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못하고 죽은 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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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매드
작품등록일 :
2018.01.23 11:44
최근연재일 :
2018.07.16 23:15
연재수 :
2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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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23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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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이혼 하는 날

DUMMY

은영은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커튼을 열자 밝은 햇살이 침실을 드리웠다.

맑고 화창한 봄날이었다.

이제 막 일어난 아침의 침실은 조금 춥게 느껴졌다.

아마 침대에 남편 지훈이 같이 있었다면 조금은 덜 추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혼자 일어나는 것에 이젠 익숙해졌다.

은영은 침구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꼼꼼히 모닝샤워를 했다.

토스트, 계란 후라이 그리고 우유로 아침식사를 했다.

단순하고 익숙한 일상이지만 오늘은 마치 종교의식이라도 진행하는 것처럼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조심스러운 몸가짐의 은영이었다.


오늘은 은영이 이혼하는 날이다!


지난 두달간의 숙려기간을 거쳐 드디어 오늘 서울가정법원에 가게 된다.

그리고, 판사 앞에서 5분만 서있다 나오면 은영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이혼을 하게 된다.

이미 남편 지훈과는 6개월 전부터 별거를 해 오고 있었다.


은영은 공을 들여 화장을 했다.

오늘만큼은 3년 전 결혼 당시와 똑같이 젊고 아름다운 모습이고 싶었다.

이혼하는 마당에 남편에게 절대 꿀리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콤팩트를 바르다 은영은 잠시 화장을 멈췄다.


‘어쩌다 우린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3년 전, 결혼할 무렵만 해도 우리는 서로 열렬히 사랑하지 않았었나?


그때 느꼈던 나의 감정, 그리고 남편의 감정은 진짜가 아니었던가?


나는 분명 진짜가 맞다고 은영은 생각했다.

남편의 감정도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모르겠다. 남편의 진심은 본인만이 알 것이다.


불과 3년 전에 느꼈던 감정들이 아주 먼 옛 기억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살며시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래선 안된다. 화장이 떠서는 안된다.

오늘의 메이크업은 완벽해야만 한다.

은영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크리넥스로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낸 다음 다시 콤팩트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화장을 마친 다음, 은영은 침대 위에 꺼내놓은 정장을 천천히 꼼꼼하게 차려 입었다.

스타킹도 발가락 부분이 예쁘게 자리잡도록 신고, 밴드 부분도 왼쪽과 오른쪽의 높이가 정확히 일치하도록 신경썼다.

스커트와 자켓을 입기 전에 찍찍이로 아주 작은 먼지도 꼼꼼히 제거했다.


외출준비를 모두 마쳤는데도 아직 출발 예정보다 한시간이나 더 남아 있었다.

은영은 안방을 휘 둘러보고 거실로 나가 집안을 모두 한바퀴 둘러보았다.


이제 조만간 이곳도 비워 주어야 한다.


은영과 지훈은 이혼 후 한달 이내에 공동재산을 모두 처분한 뒤 일정 비율로 나누기로 했다.

따라서 이 집에 머무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미 새로 들어갈 원룸은 계약을 해 둔 상태였다.

은영은 공동재산을 처분한 뒤 자기 몫을 받게 되면 우선 그 돈으로 여행을 갈 생각이다.

지난 3년동안 신혼여행 말고 여행이라고는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맘고생 한 자신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고 은영은 생각했다.


‘잃어버린 3년’


지난 3년동안의 결혼생활을 간단히 요약하면 그랬다.



은영은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놓고 커피 원두를 갈아 드립커피를 한잔 내려 마셨다.

불과 두어달 전까지만 해도 은영은 믹스커피를 마셨다.

뭐가 그리 바빴는지, 뭐가 그리 마음에 여유가 없었는지···

그 전까진 이렇게 원두를 갈고, 필터에 넣고 물을 내려 커피를 마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커피를 다 마시고 아이보리색 머그잔에 묻은 립스틱을 살짝 문질러 닦고 은영은 식탁에서 일어섰다.

현관에서 구두를 신고 마지막으로 집안을 휘 둘러 본다.

너무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서인지 사람이 살지 않는 모델 하우스같은 느낌이 들었다.

은영은 자동차 키를 집어들고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



지훈은 갑자기 울리는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어젯밤에도 늦게까지 일을 하다 잤기 때문에 수면이 부족해서 정신을 차리는데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오늘이 이혼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자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핸드폰을 집어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제길···늦었군.’


지훈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욕실로 가서 대충 세수와 양치질, 면도를 했다.

욕실 안의 빨래통에는 이미 빨랫감들이 꽉 차 빨래통 옆 욕실 바닥에까지 흘러넘쳐 있었다.


‘이따 법원에 갔다 와서는 세탁기도 좀 돌려야겠군.’



원룸에 따로 나와 살기 시작하면서 웬만하면 아침은 꼭 챙겨먹기로 마음 먹었지만, 오늘 아침은 도저히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거르기로 했다.


