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총아

웹소설 > 작가연재 > 무협, 전쟁·밀리터리

조정우
작품등록일 :
2018.01.01 12:00
최근연재일 :
2020.03.24 06:00
연재수 :
112 회
조회수 :
74,691
추천수 :
618
글자수 :
588,953

작성
18.03.12 22:00
조회
384
추천
3
글자
11쪽

천성 사태의 번뇌

DUMMY

붉은 낙엽이 휘날리는 소림사의 마당에 흰색 도포를 입은 노년의 여인이 눈을 감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마에 고운 주름이 잡힌 여인은 얼핏 보면 쉰 살 쯤 되어 보였지만, 실제 나이는 예순이었다.


예순의 나이에도 여전히 얼굴에 고운 자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젊은 시절엔 꽤나 미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한동안 눈을 감은 채 상념에 잠겨 있던 여인이 별안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 천지만물의 이치에 통달한다는 이순(예순 살을 이르는 말)의 나이에 이르도록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니,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구나!"


눈을 감은 채 한숨을 내쉰 여인은 이때서야 눈을 뜨더니 품속에서 서신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제자 양소청이 사부님께 삼가 글월을 올리옵니다.

사부님께서 아미를 떠나신 후 많은 제자들이 사부님을 찾아 모시고 오겠다는 명분으로 하산한 후 귀환하지 않고 있습니다. 귀환하라는 명에 따르지 않는 제자들을 출교시키려 해도 그 숫자가 너무 많아 자칫 아미의 명성에 누를 끼칠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실정이오니,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저로서는 더이상 장문인의 중임을 감당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제자의 부덕한 소치로 말미암은 것이나, 제자가 무능하여 이에 대한 마땅한 해결책을 마련할 수 없사오니, 부디 사부님께서 아미로 돌아와 다시 우리 제자들의 장문인이 되어 주시기를 간곡히 청하옵니다.'


여인은 지난 수십 여 년간 무림의 태두로 명성을 떨쳐온 아미의 전임 장문인 천성 사태였다.


서신을 다 읽은 천성 사태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나 스스로의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는데, 어찌 일문의 장문인으로서 제자들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자신이 가장 아끼던 제자였던 왕총아를 출교시킨 이후 천성 사태는 번뇌하고 있었다.


제자를 잘 가르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자신이 훌륭한 사부가 못된다는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천성 사태가 아미의 장문인이 된 지난 수십 여 년간을 돌이켜 보니 자신이 지나치게 고지식하여 제자들을 불행하게 만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부란 무릇 제자들에게 엄격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그랬던 것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고지식함의 극치가 아닐 수 없었다.


제자들에게 자상한 사부가 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제자들에게 자상한 사부가 되지 못한 것이 한이로구나!"


천성 사태가 중얼거리며 탄식하자 뒤쪽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선재로군요. 깨달으심을 봉축드립니다."


혜명 대사의 목소리였다.


혜명 대사와 천성 사태는 젊은 시절에 서로를 잘 알고 지내던 사이로 천성 사태는 혜명 대사의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천성 사태는 오랜만에 만난 혜명 대사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은 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깨달음이 너무 늦었는데, 어찌 봉축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겠소?"


천성 사태와 혜명 대사 모두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성격이었다.


혜명 대사는 손님으로 찾아온 천성 사태가 인사도 하지 않았음에도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무릇 너무 늦은 깨달음이란 없는 법인데, 이제라도 깨달으셨다면 어찌 봉축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있겠소?"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듯 천성 사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혜명 대사의 말씀이 지당하오. 이제 이 몸은 깨달음을 실천하기 위해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보겠소."


천성 사태는 자신의 제자들이 있는 아미산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혜명 대사, 그럼 나중에 또 봅시다. 안녕히 계시오."


천성 사태가 두 손을 모아 작별인사를 건네자 혜명 대사도 합장하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천성 사태, 잘 가시오."


천성 사태가 막 자리를 뜨려고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뒤쪽 마당에서 피묻은 회색 도포를 입은 출가제자가 급히 달려오더니 기다려 달라는 듯 손을 들며 큰소리로 천성사태를 불러 세웠다.


"사태께서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승이 사태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혜명 대사는 천성 사태를 큰소리로 불러 세운 출가제자를 나무라듯 말했다.


