 게 있는 모양이다. 영주 친자식 파와, 계모 파 라고 명명하면 될까. 그리고 이 두 세력 간에는
─아가리 싸물어라, 이 씹새끼야. 좋은 날 칼 맞고 뒈지기 싫으면.
...알력이 좀 있는 것 같다.
석구 옹이다. 어디 간 줄 알았더니 지금은 어느새 대열 뒤로 밀고 들어와 서 있다. 어제 승혜에게 그랬던 것처럼, 보라색 망토를 입은 남자의 머리를 한손으로 움켜쥐고 있다.
─이 미친 새끼가!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석구 옹의 손을 뿌리치고 두 걸음 크게 물러선다.
스릉!
그리고는 칼을 뽑아들고 몸을 도사린다. 그런데 그래 봤자... 아무것도 모르고 6시 방향 털린 건데 이미 진 거 아닌가? 죽이려고 했으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었잖아.
그나저나 신기하게 생긴 칼을 쓰네? 칼이 굽은 각도와, 날과 자루의 길이 비율을 봐서는 전체적으로 일본도 같은 윤곽이다.
칼자루만 조금 다르게 생겨먹었는데, 전체적으로 일본도랑 비슷한 선을 지닌 칼이다. 왜지? 여기에서는 전부 엄청 커다란 직검을 쓰던데.
석구 옹은 칼을 빼들지도 않고 코웃음을 치더니 양 팔을 벌리고 대열 앞으로 걸어 나간다. 정말 대담한 사람이다. 쳐 볼 테면 쳐보라는 건가?
일촉즉발의 상황, 누구도 나서서 말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
히히히힝!!!
말울음소리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북쪽 성문에서 광장으로 이어지는 길목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말 한 마리가 당도해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봤던 사람들 중 가장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그 말 위에서 이쪽을 보고 씩, 웃는다. 시원한 웃음이다.
마침 바람이 불어 사내가 들고 있는 붉은 매의 깃발이 나부낀다. 우와, 저렇게 커다란 깃발을 무슨 부채처럼 들고 서 있네?
거인이 들고 있던 기旗를 시종들에게 넘긴다. 대기하고 있다가 그걸 받아든 시종들은 깃발이 펄럭일 때마다 심하게 비틀거린다.
남자가 망토를 홱 젖히고 시원스레 말에서 내린다. 멀리서 봐도 압도적인 체구다. 망토 밑에 숨겨져 있던 갑옷은 힘으로 가득 차 풍선처럼 부풀어있다.
말에서 내리는 간단한 동작만으로도 갑옷 마디마디가 터질 듯 뒤틀린다. 눈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다. 대단한 장사다.
저게 내 아버지인가?
─아빠아아앙!!
내 등 뒤에서 뭔가 곰 같은 것이 확 뛰쳐나간다. 근오다.
으잉? 아빠라고?
─1대대장 척인성 중령입니다. 아, 이젠 대령(진)이겠네요. 이번에 데리고 오신 거 보니까 아마 진급시키실 것 같습니다.
퍼억!
칼을 빼들고 있던 보라색 망토의 팔을 근오가 들이받고 지나간다. 남자는 칼을 거의 놓쳤다가 간신히 간수한다.
─푸힛!
대대장도 영기 옹도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고생을 하는 것 같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참아야 한다. 소리 내서 웃으면 사태가 더 악화될 테니까.
남자는 시뻘개진 얼굴로 칼을 칼집에 넣는다. 석구 옹은 남자에게서 아예 등을 돌리고 대열로 걸어 들어와 내 뒤에 선다.
근오는 척인성에게로 달려간다. 전속력이다. 그 부친 또한 광장 한복판을 향해 내달린다. 전력질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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