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못하고 죽은 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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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매드
작품등록일 :
2018.01.23 11:44
최근연재일 :
2018.07.16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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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2.04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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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지훈의 아르바이트

DUMMY

아직도 우편함에는 수신인에 ‘최은영’이라고 아내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우편물들이 오고 있었다.

지훈은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서 오는 뻔한 광고물이라도 아내의 이름이 찍힌 우편물들은 함부로 버릴 수가 없었다. 지훈은 그런 우편물이 오면 반송함에 넣지 않고 일단 모두 집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은영의 이름으로 된 우편물을 뜯는 순간에는 마치 은영이 아직 살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하지만 우편물을 다 뜯고 나면 그런 환상은 사라져 버렸고, 지훈은 쓸모없는 DM들을 조심스럽게 종량제봉투에 넣어 버렸다.

그것은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을 켜서 잠깐동안 즐거운 환상을 맛보는 것과도 같았다. 성냥은 금새 꺼졌고 성냥이 꺼지고 난 뒤에는 어둠과 추위만이 남아 있었다.


은영의 이름으로 된 각종 고지서나 가입자 명의를 지훈 앞으로 돌려놓는 일은 무척이나 하기 싫은 일이었다.

일 자체의 귀찮음도 있었지만, 아내의 기억을 억지로 밀어내는 것 같이 느껴져서 웬지 내키지 않았다.

지훈은 법적으로 꼭 바꿔야 하는 것들만 바꾸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었다.

아마 한동안은 ‘최은영’이라는 이름을 우편함에서 계속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보세요?”

“김지훈씨? 여기 기획나라입니다.”

“아, 네.”

“한 건 새로 들어왔는데, 하시겠습니까?”

“메일로 자료 보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해 주시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지훈은 사무실에서 휴대폰으로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날 저녁, 지훈은 회사가 끝나자 밖에서 저녁을 먹은 다음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갔다.

‘어라? 곧바로 집에 가지 않고 어디로 가는거지? 혹시 나 몰래 만나는 여자라도 있는 건가?’ 은영은 궁금해 하면서 지훈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어느 건물안 사무실로 들어간 지훈은 사무실 입구에 있는 사물함에서 노트북을 꺼내서는 빈 자리를 골라 앉았다. 지훈 주변의 몇명이 고개를 들어 지훈과 간단한 눈인사를 나누었지만, 그 이상의 친분은 없는지 그들은 금새 자기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훈도 곧이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노트북을 켜서는 작업을 시작했다.

지훈은 파워포인트로 기획서를 쓰기 시작했다.


‘아직 회사 일이 남았나? 근데 왜 사무실에서 안 하고 이렇게 다른 사무실에 와서 몰래 하는거지? 혹시 지훈씨는 회사원을 가장한 안기부 직원···? 그럼 지금 그가 하는 일은 댓글 공작?!’


여자를 만나는 건 아니어서 일단 한 숨 놨지만, 지훈이 몰래 무언가 일을 하는 모습을 처음 본 은영은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훈은 10시 쯤까지 작업을 하더니 노트북을 다시 사물함에 넣고는 남은 사람들에게 간단한 눈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로 지훈은 주중에 매일 똑같은 생활을 반복했다.

그의 생활은 은영이 살아있었고, 두 사람이 별거하기 전의 상황과 같았다.

지훈이 늘 늦게 들어오면서 피곤해 하더니 이렇게 퇴근 후에 다른 일을 하기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지훈은 한번도 이 일에 대해서 은영에게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은영은 2년쯤 전의 일을 다시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오빠, 요즘 왜 이렇게 매일 늦는거에요?”

“요즘 일이 좀 많아졌어···”

“오빠, 혹시···?”

“···”

지훈은 무슨 말이냐는 듯 물끄러미 은영을 바라 보았다. 은영은 차마 더 말을 하지 못하고 그냥 갑갑하고 실망스런 눈빛으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지금 무슨 생각 하는거냐고 화라도 냈으면, 야단이라도 쳐 주었으면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은영의 의심을 풀어주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지훈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마치 구차한 변명은 더 이상 안 하겠으니 네가 나의 말을 믿을테면 믿고 의심할 거면 계속 의심을 하라는 듯한 태도였다.

지훈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은영은 더욱 화가 났다. 결혼 1년 만에 벌써 이렇게 애정이 식을 수 있나, 하고 은영은 실망했다.

지훈은 지훈대로 피곤해서 들어온 자신을 마치 취조라도 하듯 하는 은영의 태도에 짜증이 났다.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면 좋으련만.


‘은영에게 사실대로 말할까?’ 하고 생각했지만, 지훈은 조금 더 있다가 말하기로 했다.




