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opia 3.5 미운 오리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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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1797_naru8888
작품등록일 :
2017.12.31 04:33
최근연재일 :
2018.02.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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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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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내가 그 사람들을 용서하게 되는 날

DUMMY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마르틴 니뮐러 -


“언제쯤 도착하려나..”


오늘은 새로운 ‘나’와 마주하고 난 뒤로 찾아온 첫 주말이다. 서로 어색한 기류도 풀 겸, 아빌과 함께 놀러 나가기로 했다. ‘나’도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한 덕에 별 트러블 없이 약속이 잡혔다. 당일치기로 다녀올 예정이었기에 적어도 아침에는 출발을 해야 밖에서 뭐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9시가 되고, 10시가 지났다. 지금은 11시가 넘었고, 아침 안으로 오겠다는 그녀의 약속이 점점 가까워져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후 12시가 되기 10분 전이다. 아침 안에 온다던 그 말이 설마 이런 뜻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안 오는 건 아니겠지..?”


혹시나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를 믿는 편이 합리적인 결정 같았다. 아직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우리는 서로에 대해 많이 공유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가족과 같이 내 옆에 있어주겠단 그녀에게 나는 내 인생을 걸고서 배팅을 했다. 사실 그런다고 해봤자 비수와 같은 역할을 해 줄 것도 없었고, 내 과거의 삶도 빈약했던 터라 말만 거창하게 했을 뿐이다. 게다가 아빌은 내 과거에 대해 알고 있다니 그 이상으로 이야기를 꺼낼 것이 뭐가 있을까.

앞에서 말했지만 난 내 나름대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준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오점이라고 한다면 그녀는 내게 ‘본인에 대해 아는 것은 없다’ 혹은 ‘모른다.’라는 이야기만 해줬다. 어떻게 보면 맥 빠지는 결과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녀는.. 아니 ‘나’는 옛날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다거나 아예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쾅!’


갑자기 아빌이 문을 세게 열고서 등장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녀는 숨을 거칠게 고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의 시선은 자신의 손목시계를 향해 있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음절 사이마다 숨소리를 집어넣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만큼 급하게 뛰어왔다는 뜻이겠지. 늦지 않았다는 건 아마 시계를 보고 한 말인 듯했다. 나 역시 그녀처럼 벽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11시 59분이었다. 아빌의 말처럼 늦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다지 적당한 시간에 온 것 또한 아니었다.


“정말 12시에 맞춰서 올 줄은 몰랐네..”


작게 투덜거린 게 들린 모양이다.


“오해하지 마라. 절대 귀찮아서 늦었다던 가 그런 게 아니니까. 개인적인 일 때문에 바빴다. 워퍼에 써놨던 오늘 내 일정을 보여줄테니 기다려라.”


그렇게 속주머니에 손을 넣어 한참동안 무언가를 찾던 그녀의 표정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거.. 거짓말..”

“왜요, 또.”


보나 마나 별 시답지 않은 일로 오버하는 거겠지..


“두고 와버렸다..”


뭘 놓고 왔다는 거지?


“워퍼를.. 사무실에 놓고 와버렸다...”


그게 그렇게 심각한 일인 건가? 말하는 걸 보아하니 어디에 두고 온 건지도 알고 있는 것 같고, 그냥 가서 찾아오면 되는 거잖아?


“좀 늦게 출발해도 되니까 지금 가서 가져오시면..”

“그게 안 되니까 이러는 거다.”


그녀는 날 바라보며 말했다.


“방금 내가 어느 시간대에 있다가 온지 아나?”

“그걸 알아서 뭐해요, 내가.”


생각해보니 아빌은 우리와 다르게 타임머신 같은 기능으로 이곳을 오가고 있을 것 같았다. 익숙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이따금씩 잊곤 한다. 그런데 애초에 그런 비현실적인 능력을 정상적으로 바라보며 인지하는 것도 웃긴 일이다.


“됐고, 그래서 어쩔 거예요. 전 안 가도 괜찮아요. 워퍼를 찾는 게 더 중요하니까..”