"어허, 진광아, 양양에 갔던 네가 언제 돌아왔느냐? 나의 직계제자인 네가 예의도 없이 손님으로 찾아온 사태께 큰소리로 말을 걸다니, 이 사부를 망신시킬 작정이냐? 쯧쯧......"


천성 사태를 불러 세운 자는 왕총아로부터 받은 익명의 서신을 혜명 대사에게 전해주기 위해 유청원과 함께 급히 소림으로 돌아온 진광이었다.


혜명 대사가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온 진광은 그야말로 뜻하지 않게 이곳에서 천성 사태를 보자 아미로 복귀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을 왕총아의 환심을 살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에 앞뒤 생각도 않고 큰소리로 부른 것이다.


발걸음을 멈춘 천성 사태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진광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해져 대뜸 물었다.


"젊은 스님께서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진광은 막상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 뇌리에 떠오른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소승은 소승의 사제와 함께 아미 제자인 왕낭자의 혼례식에 다녀오는 길이온데, 사태께서는 소식을 들으셨는지요."


천성 사태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왕낭자라니, 총아를 말하는 것이오? 총아가 누구와 혼례식을 올렸단 말입니까?"


"왕낭자의 신랑되시는 분은 양양 지현이신 제대협입니다."


"스님과 스님의 사제는 총아의 초대를 받고 혼례식에 다녀온 것이오?"


천성 사태가 의심쩍은 눈초리로 묻는 말에 진광은 자칫 실언이라도 할까봐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소승과 제 사제는 양양 지현이신 제대협의 제자 요포졸과 친분이 있어 제대협의 혼례식에 초대받았는데, 제대협의 신부가 바로 왕낭자여서 알게 된 것입니다."


천성 사태가 별안간 탄식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아! 총아가 썩어빠진 이 나라 조정 관리와 혼인하다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로구나!"


반청복명의 대의를 품은 천성 사태로서는 자신의 제자였던 왕총아가 만주족 조정의 관리와 혼인한 것이 못마땅할 수 밖에 없었다.


탄식섞인 한숨을 내쉰 천성 사태가 자책하듯 중얼거렸다.


"이 모든 것이 사부가 제자를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천성 사태는 왕총아가 조정의 관리와 혼인한 것이 몹시 못마땅했지만, 이제와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생각에 진광에게 물었다.


"스님께서는 제대협이 어떤 사람인지 아시오?"


진광은 장소연을 비롯한 서천 백련교도들이 제대협이라 불렀던 제림의 얼굴과 이름만 알 뿐,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했지만 아는대로 대답했다.


"제대협의 존함은 제림으로, 소승도 제대협의 제자 요포졸과 친분이 있을 뿐입니다."


천성 사태가 묻는 말에 진광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어느새 이곳에 온 유청원이 나섰다.


"제자가 알기로는 제대협께서 비록 조정에 출사하셨지만, 어려운 처지에 있는 백성들을 위해 힘을 쓰시는 공명정대하신 분이라 들었습니다. 또한 왕낭자와 왕낭자의 모친이 만주족 건달패에게 백련교도라 모함을 당해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때도 제대협께서 나서시어 누명을 벗겨주신 것이 인연이 되어 왕낭자와 혼인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야말로 하늘이 내리신 인연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청원의 말이 끝나자 천성 사태가 괴로운 듯 탄식했다.


"아! 간악한 만주족 건달패들이 총아의 아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총아와 총아의 어미까지 백련교도로 모함해 쫓기는 신세로 만들었었단 말인가! 총아가 아미에서 출교당한 후 그와 같은 고초를 당할 줄이야!"


혜명 대사는 이제서야 천성 사태가 무엇으로 인해 번뇌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재능이 뛰어나고 예의바른 왕낭자가 아미에서 출교당했다니, 무림 선배로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구려......"


그러고는 천성 사태를 향해 말했다.


"옛부터 사제지간은 부자지간과 같다 하였으니, 사태께서 제자의 잘못을 너무 탓하지 마시기를 바라겠소."


혜명 대사는 천성 사태에게 왕총아를 용서하고 다시 제자로 받아들이라 권고하고 있었다.


천성 사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럴 작정이오."


"혜명 대사, 이 몸은 이만 떠나겠소. 스님과 시주도 잘들 계시오."