파워포인트 기획안이 완성되자 지훈은 메일로 어디론가 보냈고 그 후에도 몇번인가 서로 메일로 주고 받으면서 수정을 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지훈은 전화를 한통 받았다.

“기획나라입니다. 이번 건 완료되었고, 페이는 통장으로 입금해 드렸습니다. 확인해 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지훈은 PC로 은행사이트에 로그인 하더니 입금내역을 확인했다.


‘헉, 6백7십만원?’ 모니터를 함께 보고 있던 은영은 깜짝 놀랐다.


지훈의 통장에는 방금 전에 들어온 30만원을 포함해서 잔고로 670만원이 찍혀 있었다.


‘이 남자 이거 나 몰래 비상금 주머니 따로 만들고 있었네? 기가 막혀.’


은영이 살아 있을 동안 지훈은 월급은 꼬박꼬박 은영의 통장으로 이체해 주곤 했다. 연차수당이라든가, 연말정산 환급금이라든가 암튼 돈이 생기면 항상 은영에게로 입금해 주었었다.

그러나, 이 아르바이트에서 받은 돈만은 몰래 자기 통장에서 관리해 왔던 모양이다.

지훈은 따로 돈을 모으기 위해서 은영에게 매일 늦게 퇴근하는 이유를 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돈으로 뭘 하려고 했던 걸까? 혹시 바람이라도 피우려고 돈을 모으고 있었던 거 아니야? 아니면 여자 나오는 비싼 술집이라도 가려고 했던 걸까? 아니면 나랑 이혼하려고 위자료를 모으고 있었던 건가?’


지훈의 알리바이가 입증되자 은영은 이번에는 자금의 용처가 의심스러웠다.


‘나도 따로 통장 하나 만들어서 돈 좀 모을걸 그랬어.’

‘이 남자 이것 말고도 비밀이 더 있는거 아니야?’


은영은 자기는 모르게 지훈이 뭔가를 하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화가 났다. 부부라면 서로에게 정직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숨기는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하고 은영은 생각했다.

섭섭했다.


‘이런 작은 불신들이 모여서 우리는 결국 헤어지게 됬던거야···’


결국 은영은 다시금 쓸쓸해졌다.



“기획나라죠? 저, 김지훈입니다.”

“오, 김지훈씨. 웬일이십니까?”

“제가 당분간 집에 혼자 있게 되어서요. 소호사무실이 필요 없게 되었어요. 그냥 집에 가서 쓸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달부터 소호사무실 사용료는 제하지 않고 입금시켜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획서 아르바이트를 다시 시작한 지 얼마 후부터 지훈은 이제 집에서 작업을 하게 되었다.

지훈은 매일 저녁 퇴근 후 집에 와서는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고 나서 PC를 켜고 소호사무실에서 했던 것과 같은 작업을 시작했다.



* * *



은영은 깔끔한 성격이었다.

집안도 늘 깔끔하게 청소와 정리정돈을 해 두었고, 스스로도 늘 단정하게 꾸미고 다녔다.

샤워도 매일 아침 저녁으로 하고, 일주일에 두번씩 낮에는 반드시 마스크팩을 했다.

이제 귀신이 되고 보니 씻을 일이 없어졌다.

귀신이 되고 다음날 아침 은영은 늘 하던대로 욕실로 가서 거울 앞에 섰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은 거울에 비치지 않았다.

물로 씻을 수도, 화장품을 바를 수도 없었다. 어차피 사람들에게 보이지도 않는다.


처음엔 ‘귀신은 씻지 않아도 되나? 냄새나지 않을까?’하고 생각했지만, 씻지 않아도 몸에서 냄새가 나거나 하진 않았다.

결국 은영은 씻지 않는 생활에 차차 익숙해져갔다.

익숙해진 것은 그것 만이 아니었다.

잠을 자지 않고 24시간 깨어 있는 것도,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에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은영은 오랜만에 예전 장례식장에서 사귄 친구인 선미를 만나러 가 보기로 했다.

가능하면 오지랍 아저씨도 만나 궁금한 것들을 물어볼 생각이었다.

예전 같으면 외출하기 전에 옷이며 화장이며 한바탕 난리를 쳤겠지만, 귀신이 된 지금은 그냥 아무 준비 없이 출발하기만 하면 되었다. 편해진 건 분명한데 여자로서의 특권을 빼앗긴 것 같아 시원섭섭했다.


은영이 밤나들이를 간 사이에 지훈은 혼자 PC로 기획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오늘 따라 일찍 작업을 끝낸 지훈은 잠자리에 들까 하다가 오랜만에 일기 사이트에 접속해 보기로 했다.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얼마 전 술에 취해 쓰다 만 지난 일기가 보였다.


‘아내가 죽은 지 이주일이 지났다. 하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그날로부터 몇일이 더 지났지만 아직도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더 지나야 이 생활에 익숙해질까?’