“괜찮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내게는 별문제 없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지만 그녀의 속마음은 그러지 못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눈동자 색깔이 막 변하는 게 굉장히 신기하게 여겨졌다. 지금도 똑같다. 저번처럼 또 깜빡했을 게 뻔했다. 렌즈를 끼지 않은 그녀의 눈은 보랏빛과 푸른색을 오가고 있었다. 스스로 눈치 챌 때까지 비밀로 해볼까..?


어쨌든 본인이 괜찮다니까 슬슬 출발해도 상관없을 것 같다.


“그럼 가요.”


그렇게 우리가 향한 곳은 생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부모님의 납골당이었다.


***


확실히 지금은 예전보다 그들에 대한 악감정이 많이 줄었다. 사실은 이 전에도 가끔 이사장님이나 실장님도 한 번 갔다 오라며 부추긴 적도 꽤 있었다. 물론 나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걸 꺼려했다. 아무래도 ‘막상 혼자 가서 그들을 마주할 때 과연 내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자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그랬던 것뿐이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다. ‘그 사람들’을 직접 보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가서 힘들어도 의지할 사람이 있기 때문에 용기를 냈다. 무엇보다 아빌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부모님이라는 존재가 없다는 세계에서 온 그녀가 그들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좀처럼 감이 잘 안 온다.


지하철 몇 정거장 거리에 불과한지라 가는 길은 그다지 멀지 않았다. 의외로 아빌은 교통수단에 능숙했다. 하지만 그러한 것보다 가장 부담스러웠던 건 타인의 시선이었다. 얼핏 봐선 똑같이 생긴 우리 둘 때문이 아닐 것이다. 분명히 아빌의 눈을 보고 ‘잘못 봤나?’하는 마음에 다시 바라보는 시선들이 대다수임이 확실했다. 정작 당사자가 알리는 없다. 옆에서 몰래 흘겨본 그녀의 머리 위에는 ‘?’가 그려져 있었다. 그렇게 역을 나와 얼마나 걸었을까, 곧 납골당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곳의 납골당에는 개별적으로 관리자가 있다고,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곳만의 특징 같아 보였다.


“어떻게 찾아오셨어요? 곧 닫을 시간인데.”


경비 아저씨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를 멈춰 세웠다.


“닫을.. 시간이요?”

“저희는 오후 4시까지만 합니다.”


시계를 봤다. 2시 30분이었다. 아직 폐장하려면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데 왜 벌써 확인하려 하지?


“시간 맞춰서 나갈게요.”

“찾는 거 도와드릴게요, 누구 보러 오셨어요?”


뜻밖의 호의였다.


“안강석과 최지은. 제 부모님이세요.”


컴퓨터로 무언가를 찾던 그가 곧 반응을 보였다.


“어? 첫 방문이시네요.”


의아해하는 그가 내게 물었다.


“그동안 한 번도 안 찾아오시지 않으셨어요?”


아무래도 여기는 방문 기록까지 다 체크하는 곳인 모양이다.


“매번 청소하거나 근무할 때 매번 거기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하긴, 바쁘면 찾아오는 것도 힘들긴 하죠?”


양심이 조금 찔리긴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 이었다.


“네.. 그렇죠.”


그가 팔을 쭉 뻗어 가리켜 보였다.


“저-쪽으로 가시다가 오른쪽으로 꺾어가다 보면 왼편에 있을 겁니다, 부모님도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행여나 기뻐할까..


“감사합니다.”


경비로 보이는 사람과 헤어지고, 아빌과 함께 그가 알려준 방향으로 걸어갔다.


“저기 말이다.”


아빌이 나 불렀다.


“왜요?”


뒤를 돌아보니 언제부턴가 거리가 멀어져있었다. 그다지 내가 빠른 걸음을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아빌 쪽에서 점점 늦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아무래도 못 갈 것 같다.”


탁 트인 지형 때문인지 바람이 몹시 불었다. 아빌의 머리칼이 날려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나도 계속 눈을 찌르는 것 때문에 자주 깜빡이고 있던 터다. 눈에 자극이 들어갔는지 따가우면서 눈물이 찔끔 나기 시작했다.


“바람 때문이라면 조금 참으면 돼요.”


혹시 성가신 바람이 원인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봐서는 그게 이유인 것 같지 않았다.