‘이혼하는 날, 법원에 가는데도 지각이라니···’


만년 지각인생이다.


이혼 마저도 성의없이 제 때 못맞춰 온다는 소릴 듣고 싶지는 않았는데···


지훈은 어제 출근할 때 입었던 양복을 입었다.

고르고 자시고 할 여유도 없었다. 거의 교복처럼 입고 다니는 양복이니까.

같은 양복에 매일 넥타이만 바꿔매고 다닌다. 오래 입어 팔 안쪽과 무릎 안쪽이 접힌 자국이 있고 바지주름도 날이 많이 풀려있는 상태였지만, 다림질이고 뭐고 할 시간이 없었다.


더구나 이혼하러 가는 마당에 누구에게 잘 보이랴 싶었다.

그나마 흰색 와이셔츠는 빨아둔 여분이 있어 새것으로 입을 수 있었다.

지훈은 서둘러 원룸을 나와 현관문을 닫았다.

‘삐리리~’하고 자동으로 번호키가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지훈은 구두코를 바닥에 탁탁 두드려 신으면서 동시에 손으로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야 지훈은 다소 마음의 여유를 얻었다.


이 안에서야 내가 서두르던 말던 엘리베이터의 속도대로 내려가니까···


그나마 기분 좋은 것은 오늘 하루 휴가를 냈다는 점이다.

인생에서 커다란 사건인 이혼을 하는 마당에 오전 반차만 내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하루 휴가를 냈던 것이다.


‘오후에는 서점이라도 가서 그동안 못 읽었던 책이나 몇권 사다 읽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지훈은 경보 선수라도 되는 것처럼 서둘러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항상 불운은 겹쳐서 일어나는 것일까?


가뜩이나 법원에 지각하게 생겼는데, 버스가 오질 않는다.

지훈은 인터넷으로 콜택시 번호를 알아내 택시를 불렀다.

조용한 아파트단지인 이곳에는 할일 없이 지나다니는 빈 택시는 없다.

몇번의 거절 끝에 지훈은 겨우 택시를 불러 뒷좌석에 앉은 후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택시 기사는 과묵한 성격인지 말이 없었고, 라디오에서는 교통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초동 법원 사거리에서 사고 소식입니다. 화물차와 승용차가 정면충돌했습니다. 화물차의 졸음운전으로 보이는데요, 사고여파로 현재 이 일대 지나기 어렵습니다. 운전자 여러분께서는 우회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길··· 아저씨, 거기 교통사고 났다는데 그럼 시간이 더 걸릴까요?”


“바로 법원 사거리에서 난 거이까네, 괜찮을 깁니더. 봐서 최대한 가까이 가서 내려 드리겠심더.”


“예.”


불운은 택시를 탄 것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더 남아 있었나보다.

지훈은 수능시험 날 길이 막혀서 한 정거장 전부터 뛰어갔던 일이 생각났다.

오늘도 아마 그 짝이 나려나 보다고 지훈은 생각했다.



지훈의 예상대로 한 블록 전부터 길이 막혀 있었다.

지훈은 택시에서 내려 뛰기 시작했다. 이미 10분이 늦은 상태였다.


이혼은 오늘 끝나야 한다, 다시 연기되거나 해서는 안된다.


그동안 이혼절차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 자체가 정신적으로 큰 스트레스였기 때문이다.

지훈은 뛰기 시작했다.

헐떡거리며 겨우 법원 사거리에 도착했다.

지하도로 내려가려다 지훈은 아까 교통방송에서 나온 사고현장을 보았다.

사거리 한가운데에서 난 대형 사고였다.

5톤트럭 화물차도 앞부분이 크게 부서졌고 흰색 승용차는 앞부분 절반 가량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파되어 있었다. 차가 완전히 부서졌으니 갓길로 옮길 수도 없고, 사고수습이 어려울 법도 했다.

여유만 있다면 사고현장을 좀 더 오래 구경하고 싶었지만, 지훈은 서둘러 지하도로 내려갔다.

결국 지훈이 가정법원에 도착한 것은 예정된 시간보다 30분이나 늦은 후였다.


지훈은 헐떡거리며 재판이 열리는 판사의 방으로 안내되어 갔다.

드라마에서 보는 큰 법정에서 하는 줄 알았더니 이혼조정 같은 건 판사 방에서 그냥 하는 모양이다.

그리 넓지 않은 방에는 깊숙이 창가 자리에 판사가 자기 책상에 앉아 있었고, 입구 쪽으로 소파가 가운데 탁자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놓여 있었다.



방에 들어간 지훈은 아연실색 할 수 밖에 없었다.


은영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늘 지각대장이니 그렇다치고 은영이 이렇게 늦을 리가 없었다.


판사는 “같이 안 온 거에요? 아, 이거 사람들이 둘 다 뭐 이래? 이래가지고 되겠어요?” 라며 짜증을 냈다.


옆에서 진행을 담당하는 직원이 말했다.


