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 : 다툼
“오빠, 또 변기 물 안내렸어요?”
“어, 미안. 내가 또 깜빡 했네?”
은영은 아침부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웃고 넘겼다. 하지만, 두번, 세번 지훈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자 은영은 슬슬 짜증이 났다.
은영은 지훈이 자꾸만 깜빡하는 이유가 자기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 말을 우습게 생각하니까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 버리는거야.’
이렇게 생각하자 은영은 지훈에게 주의를 줄 때마다 점차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지훈은 지훈대로 자꾸만 깜빡 잊어버리는 게 미안했다.
하지만, 지훈에게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
아침에 휴지 한번 쓰고 변기에 버릴 때마다 물을 내리기는 아까웠다. 그래서, 이것저것 일을 보고 나서 한번에 물을 내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가끔 깜빡 잊는 경우가 생겼다.
물이 아까워서 그랬다고 말 해 봤자 변명같이 들릴 것 같아 지훈은 매번 그냥 잊어서 미안하다고만 말했다.
하지만, 몇번 안 한 실수를 가지고 은영이 점점 날카롭게 따지듯 지적해 오자 지훈도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날 큰 아이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냐? 난 당신 남편이라구, 남편.’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지훈은 은영이 자기에게 하는 모든 잔소리들이 듣기 싫어졌다.
지훈은 은영의 꾸준한 잔소리에 힘입어 점차 지적당하지 않도록 적응해갔다. 하지만, 그에 비례해서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점점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집에서 만큼은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냐?’
하지만, 실수하지 않으려면 집에서도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고, 눈치를 봐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자존심 상하는 잔소리가 쏟아졌으니까.
신혼 초의 밀월기간은 어느 새 사라지고 두 사람은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이런 상태라면 언제 부부싸움이 일어나도 당연할 듯한 분위기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시작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오빠, 쓰레기 안 버려 줄거에요?”
“피곤해. 내일 버려줄게.”
“그 말 한 지 벌써 3일째란 말예요. 냄새 나서 더 이상 다용도실에 못 둬요.”
“아, 안돼~~ 오늘은 피곤해서 꼼짝도 못하겠어.”
은영은 지훈의 퇴근 후에 쓰레기를 버려 달라고 부탁했다.
은영 입장에서는 벌써 사흘째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훈은 퇴근해서 저녁을 먹고 나서는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남들 다 다니는 회사 다니면서 뭐 그렇게 티를 내요? 자기 약하다고 자랑하는 건가?”
“뭐라고? 당신 말 꼭 그렇게 해야겠어? 그러는 당신은 하루종일 집에서 뭐하고 있었어? 당신이 쓰레기 좀 버리면 안돼? 당신 손에는 금테 둘렀어?”
“하루종일 난 뭐 놀기만 한 줄 알아요? 집안 일이라는 게 해도 해도 끝이 없다고요. 티도 안나고.”
“하긴 뭘 해. 내 방 쓰레기통은 항상 꽉 차 있던데. 청소도 내 방은 해 주지도 않으면서.”
“오빠가 방을 너무 험하게 쓰니까 그런거에요. 나는 규칙적으로 청소 하고 있다고요.”
지훈과 은영은 한동안 말다툼을 하다 결국 서로를 외면해 버렸다.
그날 밤, 은영은 침대에서, 지훈은 소파에서 따로 잠을 잤다.
다음날도 말다툼은 계속되었다.
“나 아침 안 해줄 거야?”
지훈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늘 자기가 차려 먹고 갔으면서 오늘따라 왜 그래요?”
“그건 당신이 자고 있을 때 얘기지. 지금처럼 깨어 있으면 남편 아침 정도는 챙겨줘야지.”
“난 일일이 아침까지 못 챙겨 줘요. 그건 오빠 어머니한테 가서나 해 달라고 해요.”
“뭐야? 그걸 말이라고 해?”
전날부터 싸우기 시작한 두 사람은 지훈의 출근을 앞두고 아침에 다시 한번 충돌했다.
지훈은 은영이 난데없이 어머니까지 끌어들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치 자신이 마마보이 취급을 당한 것 같아 인격적으로 모욕감마저 느꼈다.
은영은 아침을 늘 혼자 차려먹고 가던 지훈이었는데, 어제부터 화가 난 김에 자기를 자극하고 괴롭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언제부턴가 대화를 하건, 말다툼을 하건 항상 높다란 벽이 드리워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코 그 벽을 넘을 수 없는, 결코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되풀이 되었다.
그리고, 그 벽은 점점 더 확고하고 높아져만 갔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냉전은 계속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투명인간 보듯 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냈다.
지훈이 아침에 출근할 때는 은영은 잠에서 깨도 침실에서 나오지 않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귀로는 지훈이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고, 아침을 차려 먹고, 옷을 입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관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지막으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면 그제서야 은영은 침실 밖으로 나와 지훈이 다녀간 흔적을 살피곤 했다.
개수대에 놓여져있는 접시 한개와 컵 하나. 그리고 식탁 위에 남은 빵 부스러기.
저녁 때 지훈이 퇴근을 하고 와서도 은영은 말없이 TV만 보고 있었다.
지훈은 아침 때와 마찬가지로 혼자서 저녁을 차려 먹었고, 식탁을 치우고는 이내 건넌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지훈이 건넌방으로 들어가고 나면 그제서야 은영은 거실에서 작은 한숨을 토해내곤 했다.
지훈이 버려주지 않아 다용도실에는 쓰레기가 쌓여갔다.
은영이 빨래를 해 주지 않아 빨래바구니에는 세탁물이 쌓여갔다.
