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타고?
골을 넣자 기신은 현기철을 출전시키고 박정현을 내렸다. 박정현은 이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미끼였다. 이탈리아 수비수 사이에서 박정현이 제공권을 장악할 것을 기신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수고했어. 푹 쉬고 다음 경기에 골 넣자."
교체된 박정현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기신과 격한 포옹을 나누고 한국 관객들에게도 인사를 했다.
"기 감독이 또 우리를 놀라게 하네요. 전반전 골 하나 넣고 바로 공격수를 교체했습니다. 최 해설위원께서는 어떻게 보시나요?"
"사실 박정현 선수를 선발로 출전시킨 것부터 의아했습니다. 이탈리아 수비수들은 키도 크고 몸싸움도 강합니다. 박정현 선수가 헤딩을 잘 하지만 드리블이나 슈팅은 평범하죠. 거기에 박정현 선수는 수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지금 교체로 보면, 박정현 선수는 미리 자신이 교체될 것을 알았습니다. 아마 방금 시도한 공격이 실패했다고 해도 박정현 선수는 교체되었을 겁니다. 지금 현기철 선수가 공격수를 맡으면서 비로소 기신 감독의 전술이 시작되는 것이죠."
"그럴듯합니다만,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군요. 월드컵 본선 첫 경기에서 선수 한 명을 미끼용으로 사용하고 전반전에 교체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더 좋은 해석이 없습니다.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아마 이후 경기 상황에 따른 교체도 미리 정해져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작전은 차범수 선수가 발동했습니다. 딱 한 번만 쓸 수 있는 작전이고 그 버튼은 차범수 선수가 가지고 있었죠. 차범수 선수가 정말 적절한 타이밍에 버튼을 누른 것 같습니다."
만화 같은 이야기다. 예선전 주전 공격수를 30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미끼로 사용했다. 단 한 번의 공격 전술을 위해서. 그리고 공격에 성공하자 곧바로 교체해서 공격 전술을 바꾼다. 차범수는 상대의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해서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되었을 때 작전을 지시했다.
"기 감독과 코치진이 열심히 준비한 작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느낌이긴 한데 다음 경기 포르투갈을 상대로 한 작전도 미리 짜왔을 것 같습니다."
아틀레티코에 정식으로 이적한 현기철은 주전은 아니지만 주요 로테이션 선수다. 교체 출전까지 합치면 일 년에 40경기 정도는 출전한다. 시간만 따지면 많은 편이 아니지만 다양한 팀을 만나며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아틀레티코 공격수의 기본 소양은 압박이다. 차범수도 수비 라인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올렸다. 1선과 2선 공격수와 미드필더 그리고 풀백이 중앙선 근처로 압축되어 이탈리아의 공격 흐름을 끊어 먹었다.
공민훈과 김시웅 그리고 길서준은 빠른 편이다. 거기에 차범수의 적절한 위치 선정으로 한국팀의 수비는 쉽게 파탄을 드러내지 않았다. 침투 패스가 너무 깊으면 황동근이 걷어냈다. 차범수는 간간이 박동춘의 수비 위치를 조정해주기만 하고 다른 선수의 수비에 크게 간여하지 않았다.
전반전이 끝나고 이탈리아 선수들은 뭔가 뜻대로 되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반면 한국팀은 사전에 예측했던 최상의 시나리오로 경기가 흘렀다. 양 팀의 분위기는 하늘과 땅, 천당과 지옥의 차이다.
"전반전은 우리가 예상했던 최상의 시나리오로 흘렀다. 열심히 연기해준 박정현 배우님에게 박수."
선수들은 열심히 손뼉을 쳤다. 캐나다에서 친선 경기 한 번도 하지 않고 체력 훈련과 전술 훈련만 했다. 공을 만지기 시작한 것은 일주일 전이다. 다들 자신감이 없었는데 지난 월드컵 4강인 이탈리아와 만나서 우세한 경기를 펼치니 긴장이 풀어졌다.
"후반전 작전은 우리 부주장 길서준이 한 번 설명해 보도록."
"두 윙백이 중앙으로 가고 두 풀백이 윙백으로 위치를 올립니다. 공이 양측으로 갔을 때 빠른 크로스로 이탈리아 수비수 사이의 틈을 노립니다. 중앙에 갔을 때에는 패스워크와 침투 패스를 공격을 해결합니다. 다만 항상 수비를 염두에 둡니다."