“지금에야 드는 생각이다.. 차마 네가 그 사람들을 만나는 걸 볼 자신이 없다.”


기대감에 불풀 줄 알았던 내 상상 속의 모습과는 상반된 표정이었다. 조금 아이러니다. 어차피 내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건데 왜 자신이 없다는 건지.. 의중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럼 그냥 돌아갈까요?”


그녀만 괜찮다면 그냥 가도 괜찮았다. 진심으로. 나 혼자 가는 건 의미가 없다.


“그러니까..”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그녀를 돕고 싶었다.


“난 혼자선 안 가요. 같이 갈 거면 가고, 아니면 그냥 돌아가자고요.”


내가 느낀 그녀의 첫인상이 맞는다면 전자를 고를 것이다. 아빌은 이내 한숨을 쉬더니 날 보며 물었다.


“정말.. 정말로 그 옆자리에 말이다.. 내가 있어도 되는 건가.”


처음 알았다. 내 옆에 서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는 의미인 건지는 몰라도 나와는 무언가 다른 접근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 그녀였다. 그녀는 날 두고 고민했고, 난 그런 아빌을 두 팔 뻗어 안고 자 했다. 만약 이게 맞는 거라면.. 나는 내 주장을 밀고 나갈 것이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빨리 와요, 어서 가게.”


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금방 가까워질 거라 믿었던 나 자신에게도 밧줄을 던졌다.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우리의 거리를 하루라도 빨리 근사치를 좁히고 싶은 내 희망사항을 ‘나’에게 던졌다. 아빌은 내 손을 보더니 잠시 멈칫거렸다. 날 경계하는 그런 게 아니었다. 겉으로도 느낄 수 있었던 건 내적 갈등에 중심을 잃어가던 그녀의 본모습이었다. 그것만 잡아줄 수 있다면.. 그 역할을 내가 해준다면 나와 그녀는 기필코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던 아빌이 힘차게 걸어 올라왔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힘이 났다. 내밀었던 손은 채 그녀가 잡기도 전에 내렸다. 이미 우리는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맞잡은 두 손을 앞으로 둔 나와 ‘나’는 부모님의 납골묘로 향했다.


***


“여기인 것 같다.”


아빌이 나보다 먼저 찾았다. 몇 발자국 거리에 있는 비석으로 향하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두 사람의 이름이었다.


‘안강석, 최지은’


한자리에 같이 묻힌 부모님에게 나지막하게 물었다.


“거기서는 서로 안 싸우고 잘 지내고 계시죠?”


그러길 바랐다. 각자의 욕심을 앞세우다 딸을 버리고 먼저 떠났으면 그곳에서는 부디 잘 살고 있기를 바랐다. 그래야 나도 언젠가 죽고 나면 마음 편히 두 사람의 곁으로 갈 수 있으니 말이다.


“가슴 한구석이 시려오고 있는 게..”


아빌의 목소리에서는 통증이 묻어났다. 정말 아픈 것처럼 들려 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도 별 표정 없이 후련하게 부모님을 맞이하고 있는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고개를 떨 군 채 울고 있었다. 딱딱한 말투도 그렇고, 감정이 메마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님을 느꼈다. 그저 닥쳐오는 상황에 따른 감정 표현이 서투른 게 그녀였다는 걸.


“아빌..”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누가 보면 아빌의 부모님을 찾아뵈러 온 줄 알 것 같다. 그 정도로 그녀는 슬퍼하고 있는 듯했다. 우리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신지 알고서 그러는 걸까? 그걸 알고 있다면 절대 이런 감정이 나오진 않을 텐데 말이다.


“너무 그렇게 감정이입하지 마요. 이 사람들은 그만큼의 감정을 줄 정도로 좋은 부모님이 아니었으니까.”


이제야 내 말에 반응을 하는 그녀다. 두 눈을 비비며 나를 위로 올려다봤다. 역시나 예상한 대로 부어있었다. 난 내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그녀에게 씌어주었다.


“그렇게 울 정도는 아닌데.. 그만 울어요. 눈 부으니까.”