그리고 쓰레기와 세탁물처럼 두 사람의 마음에도 앙금이 쌓여갔다.
이런 대화없는 냉전이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이어졌다.
그리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냉전에 대한 명확한 대화나 화해 없이 휴전이 이루어졌다.
휴전은 언제든 작은 불씨만 있으면 다시 실전으로 폭발했다.
이런 싸이클이 한달, 두달 이어졌고 그것들이 쌓여 1년, 2년이 되었다.
“우리 이혼해요!”
이혼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은영이었다.
하지만, 누가 이야기를 꺼내느냐의 문제였지 두 사람의 마음 속에는 이미 이 단어가 자리잡은지 오래였다.
“그래. 이혼 해.”
지훈도 기다렸다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결혼 2주년을 막 지난 시점이었다.
두 사람의 입에서 ‘이혼’이라는 말이 나오자 분위기는 금새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선 것 같은 느낌,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 같은 느낌을 두 사람은 느꼈다.
부부싸움에서 이혼을 이야기하는 것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부부가 아무리 치고 받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다투더라도 보통의 경우에는 결국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끝난다.
즉, 결투는 링 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혼을 이야기하는 순간, 아주 사소한 말다툼이라도 그것은 무제한 데쓰매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첫번째 이혼 해프닝은 그저 해프닝으로 끝이 났고, 며칠 후 늘 그랫듯이 흐지부지 휴전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확실히 ‘이혼’이 언급된 이후부터 양상은 달라졌다.
이전까지의 부부싸움이 글러브를 끼고 헤드기어를 착용하고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고 해 온 것이라면, 이후의 부부싸움은 맨손으로 하는 피투성이의 대결이 되었다.
지훈은 점점 집에 늦게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다.
은영은 그런 지훈이 점차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늦을 때마다 지훈은 야근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어느날, 은영은 저녁 무렵 지훈의 회사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회사에는 아무도 없었고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날은 지훈이 야근이라며 늦는다고 문자를 보낸 날이었다.
설마 은영이 회사에다 확인전화까지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지훈은 10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회사에서 야근 했어.”
“이 시간까지 야근을 했단 말예요?”
“응.”
“거짓말하지 말아요. 회사에 전화해 봤어. 아무도 안받던데?”
“회의실에 모여서 작업했어.”
“차라리 회식이라고 둘러대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믿어줬을텐데.”
“정말이라니까.”
“못 믿겠어요. 거짓말.”
“강요하진 않을 게. 믿고 말고는 당신 자유야. 나 이제 씻고 잘게.”
지훈은 조용히 말하고는 은영을 지나쳐 갔다.
은영은 결코 지훈을 믿을 수 없었다. 지훈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은영은 좀 더 확실하게 알리바이를 깰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채 터뜨린 것을 후회했다.
혼자 침실에 남은 은영의 눈에서 조용히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쩌다 자신이 이런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는지, 자신이 뭘 잘못 한건지 묻고 싶었다.
은영은 자기 자신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훈이 정말 오늘 야근을 한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혹시라도 다른 여자를 만나고 온 것이라면 그 만남이 그저 커피 한잔을 같이 한 것일지라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 때는 넘어 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다음날 은영은 지훈이 출근하고 나자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무작정 지훈의 사무실 앞으로 갔다. 그리고는 사무실 건물 입구가 잘 보이는 맞은편 커피숍 2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해서 뭔가 증거를 잡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도 그냥 이대로 집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어서 그냥 무작정 나온 것이다.
달랑 커피 한잔으로 은영은 오전 내내 건물 입구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지훈이 지금 사무실에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오전 내내 자리를 지키다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건가’ 싶어 일어서려는데 12시 10분쯤 전에 고대하던 남편의 얼굴이 건물 입구에 나타났다!
지훈은 직원들 몇명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나와서는 뒷골목으로 사라졌다.
‘하긴 낮에는 회사에서 일을 하겠지. 현장을 잡으려면 저녁 퇴근 무렵에 나왔어야 하는건데···’
아무런 계획도 없이 나온 자신이 한심해졌다.
30분쯤 기다리다 은영은 오늘은 포기하고 그냥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은영이 주섬주섬 짐을 챙겨 커피숍을 나오는 순간,
식사를 마친 남편과 동료들이 커피숍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당신···, 여기서 뭐해?”
“친구···, 만났어요.”
은영은 얼굴이 빨개져서 변명을 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어떻게 그 많고 많은 커피숍 중에 딱 여기서 마주칠 수 있는지···
지훈은 동료들이 곁에 있어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은영을 보내 주었다.
은영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퇴근 후 집에 오자마자 지훈은 다짜고짜 은영을 다그쳤다.
“당신 솔직히 말해. 오늘 나 미행한거야?”
“아니에요. 지은이 만나러 나간 거였다니까요.”
지훈은 그자리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열어 지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영의 절친인 지은의 전화번호 정도는 지훈의 핸드폰에 저장하고 있었다.
“지은씨, 접니다.”
“네. 잘 지내셨어요?”
“네. 오늘 혹시 은영이 만나셨나요?”
“네? 네에···”
“언제 어디서 만나셨죠?”
“···, 점심때 국기원 사거리 스타커피에서요.”
“네에···”
지훈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영의 알리바이는 입증되었다. 하지만, 은영이 미리 절친인 지은에게 전화해서 손을 써 놓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의심은 또다른 의심을 낳을 뿐이다.
서로가 상대방을 의심하고 있다는 건 결혼생활의 끝을 의미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신뢰니까.
“날 시험할 생각이라면 차라리 그냥 조용히 이혼 해.”
지훈은 차분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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