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 보내는 경고
전반 40분에 왼쪽에서 코너킥을 얻었다. 황희가 찬 코너킥은 포르투갈 수비수가 걷어냈다. 차범수가 아크 지역에 자리하고 김시웅은 차범수보다 더 뒤에 자리했다. 공을 잡은 차범수는 곧바로 김시웅에게 패스했다.
김시웅은 공을 왼쪽으로 보냈다. 황희가 공을 잡고 크로스를 올렸는데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황희가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은 것이다.
"성국아, 몸 풀어. 바로 교체할 거야."
벤치에 앉아있던 배성국이 빠르게 몸을 풀었다.
"성국아, 코너킥 차고 나서 빠르게 뒤로 달려야 한다. 정신줄 놓지 마."
벤치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황희는 전반전이 거의 끝나가는 무렵이라 집중력이 살짝 떨어졌다. 그래서 코너킥을 찬 후 빠르게 뒤로 달리지 않았다. 김시웅의 패스를 받을 때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었다.
전반전이 몇 분 남지 않은 상황에서의 교체는 기신과 한국팀 벤치를 제외하고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황희도 영문을 모르고 웃는 얼굴로 교체되었다. 벤치에서 자신이 교체된 이유를 알게 된 황희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감독님, 죄송합니다. 모두에게 미안합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황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라커룸의 방음이 잘되지 않았다면 밖에까지 들렸을 것이다.
"세 골로 앞서는 경기고 전반전이 거의 끝나는 시점이라 집중력이 풀리는 건 이해 해. 그런데 이걸 지켜본 다른 팀들도 이해해줄까?"
기신의 어조는 평온했다. 딱히 화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를 지켜보는 다른 팀들도 그저 이해하고 넘어갈까? 아니면 이쪽이 집중력이 부족하니 공격을 전부 이쪽으로 집중하자 이렇게 생각할까?"
기신의 목소리가 커졌다. 화가 나기보다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 경기에 다들 끝까지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부족한 모습을 보이면 토너먼트에서 만나는 상대의 집중 공격을 받을 것이다. 첫 경기야 수비가 강한 이탈리아를 만나 부족한 척 연기로 시작했지만 토너먼트는 다르다."
토너먼트부터는 허세로라도 강한 척이 필요하다. 부족한 모습을 보여 상대의 방심을 유도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뒤가 없는 경기에 방심하는 팀은 연기할 필요 없이 실력으로도 이길 수 있다. 이번 경기에 최선을 다해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3라운드 경기에서 스페인이 한국을 상대로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공격이나 수비에서 부족한 모습을 보이면 스페인이 다음 경기에서 조 2위를 할 수도 있다. 1시드 팀은 마지막 경기에서 자기 순위를 선택할 기회가 있다. 오늘 우리는 포르투갈만 상대하는 게 아니다. 스페인에 우리를 선택하지 말라고 강하게 어필해야 한다."
기신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감독은 선수들에게 항상 확신을 실어 말해야 한다. 그래야 선수들이 감독의 말을 믿고 따른다.
"오늘 후반전, 스페인에 제대로 된 경고를 보내기 바란다. 우리 수비가 얼마나 단단한지, 우리 공격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제대로 보여주고 오기 바란다. 황희는 후반전에 누가 집중 풀리는 모습이 보이면 크게 소리를 질러 일깨워주는 임무를 맡긴다."
포르투갈은 심기일전해서 후반전에 형세를 바꾸려는 계획을 세웠다. 전반전부터 수비적인 태세를 버리고 공격 일변도로 나가야 했는데 갑자기 전술이 바뀌면 허점이 생긴다. 그래서 전반전이 끝나고 15분 동안 새로운 전술을 숙지하는 시간을 가졌다.
후반전이 시작하기 전에 포르투갈 선수들은 자신감이 있었다. 새로운 공격 전술대로 하면 쉽게 득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뚜껑을 열자 기대와 전혀 다른 결과를 확인했다.
한국팀은 공격할 때 빠르게 밀고 올라갔다. 이는 포르투갈 공격수들이 빠르게 수비를 도우러 돌아가게 압박했다. 박정현이 밑으로 내려와 미드필더처럼 움직이며 제공권을 장악했다.
현기철의 속도와 돌파 능력을 의식해 포르투갈은 박정현을 기준으로 수비 라인을 잡지 못했다. 그래서 박정현은 호랑이 없는 중원 지역에서 왕 노릇을 했다. 한국은 반격 시 박정현의 제공권을 통해 빠르게 밀고 올라갔다.