난 내가 단 한 번도 예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언제나 거울을 봐도 그 안에는 거지가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아빌은 그러지 않았다. 부잣집 독녀와 같았다. 나와 아빌은 똑같이 생긴 게 맞다. 굳이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내 앞에 선 ‘내’가 조금 더 성숙한 모습을 하고 있다. 부러웠다. 아빌이.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아빌이 내게 말했다. 그녀의 이마에는 ‘목젖까지 이야깃거리로 가득 차있음’이 쓰여 있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낼 거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그냥 담아두시죠.”


무의식적으로 한 마디가 더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갑자기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마치 진동 추 같이 느껴졌다. 별 것도 아닌 일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안구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와도 되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녀에게 손가락으로 위치를 가리켜보였다. 화장실이 급했던 건가..


‘치직-’


내 뒤에서 전자음이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2팀 팀장님, 여기 계셨군요.”


누군가 나에게 다가왔다. 얼핏 봐도 여자였다. 정장 차림에 무전기를 차고 있는 걸보니 아빌과 같은 부류의 사람처럼 보였다.


“하.. 팀장님, 이거 두고 가시면 어떡합니까..?”


노발대발하면서 다가오는 그녀의 손에는 워퍼가 들려있었다. 내가 갸웃거리자 늦게나마 상황을 파악한 그녀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누.. 누구세요?”


그녀가 당황하면서 내가 누구냐는 질문을 했다. 딱 봐도 내가 아닌 아빌을 찾아온 것이고, ‘내’가 사무실에 두고 왔다던 워퍼를 가져다주기 위해서 온 듯싶었다. 속주머니에서 또 다른 워퍼를 꺼낸 그녀가 중얼거리면서 확인한다.


“이상하네.. ‘트래커’가 가리키는 방향은 분명 여기였는데..”


트래커가 뭔지는 몰라도 아무래도 여자는 아빌과 대화를 하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혹시 아빌을 찾는 거라면 지금..”

“둘 다 거기까지.”


화장실에서 돌아온 아빌이 우리를 발견했다.


“팀장님!” / “아빌!”


나와 내 앞에 서있던 여자가 동시에 아빌을 불렀다.


“왜 나한테 오지 않고, 내 자아에게로 간 거지?”


아빌이 그녀에게 물었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 트래커가 보내는 위치 좌표를 찍어서 와보니까 여기였습니다. 혹시 팀장님에게 없으세요?”

“트래커는 나한테 있는데 왜..”


자신의 주머니에서 작은 검은색 장치를 꺼내자 나와 그녀의 시선이 아빌의 손으로 향했다. 분명 저번에 남자가 내게 주었던 그것과 똑같이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저게 그 ‘트래커’구나.


“자세한 이야기는 가서 하는 게 좋을 듯싶다.”


그러면서 아빌은 나를 살짝 흘겼다. 아마도 ‘나’는 나를 의식한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내가 여기서 알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적어도 알 수 있는 건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두 사람이 나누고 있다는 점 정도랄까.


“잠깐만요, 팀장님 지금..”

“일단 돌아가서 얘기를 하자.”


멈칫거리던 여자가 아빌을 보더니 경악하면서 말했다.


“렌즈 또 안 끼셨어요?”

“...”


그렇게 멀어지는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낄 자리는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빌은 한 번 흘긴 이후로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정장 차림의 그녀에게 워퍼를 받아든 ‘나’는 내게 등을 내보인 채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물론 다른 여성과 함께 말이다.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지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뭐,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


“그래도 가기 전에 인사라도 하고 가지, 그냥 가나..”


왠지 모르게 조금 서운한 감이 있었다. 같이 대화를 좀 나누고 싶었던 마음에 온 건 사실이지만 다 와놓고 갑자기 못 갈 것 같다면서 엄살 아닌 엄살을 피우지 않나, 납골묘 앞에서 나보다 더 슬퍼하더니 아는 사람 왔다고 그냥 가버렸다. 만약 이게 평범한 사람 대 사람의 이야기였다면 난 분명 화를 냈을 거다.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지금은 그냥 그러려니 한다. 아직 아빌과 서먹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서운한 감정도 곧 멎었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난 이후에는 오히려 그저 머릿속에서는 ‘만약 부모님이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이 피어오르고 있었을 뿐이다. 분명 사진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답했을 때에는 칼같이 증오를 해왔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다. 이유는 몰라도 왠지 그들이 내 곁에 있는 것 같고,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처럼 착각이 들고 있었다. 이래서 이사장님과 실장님이 한 번 오라고 했던 것일지 모른다.