지훈은 오늘 날짜로 새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다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처음 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무렵이 생각난다.

애당초 처음 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 것은 1천만원을 모아서 아내와 해외여행을 가기 위해서였다.

신혼여행을 갔을 때 1년에 한번 씩은 해외여행을 가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한번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은영이는 알뜰한 편이다. 절대로 돈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다.

해외여행을 가려면 내가 그만큼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하는데···, 회사에서 버는 걸로는 대출금 갚고 한달 생활비로 쓰고 나면 얼마 남는 게 없다.

그래도 그동안 은영이는 소액이라도 남은 돈을 매달 저축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었다.

은영과 해외여행을 가기 위해서.

하지만, 어느새 우리 사이는 냉랭해져 있었고, 순식간에 이혼이 결정되었다.

애초에 계획했던 해외여행을 함께 가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그냥 이혼 전까지 계속 아르바이트를 해서 이혼에 필요한 돈으로 쓰면 될거라고 생각했다. 이사 비용이든, 위자료든···

어디에 돈이 필요할 지는 잘 몰랐다. 이혼은 처음이니까.

그저 막연하게 돈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아내는 없다.

더 이상 따로 돈을 모을 필요는 없어졌다.

그럼 왜 난 다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거지?

그저 관성처럼 애초에 천만원을 모으기로 하고 시작했으니 그저 그렇게 계속 돈을 모으고 있을 뿐이다.

천만원이 모이면 더 이상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 돈으로 뭘 할 지는 나중에 생각해봐야겠다···’



지훈은 온라인 일기장에 일기를 다 쓰고는 PC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지훈은 오늘따라 웬지 집안이 더 조용하고 허전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지훈은 포기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가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하나 꺼내 마셨다.

음악이나 들을까 싶어 CD를 뒤적여 보았다.

하지만, CD 하나마다 은영과의 기억이 깃들어 있었다.

지훈은 계속해서 CD를 뒤졌다. 하지만, 거실의 CD장에 있는 모든 CD들은 은영과 함께 골랐고 함께 들었던 것들이었다. 은영과의 추억이 없는 CD란 있을 수 없었다.

결국 지훈은 ‘리사 오노’의 CD를 틀었다.

스피커에서 ‘I wish you love’가 흘러나왔다.


‘난 당신에게 봄날의 파랑새를 주고 싶어요

그 새가 당신의 마음 속에 노래를 들려줄 수 있도록

그리고 키스도 받을 수 있기를,

하지만 그것보다도 중요한 건

난 그대가 사랑을 찾길 바래요’


지훈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는 마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익숙해 진 줄 알았는데···,


‘난 그대가 사랑을 찾길 바래요···’

그래···, 지훈은 은영이 살아서 진정한 사랑을 찾기를 바랬었다.


지훈은 눈물을 흘리며 오래 전 은영과 함께 들었던 노래를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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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완결] 하늘나라로 18.07.16 286 3 17쪽
28 큐피드의 화살 +2 18.07.14 251 3 13쪽
27 현우 이야기 4 +2 18.02.28 400 10 13쪽
26 현우 이야기 3 +4 18.02.27 325 9 12쪽
25 현우 이야기 2 +2 18.02.24 385 6 12쪽
24 현우 이야기 1 +2 18.02.23 367 6 12쪽
23 지은도 알게 되다 18.02.22 392 9 12쪽
22 수목장 18.02.21 356 9 11쪽
21 은영의 능력 +2 18.02.20 557 10 12쪽
20 은영의 비밀 18.02.18 402 8 12쪽
19 이혼식 +2 18.02.17 501 8 12쪽
18 대화가 필요해 18.02.15 450 8 12쪽
17 선미 이야기 3 18.02.14 461 8 13쪽
16 선미 이야기 2 18.02.13 430 8 12쪽
15 선미 이야기 1 18.02.12 459 8 12쪽
14 친구에서 경쟁자로 18.02.09 477 8 12쪽
13 귀신과의 조우 3 18.02.06 480 9 12쪽
12 귀신과의 조우 2 18.02.05 466 8 11쪽
11 귀신과의 조우 1 18.02.05 500 8 11쪽
» 지훈의 아르바이트 18.02.04 502 9 12쪽
9 산 사람은 살아야 18.02.03 526 8 13쪽
8 작은 복수 18.02.02 519 8 12쪽
7 회상 : 다툼 18.02.01 514 6 12쪽
6 친구들을 사귀다 18.01.31 537 9 11쪽
5 홀로서기 18.01.26 614 10 12쪽
4 회상 : 첫 만남 18.01.25 573 5 12쪽
3 귀신이 되다 18.01.25 598 7 12쪽
2 장례식 18.01.24 697 9 12쪽
1 이혼 하는 날 18.01.23 938 1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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