포르투갈의 수비 라인이 조금만 높게 올라와도 차범수가 정밀한 장거리 침투 패스를 찔렀다. 현기철과의 일대일에서 혼쭐이 난 골키퍼는 수비 라인을 높이 올리지 말라고 수비수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배성국과 최길수는 수비 상황에 미드필더 혹은 풀백처럼 움직이며 수비했다. 반격 기회가 되면 공민훈과 한윤까지 해서 빠르게 밀고 올라갔다. 전반전부터 수비에 지쳤던 포르투갈의 두 윙백은 한국팀의 템포를 따라가지 못했다.
공격과 수비의 전환은 빨랐지만 공격 자체는 성급하지 않았다. 훌륭한 기회가 아니면 슈팅을 자제하고 공을 돌렸다. 단순한 공격 능력이나 수비 능력뿐 아니라 경기를 운영하는 능력도 마음껏 뽐내고 있다. 스페인을 향해서 말이다.
1시드인 스페인은 2라운드에 경기가 없다. 그래서 스페인 감독은 한국과 포르투갈 경기를 현장에서 관람하고 있다. 첫 경기에 대승하여 골 득실도 넉넉해서 마지막 경기에서 32강 상대를 선택할 여유가 있다.
지금까지 지켜본 한국팀은 공격과 수비 집중력이 높고 공수의 전환이 빠른 팀이다. 개인 능력은 조금씩 부족함이 보이지만 하나로 단단히 뭉쳐있다. 후반전에는 빠른 템포의 경기를 보여주며 경기 운영의 능숙함도 자랑했다. 지난 경기에서 이탈리아와 느린 템포의 경기도 보여주었다.
최길수의 패스를 받은 공민훈이 골라인 방향으로 돌파에 성공했다. 수비수는 빠르게 달려 크로스를 방해하려 했다. 그러나 공민훈은 한 번 꺾은 후 왼발로 크로스를 올렸다. 왼발 크로스도 월드컵에서 처음 선보이는 것이다.
발에 살짝 빗맞아서 크로스라기보다 슈팅에 가까운 궤적을 그렸다. 크로스 타이밍이 절묘해 대부분 선수가 빠른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대부분이라고 한 것은 빠른 반응을 보인 선수가 있기 때문이다.
현기철은 아틀레티코에서 이런 유의 크로스를 많이 받아보았다. 그래서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헤딩을 생각했는데 공민훈의 공이 갑자기 밑으로 가라앉았다. 현기철은 임기응변으로 헤딩 대신 가슴을 선택했다.
현기철의 가슴에 맞은 공이 그대로 골이 되었다. 가슴을 오므리며 트래핑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을 주어 공을 튕겨냈다. 해트 트릭을 한 현기철은 한국 팬들이 모인 관객석 앞에 가서 세리머니를 했다.
포르투갈 감독은 끝내 자신의 잘못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조치를 취했다. 두 윙백을 내리고 수비를 잘하는 풀백을 올렸다. 수비가 안정적이어야 공격이 탄력을 받을 수 있다. 한국팀처럼 말이다.
탱크는 시즈모드를 해야 화력이 강하다. 한국에서는 초딩들도 안다. 첫 경기에서 한국팀이 수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바람에 너무 얕본 게 패착이다. 이탈리아가 너무 부담스러워 이번 경기에 크게 이기려고 했던 것도 문제다. 스페인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든 1위를 하려는 욕심을 부린 게 잘못이다.
한국은 최악의 상황으로 이탈리아와 무승부를 할 각오를 하고 수비적으로 첫 경기를 치렀다. 포르투갈은 한국이 이탈리아를 이기자 1위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한국을 2골 이상으로 이긴 후 다음 경기에서 무승부를 내면 조 1위가 가능하다. 스페인도 포르투갈보다 한국을 선택할 것이니 조 2위인 캐나다를 상대로 16강에 편하게 가려고 했다.
포르투갈이 두 윙백을 내리며 수비를 강화하자 기신은 박정현을 내리고 채운을 올렸다. 4-5-1로 진형을 바꾼 한국은 공격을 중앙으로 집중했다. 덕분에 포르투갈의 두 풀백이 자주 공격에 가담했지만, 교체된 두 윙백보다 공격력이 몹시 부족했다.