"한가지 빼먹은 게 있다. 후반전 시작하고 첫 공격 상황에서 부주장 말대로 진형을 조정한 후 빠른 습격을 한다. 침투는 황희와 현기철, 패스는 차범수 혹은 유재범이 찌른다. 공민훈과 한윤이 양측에서 좀 부산을 떨어 엄호하도록."
유재범은 무척 모순된 심정이다. 후반전 골 하나 더 넣으면 유재범이 교체된다. 그런데 자신을 교체할 침투 패스를 본인이 찔러야 한다. 미리 숙지한 전술이고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지만 갈등은 피할 수 없다.
후반전 이탈리아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한국팀은 전반전과 같은 진형을 유지하며 수비에 집중했다. 이탈리아의 코너킥을 두 손으로 단단히 잡은 황동근은 급히 공격을 발동하지 않았다. 선수들은 빠르게 자기 위치로 향하며 진형을 변형했다.
김시웅이 뒤로 쳐지면서 스리백의 오른쪽 중앙수비수 위치로 갔다. 공민훈과 한윤은 위치를 올려 윙백으로 변했다. 황희와 최길수가 중앙으로 가면서 미드필더가 되었다.
황동근은 공을 김시웅에게 던졌다. 일대일의 약점은 경험이 쌓이면서 극복했는데 킥의 정확도가 떨어지는 문제는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 짧은 패스는 정확해서 괜찮은데 멀리 찰수록 정확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김시웅은 공을 공민훈에게 주었다. 공민훈은 다시 김시웅에게 넘기고 김시웅은 차범수에게 주었다. 차범수는 한윤에게 공을 돌렸다. 그렇게 공을 좌우로 번갈아 보내면서 천천히 진영을 끌어올렸다.
황희는 처음에 유재범보다 더 밑에 자리했다. 패스워크를 하며 둘이 위치를 슬며시 바꾸었다. 전반전에 공민훈과 한윤을 통한 공격을 주로 했기에 이탈리아는 중앙보다 측면의 수비에 더 집중했다.
양쪽에서 변죽을 울리며 시선을 끈 후 공은 차범수의 발밑으로 향했다. 차범수는 더 좋은 위치에 있는 유재범에게 패스했다. 유재범이 공을 잡는 순간 황희와 현기철이 침투를 시도했다.
경험이 풍부한 이탈리아 수비수는 곧바로 한국의 수작을 알아채고 패스 경로를 차단했다. 양측 수비수들은 한윤과 공민훈의 침투에도 대비했다. 차범수와 최길수에게도 수비수가 한 명씩 붙었다.
"그냥 슛해."
차범수의 말에 유재범은 도움닫기도 없이 제자리에서 순수한 다리 힘으로 슈팅했다. 이미 공격 태세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유재범의 패스가 빼앗기면 이탈리아의 반격에 당할 수도 있다.
축구는 공격 태세와 수비 태세, 공격에서 수비로 전환,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하는 네 부분으로 나뉜다. 공격 시 롤과 수비 시 롤이 다르기에 빠르게 자기 역할 소화에 들어가야 한다. 자신의 태세 전환은 빠르게 해야 하고, 상대의 태세 전환은 느리게 만들어야 한다.
침투 패스에 대비해 앞으로 조금 달려 나왔던 이탈리아 골키퍼가 급히 후퇴했다. 유재범의 슈팅은 빠르지 않지만 훌륭한 포물선을 그리며 칩슛의 형태로 골문을 위협했다. 뒷걸음질하던 골키퍼는 있는 힘껏 점프했다.
골키퍼는 불굴의 의지로 공을 건드리는 데 성공했지만 손가락 끝까지 힘이 전달되지 않아 후반전 시작한 지 3분도 안 된 시각에 실점했다. 골을 넣은 유재범의 표정은 미묘했다. 골을 넣어 즐거운데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표정. 인터넷에서는 혹시 뭐 마려운 거 아니냐는 말이 많았다.
기신은 바로 유재범을 교체했다. 채운이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했다. 패스는 부족하지만 쉼 없이 달리고 강한 수비를 하는 채운을 올려 중앙을 두껍게 하려는 목적이다. 황희와 최길수는 두 윙백의 수비를 많이 도와야 한다.
이탈리아는 수비선을 올려 공격을 강화하려 했으나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수비하면서 한 골을 넣는 것을 목표로 하는 팀이다. 끊임없는 공격으로 상대 수비를 무너뜨리는 식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공격을 신중하게 하는 타입이다.