“10분 안에 배우자 분 안 오시면 연기에요.”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전화 해 보겠습니다.”


지훈은 오랜만에 은영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 보았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가 없사오니···’


이건 핸드폰을 꺼 놨을 때 나오는 메시지였다.


‘뭐야, 이거? 이혼 당일에 핸드폰도 꺼두고!’


자신이 늦은 건 어느새 잊어버리고 지훈도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기일은 연기되었다.

나중에 배우자와 합의하여 기일을 잡으라는 말을 뒤로 하고 지훈은 판사의 방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날짜를 잡으려면 이곳에 다시 와서 신청해야하고 절차도 다시 밟아야 하고 인지대도 새로 내야 하고··· 등등

온갖 짜증이 밀려왔다.

지훈은 은영에게 다시 전화하여 음성사서함에 메시지를 남겼다.


“이거 모하자는거야? 장난 하는거야? 먼저 이혼하자고 하더니, 겨우 합의 해 놓고 이제 와서 이혼하기 싫어졌어? 메시지 확인하는 대로 빨랑 전화해!”



터덜 터덜 법원을 나온 지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양복을 입고 나온 김에 오후에 그냥 출근해서 반차만 쓴 걸로 할까, 하다가 지훈은 맥이 빠져 그냥 원룸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사거리에 도착하자 다시 사고 현장이 나왔다. 사고현장은 웬만큼 수습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지훈은 이제 여유가 좀 있어 차근차근히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운전자들은 이미 앰블란스에 실려 간 것 같고, 차량도 견인되고 있었다. 흰색 승용차는 앞부분 절반 이상이 완파되어 형체를 알 수 없었고, 레카차는 차의 뒷부분을 어떻게든 걸어보려 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차의 뒷부분이 지훈의 눈에 들어왔다. 지훈은 별 생각 없이 번호판을 읽어 보았다.


‘XX거9140’


갑자기 눈이 커지면서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내 차다! 그렇다면?’


지훈은 순간적으로 사고가 난 사거리 한복판을 향해 뛰어갔다.


‘빠아앙!~~~’


갑자기 뛰어든 지훈을 치일 뻔 한 차가 급정거를 하고는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렸다.

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손을 들어 보인 후 사고현장으로 달려갔다.


“이 차에 타고 있던 운전자 지금 어디 있습니까?”


지훈은 사고 현장을 지휘하는 경찰에게 다급히 물었다.


“조금 전에 엠블란스에 실려서 병원에 갔어요. 운전자와는 어떻게 되시죠?”


“제 아내입니다. 어느 병원입니까?”


경찰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망설이다 “강남 성모병원으로 가 보세요.” 라고 말했다.


지훈은 급히 지나가던 빈 택시를 잡아 강남 성모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향해 가는 지훈의 머릿속에 앞부분이 완파된 흉칙한 차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발···, 제발···, 이런 식으로 헤어지진 말자, 제발···’


어느새 지훈의 눈에서 눈물이 철철 흘러 내리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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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못하고 죽은 귀신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9 [완결] 하늘나라로 18.07.16 286 3 17쪽
28 큐피드의 화살 +2 18.07.14 251 3 13쪽
27 현우 이야기 4 +2 18.02.28 400 10 13쪽
26 현우 이야기 3 +4 18.02.27 325 9 12쪽
25 현우 이야기 2 +2 18.02.24 386 6 12쪽
24 현우 이야기 1 +2 18.02.23 367 6 12쪽
23 지은도 알게 되다 18.02.22 392 9 12쪽
22 수목장 18.02.21 357 9 11쪽
21 은영의 능력 +2 18.02.20 558 10 12쪽
20 은영의 비밀 18.02.18 402 8 12쪽
19 이혼식 +2 18.02.17 501 8 12쪽
18 대화가 필요해 18.02.15 450 8 12쪽
17 선미 이야기 3 18.02.14 461 8 13쪽
16 선미 이야기 2 18.02.13 430 8 12쪽
15 선미 이야기 1 18.02.12 459 8 12쪽
14 친구에서 경쟁자로 18.02.09 477 8 12쪽
13 귀신과의 조우 3 18.02.06 481 9 12쪽
12 귀신과의 조우 2 18.02.05 467 8 11쪽
11 귀신과의 조우 1 18.02.05 500 8 11쪽
10 지훈의 아르바이트 18.02.04 502 9 12쪽
9 산 사람은 살아야 18.02.03 527 8 13쪽
8 작은 복수 18.02.02 520 8 12쪽
7 회상 : 다툼 18.02.01 514 6 12쪽
6 친구들을 사귀다 18.01.31 538 9 11쪽
5 홀로서기 18.01.26 614 10 12쪽
4 회상 : 첫 만남 18.01.25 574 5 12쪽
3 귀신이 되다 18.01.25 598 7 12쪽
2 장례식 18.01.24 697 9 12쪽
» 이혼 하는 날 18.01.23 939 1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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