경기 80분에 한윤이 프리킥으로 다섯 번째 골을 넣었다. 월드컵에 와서 차범수는 프리킥을 잘 차지 않았다. 차범수의 프리킥 수치가 갑자기 사라져서 기신도 잠깐 당황했다. 블랙의 크로스 수치가 보이지 않고 공민훈의 슈팅 수치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차범수의 프리킥도 갑자기 안정성을 잃어버린 듯하다.
그래도 공 앞에 서서 시늉을 하면 골키퍼의 주의를 끌었다. 한윤의 왼발 프리킥은 가까운 포스트에 스치며 골이 되었다. 골대를 스치는 공이라 골키퍼가 전력으로 몸을 날리지 못했다.
골을 넣자 차범수를 내리고 유재범을 올렸다. 차범수가 교체되자 한국팀은 더 높은 집중력을 보였다. 차범수가 없는 상황에서 길서준이 수비를 지휘하고 유재범이 공격을 지휘했다.
창과 방패의 대결에서 방패가 창을 난도질했다. 선발진, 공격 전술, 수비 전술, 경기 운영, 선수 교체, 모든 면에서 한국이 우세한 경기다. 전문가들도 3시드의 한국팀에 대해 새로운 평가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조 1위를 차지한 한국은 L조의 2위가 거의 확실시 되는 캐나다와 32강에서 대결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팀이 포르투갈과 보여준 수준을 유지하면 8강까지 문제없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의 결론이다.
이미 조 1위가 확정된 한국은 미리 미국 LA로 이동했다. 캐나다에서 조별 경기를 진행한 팀의 32강 경기는 미국에서 진행한다. 32강에서 이기면 16강 경기는 멕시코에서 한다.
8강 경기는 멕시코에서 하고 4강 경기는 캐나다에서 한다. 결승전은 미국 뉴욕이다. 물론 한국팀의 경우다. 멕시코 혹은 미국에서 조별 경기를 치른 팀은 다른 일정을 가질 것이다.
3라운드에서 이탈리아가 포르투갈을 1:0으로 이겼다. 후반전 80분에 반격으로 이탈리아가 골을 넣었다. 무승부면 골 득실로 이탈리아가 2위를 차지하기에 포르투갈은 후반전부터 강하게 몰아쳤다. 이탈리아는 흔들리지 않는 수비를 자랑하며 반격으로 골 하나 넣어 승패를 정해버렸다.
스페인은 민주 콩고를 상대로 8:0의 대승을 했다. 조 2위를 하려면 민주 콩고에 2:0 이상의 점수로 져야 한다. 한국팀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고 보는 눈들도 있으니 얕은수를 쓰지 않고 민주 콩고를 상대로 대승했다.
LA는 한국 출신이 많아 홈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미리 이동한 한국팀은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코치들마저 태극기가 박힌 옷을 입고 나가면 웬만해서 다 공짜다. 그러나 선수단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차범수는 매일 두 시간의 프리킥 훈련을 했다. 그리고 한 시간의 기본기 훈련도 했다. 팀 훈련을 제외한 개인 훈련만 매일 세 시간씩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누구도 들떠만 있을 수 없었다.
김시웅은 기본기 훈련만 했다. 기본기 훈련을 통해 컨디션을 조절할 수 있다는 말에 많은 선수가 동참했다. 어린 시절에나 했던, 프로가 되면서 조금씩 소홀히 하던 기본기 훈련을 통해 컨디션뿐 아니라 마음가짐도 점차 달라졌다.
기신은 매일 버지니아와 한 시간 이상 통화했다. 버지니아는 작년에 둘째를 임신했다. 출산 예정일이 결승전 날짜와 비슷하다. 미안한 마음에 기신은 매일 통화로 버지니아의 스트레스를 풀어줬다.
버지니아 뒤에서 기적이 신기의 귀를 마구 잡아당기는 모습이 보였다. 골격은 어머니를 닮았는지 덩치가 또래보다 큰 기적이다. 신기는 아픔을 모르는 것처럼 기적이 아무리 괴롭혀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버지니아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기도 하지만 기신의 긴장을 풀어주기도 하는 통화다. 아닌 척 했지만 몹시 긴장한 기신이다. 그래서 황희의 작은 실수에 강하게 반응했다. 충동적인 결정이었는데 팀의 분위기가 오히려 더욱 좋아졌다. 차범수가 잘 다독인 덕분이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팀의 분위기를 더욱 끈끈하게 만들었다.
- 작가의말
두 편으로 마칩니다. 7경기 전부 쓸 생각이 없습니다. 일부 경기는 가볍게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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