천성 사태는 혜명 대사, 진광, 유청원을 향해 차례로 작별인사를 한 후 자리를 떠나버렸다.


천성 사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혜명 대사가 온통 피로 얼룩진 진광의 도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도포가 온통 피투성이란 말이냐?"


진광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혜명 대사가 방장실을 가리키며 진광과 유청원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 모두 방장실로 따라오너라."


유청원의 도포에도 피가 군데군데 묻어 있어 진광과 유청원 모두 방장실로 따라오라 한 것이다.


혜명 대사는 처음부터 진광과 유청원의 도포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았지만, 손님인 천성 사태 앞에서 제자들을 힐책할 수 없어 천성 사태가 떠난 후 힐책할 생각이었다.


진광과 유청원이 혜명 대사를 따라 방장실에 들어서자마자 혜명 대사가 노여운 목소리로 힐책하기 시작했다.


"대체 너희들의 도포가 피로 얼룩진 이유가 무엇이냐? 어서 자초지종을 말해보거라."


혜명 대사가 재촉하자 자신이 대답하겠다는 뜻으로 유청원에게 살짝 눈짓한 진광은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 뇌리에 떠오른대로 꾸며 말했다.


"왕낭자의 혼례식이 끝나고 사제와 함께 소림으로 돌아오는 중에 백련교 무리들과 마주쳐 한바탕 혈전을 치른 것입니다."


깜짝 놀란 혜명 대사가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백련교 무리들이 아무 이유없이 너희들에게 먼저 싸움을 걸었단 말이냐?"


진광은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깨달았다.


혜명 대사의 추궁을 모면하려 자신이 꾸며댄 말로 인해 자칫 소림과 백련교가 정말로 싸움을 벌이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60 악지유
    작성일
    18.06.23 08:25
    No. 1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Lv.36 조정우
    작성일
    18.06.27 20:41
    No. 2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왕총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12 인질극 20.03.24 208 2 13쪽
111 탈출 20.03.15 127 0 13쪽
110 어서 나를 인질로 사로잡게! 20.03.14 131 0 13쪽
109 제림을 구하는 방법을 말해주겠네 20.03.06 130 0 13쪽
108 지금 화효공주를 납치해야하나? 20.03.01 140 0 13쪽
107 화효공주를 납치하자고요? 20.02.20 127 0 13쪽
106 왕부인, 자네에게 말하지 못한 게 있네... 20.02.10 136 0 14쪽
105 옹염 황자가 사부님을 배신한다면 큰일인데 20.02.05 130 1 14쪽
104 진공가향 무생노모 20.02.01 157 1 15쪽
103 왕부인이 백련교 이사부라고? 20.01.21 138 0 15쪽
102 배신자 20.01.15 151 0 11쪽
101 화효공주에게 약조한 화신 20.01.10 147 0 13쪽
100 화신을 탄핵하다 19.12.31 140 0 12쪽
99 화신의 시녀가 된 왕낭선 19.12.20 157 0 13쪽
98 화신의 부정축재 증거 19.12.04 145 1 13쪽
97 귀주 교수 왕낭선 19.10.19 175 0 12쪽
96 화신의 부정축재를 밝히기로 결심하다 19.08.21 170 0 13쪽
95 화신의 집에 머무르기로 결심한 왕총아 19.08.02 189 0 14쪽
94 화효공주와 함께 화신의 저택 안으로 들어간 왕총아 19.07.12 195 0 13쪽
93 왕총아에게 반한 옹염 19.07.02 217 0 13쪽
92 왕총아와 제림을 구명하기 위해 나서다 19.06.15 219 0 11쪽
91 왕총아의 아리따운 얼굴에 반한 화신 19.05.21 227 0 13쪽
90 왕총아 대신 총교수 대행이 된 요지부 19.04.13 183 2 13쪽
89 천성 사태의 서신을 읽은 혜명 대사 19.04.06 173 0 11쪽
88 신묘한 계책 19.03.26 183 0 11쪽
87 제림의 뜻 19.03.11 188 0 13쪽
86 왕총아의 어머니 서씨를 방면한 화신 19.03.04 211 0 13쪽
85 총교수 대행의 자리에 오른 왕총아 19.02.21 211 0 13쪽
84 서천덕의 속셈 19.02.13 211 0 11쪽
83 요지부와 마주치다 19.02.03 187 0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