차범수의 지휘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한국팀의 수비를 허물려면 끊임없이 공격해야 한다. 서로 협력 수비를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강하게 몰아쳐야 한다. 개인 능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한국팀의 수비를 찢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차범수와 김시웅의 훌륭한 협력 수비에 힘입어 네 명의 수비수는 훌륭하게 수비를 해냈다. 단순 수비 능력만 따지면 길서준을 제외한 남은 셋은 부족한 편이다. 황희와 최길수의 수비 가담, 김시웅의 효과적인 수비 지원, 차범수의 나무랄 데 없는 지휘로 이탈리아의 묵직한 공세를 버텨냈다.
후반 75분, 황희를 내리고 배성국을 올렸다. 황희보다 수비를 더 잘하는 배성국을 올려 수비를 강화했다. 반격은 급하게 하지 않고 라인을 천천히 끌어올리며 안정을 추구했다.
한 조에 3팀이기에 골 득실도 중요하다. 경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자 이탈리아는 수비에 더 신경 쓰기 시작했다.
"후반전에 한국팀은 수비적인 태세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유럽 강팀에 부럽지 않은 훌륭한 경기를 했습니다. 대부분 시간 수비를 하는데 전혀 걱정이 되지 않네요."
"예선전에서 한국팀은 공격으로 수비를 대신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네가 하나 넣으면 나는 세 개 넣겠다 이런 기세였거든요. 그래서 솔직히 많이 걱정했습니다. 본선은 예선과 레벨이 다르니깐요. 그런데 한국팀은 우리에게 세계 수준의 강팀이나 보여줄 수 있는 안정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 감독과 코치진이 많이 고민한 흔적이 보입니다. 그리고 선수들도 미리 자신의 교체를 알고 있는 느낌입니다. 즉 이번 경기는 한국팀 시나리오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팀 공격이 너무 단조로운 거 아닌가요?"
"굳이 모든 공격 수단을 지금 보여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5일 뒤 다음 경기에서 포르투갈에 사용해야죠. 기 감독이 진짜 결승전까지 7경기 시나리오를 미리 써놓은 느낌입니다. 정말 든든하네요."
"바둑에서 모든 경우를 계산한다는 알파고처럼 이번 경기의 모든 가능성을 계산하고 대응을 준비해 온 모습입니다. 굳이 이름을 달자면 베타고?"
"제가 이번 경기를 무승부로 예측했습니다. 사실 그것도 한국팀에 후한 평가였죠. 다음 경기에서 포르투갈을 이겨 조 2위를 달성하는 걸 최상의 시나리오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국팀이 제 예상을 완전히 박살 냈습니다."
"최 해설위원께서 이름을 문어에서 오징어로 바꾸길 원하는 네티즌이 많네요."
"김승리 씨는 언제 네티즌이 되셨나요?"
결과가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어 두 해설도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다.
"사실 기 감독이 우승을 자주 입에 담을 때 저는 심리적인 효과를 노린 전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경기를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지만 말입니다."
"자세히 말씀해주시죠."
"이번 월드컵은 조 추첨에 따라 8강까지 쉽게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 대비해 미리 예방주사를 놓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없이 8강까지 간 것과 미리 우승을 염두에 두고 8강에 갔을 때 받아들이는 태도가 확연히 다르거든요. 그런데 오늘 경기를 보니 기 감독은 진심인 것 같네요."
많은 사람이 기신이 우승을 자주 언급한 건 선수들의 심리적 압박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어그로를 기신이 다 끌었기에 대표팀이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면 모든 포화가 기신에게 집중된다. 선수들은 마음 편하게 경기할 수 있다.
기신은 늘 언론과 선수들에게 우승이 목표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예상은 절반이 맞았다. 기신은 결승을 앞두고 선수들이 마음의 준비가 부족할까 걱정되어 자주 언급했다. 틀린 절반은 기신이 진심으로 우승을 원한다는 것이다.
- 작가의말
문체를 바꾸려다가 이번 글은 이대로 쓰기로 했습니다. 갑자기 글 쓰는 사람이 바뀐 게 아닌지 오해를 할까 두렵네요. 많은 글의 문체를 봤고 새로운 문체를 결정했습니다. 일단 다음 글에서 시도해 볼 작정입니다. 오늘 두 편으로 마칩니다.
그리고 차범수가 경기장에서 반말하는 거, 축구할 때는 반말해도 됩니다. 급한 상황에서 존댓말을 강요하는 건 아마추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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