그때 확성기로 방송이 울려 퍼졌다.


“폐장 30분 전입니다. 아직 안에 계신 분들은 모두 퇴장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목소리를 듣자 하니 아까 정문에서 우리에게 길 안내를 해주었던 경비 아저씨가 틀림없었다. 투철한 직업정신을 바탕으로 이 일을 하시는 것 같아 문득 멋있다고 느껴졌다.


“갑니다, 가요.”


그런 그에게 돌아오지 않을 투정을 부린 나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몇 발자국 걷다 고개만 살짝 돌려 부모님이 안치된 곳을 다시 바라봤다. 거짓말 같겠지만 그곳에선 두 사람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다. 저건 환영이라는 걸.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말 그들과 같이 웃으며 지낸 적이 있을지 모른다는 직감이 날 감쌌기 때문이다. 아무렴 어때. 부모님은 지금 그들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고, 나는 나만의 길을 각자 걸어가는 중이잖아.


“나중에 시간 나면 또 올게요.”


여운을 마지막으로 남긴 난 그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갔다.


***


집에 돌아와 간단히 저녁을 해결한 난 Tv를 틀었다. 딱히 볼 채널이 없어 리모컨만 만지작거리던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뉴스였다.


“다음 뉴스입니다, 오늘 낮 3시경, 서울의 한 주택에서 일가족이 사망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이들 주변에 특별한 원한 관계 등이 있는지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있지만 아직까지 큰 단서를 찾지 못한 것으로..”


어디서 또 누군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소식이었다.


“세상 참 뒤숭숭하네.”


나도 모르게 혀를 차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벌써 세상 좀 살아본 사람처럼 행동하는 내가 우스웠다.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일가족의 몸에서 공통적으로 권총 탄환이 발견되어 사제 총에 의한 살인일 가능성이 있음을 내비쳤습니다.”


총기 사용 금지 국가인 한국에서 사제 총이라니.. 뉴스가 약간 꺼림칙하게 다가왔다. 어차피 내 주변에 벌어질 일도 아니니 상관없으려나?


“뭐, 더 이상 볼 것도 없는데.. 대충 일기 쓰고, 잠이나 자야겠다.”


Tv를 끄고, 책상에 일기장을 편 난 짧게 한 문장으로 오늘의 하루를 끝마쳤다. 나름 길게 생각하고 나서 적은 한 마디였다는 건 확실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내가 용서한 건 아니다. 이제야 한 걸음 다가갔을 뿐이라는 걸 그들도 알아줬으면 했다.


***


미안했어요. 엄마, 아빠.

- 5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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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내가 바로 고독 속의 욕쟁이 피아니스트 김서윤이다 (6) 18.02.11 25 0 17쪽
22 내가 바로 고독 속의 욕쟁이 피아니스트 김서윤이다 (5) 18.02.07 51 0 16쪽
21 내가 바로 고독 속의 욕쟁이 피아니스트 김서윤이다 (4) 18.02.04 75 0 15쪽
20 내가 바로 고독 속의 욕쟁이 피아니스트 김서윤이다 (3) 18.01.31 45 0 18쪽
19 내가 바로 고독 속의 욕쟁이 피아니스트 김서윤이다 (2) 18.01.28 58 0 20쪽
18 내가 바로 고독 속의 욕쟁이 피아니스트 김서윤이다 (1) 18.01.24 44 0 17쪽
17 틀어져버린 시간 (5) 18.01.21 46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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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틀어져버린 시간 (2) 18.01.21 58 0 15쪽
13 틀어져버린 시간 (1) 18.01.21 51 0 17쪽
» 내가 그 사람들을 용서하게 되는 날 18.01.21 31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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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소문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 원조교제 (2) 18.01.10 45 1 19쪽
6 소문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 원조교제 (1) 18.01.10 53 1 19쪽
5 '내'가 남긴 일기장 (2) 18.01.10 57 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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