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식
“잠시 화장실 좀 다녀 올게요.”
지훈은 지은에게 양해를 구하고 테이블 위에 놓아둔 핸드폰을 집어들고 화장실로 갔다.
지훈은 화장실 변기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라디오앱을 틀었다.
그리고 메모장앱을 열어 타이핑을 시작했다.
[언제 온거야?]
[방금 전에 왔어요.]
[전등은 왜 또 꺼뜨린거야?]
[화가 나서요.]
[뭐가 그렇게 자주 화가 나는데?]
[화 내는 거야 내 자유잖아요. 이젠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닌데 뭘 그렇게 간섭해요?]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서 그럼 여기까진 왜 따라 와?]
[지은이 보러 온 거에요.]
[지은씨가 보고 싶으면 평일에 오면 되지 왜 내가 있을 때 오냐고?]
[마침 오늘 보고 싶었다고요.]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화난 이유는 뭐야?]
[내 얘기를 왜 지은이에게 자꾸 하는 거에요?]
[지은씨는 너의 죽마고우라며. 그렇다면 지은씨도 너에 대해서 알 자격이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 시댁 어른들, 친정 어른들 모두 다 아실 자격이 있으신 분들이에요.]
[그래. 모두에게 말씀드리자구. 너 여기 아직 남아 있다고.]
[안돼요. 겨우 마음 추스리신 어른들인데 쓸데없이 몇 달 더 희망고문만 할 뿐이에요.]
[나도 지은씨에게 제대로 얘기한 것도 아니야. 믿지도 않더구만 뭘.]
[나 없는 사이에 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거 듣기 싫단 말예요.]
[여기 남은 이유가 있다며. 하늘 나라에 올라가지 않고 이곳에 남은 이유가. 만약 너 혼자서 풀 수 있는 문제였다면 왜 여기 남아 있겠어. 우리 사람들과 못 푼 문제였겠지. 그럼 문제를 풀려면 알리는 수 밖에 더 있어?]
[오빠와의 문제라고 했잖아요. 오빠만 알면 됬어요.]
[그래. 나와의 문제라면 이혼이라고 했지? 이따 집에 가서 이혼하자. 그럼 됬지?]
지훈은 더이상 은영의 말을 듣지 않고 귀에서 이어폰을 뽑은 다음 화장실을 나왔다.
‘늘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뭐 그리 불만도 많고 따지는 것도 많은지···’
지훈은 예전에 두 사람이 다투던 시절이 떠올라 화가 났다.
‘그래. 이래서 우린 이혼하려 했던 거야. 지훈씨는 눈꼽만큼도 내 마음을 이해하려 들지 않아. 그리고 늘 일방적으로 대화를 중단해 버리지.’
은영도 화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지훈은 자리에 앉았다.
“오래 걸렸죠? 죄송합니다.”
“큰 거 보고 오시는 줄 알았어요. 풉~”
“하하하~ 보기 보다는 제가 장은 튼튼합니다.”
“좀 전에 우리 무슨 얘기 하다 말았죠? 아~ 귀신 얘기 하다 말았죠? 그래서, 은영이가 귀신이 되어 여기 나타났단 말씀인가요? 호호~”
“아, 아닙니다. 농담이었어요. 우리 다른 얘기 하죠.”
“언제쯤 우리는 은영이 얘기 말고 다른 얘기를 할 수 있을까요?”
“지금부터 하면 되죠. 우리 게임 하실래요? 은영이라는 말을 하거나 은영이와 연관되는 얘기를 꺼내면 벌주로 맥주 반잔씩 마시기.”
“좋아요!~”
“음···, 대학때 전공이 뭐죠?”
“영문학이에요. 은영이가 얘기 안 하던가요?”
“빙고!”
“어머, 제가 걸렸네요. 호호호~”
“자~ 받~으~시~오~”
지훈은 지은의 빈 잔에 맥주를 절반 따라 주었고 지은은 활짝 웃으며 완샷을 했다.
지은은 벌을 받고 있으면서도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 후로 한시간 가량 두 사람은 게임을 즐겼다. 처음에는 서로 걸리기도 했지만, 어느새 그들은 한번도 벌칙을 받지 않게 되었다. 즉, 그들의 대화에서 이제 은영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게 되었다.
걸리는 사람이 없자 두 사람은 게임을 중단하고 다시 맥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마시기 시작했다.
“은영이 얘기를 안하기로 하니까 지훈씨에 대해서 새로운 내용을 많이 알게 됬어요.”
“저두요···, 오늘은 지은씨에 대해서 무척 많은 것을 알았네요.”
“지훈씨는 참 매력적인 분이신 거 같네요···, 은영이가 부러워요.”
“이렇게 매력적인 남자를 은영이는 왜 걷어차려 했을까요? 하.하.하~”
“그러게 말이에요. 지훈씨 혹시 결혼하면 돌변하는 스타일 아니에요? 왜 있잖아요. 낚은 고기에 밑밥 안준다는 그런 생각 가진 남자들. 호호~”
“그걸 확인하는 방법이 딱 하나 있죠.”
“그게 뭔데요?”
“저와 결혼 해 보는 겁니다. 우하하~”
“그거 확인하려고 지훈씨랑 결혼하라구요? 호호호~”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두 사람은 자리를 정리했다.
“집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어차피 지은의 집은 그리 멀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지하철을 타고 지은이 사는 오피스텔까지 함께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지은의 현관문 앞에 도착하자 지훈이 말했다.
“제가 열어드릴게요. 이젠 저도 번호를 아니까요. 하하하~”
지훈은 번호키를 눌러 문을 열어 주었다.
“어머, 천기누설이네요. 우리집 비밀번호가 노출되다니. 아무래도 번호를 바꿔야겠어요. 호호호~”
지은도 지훈도 술이 취해 있었다.
두 사람은 열린 문을 사이에 두고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술에 취해 잠시 멍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들어가세요. 이만 물러 가겠습니다.”
“지훈씨, 잠깐만요.”
지은은 지훈의 뺨에 뽀뽀를 했다. 그리고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라고 말하고 재빨리 문을 닫았다.
갑작스런 지은의 기습에 지훈은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은영이 우릴 보고 있을 지도 모르는데···’
지훈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오늘 밤 내내 지훈은 은영이 자기와 지은을 보고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여봐란 듯 지은과 농담 따먹기를 하며 흥겹게 술을 마셔댔다.
어쩌면 은영이 자기를 지켜보고 약 오르기를 바란 것인지도 몰랐다.
지훈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래. 은영이를 빨리 놓아주는 것이 그녀를 돕는 길이야···’
집으로 돌아오면서 지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집에 가서 이혼식을 해 주자.’
그러나 지훈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취한 몸의 긴장이 갑자기 풀리는 것을 느꼈다.
지훈은 옷을 겨우 벗는 둥 마는 둥 하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면서 지훈은 은영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 퇴근 후에 우리 이혼식 거행하자.”
잠시 후에 라디오가 잡음을 내기 시작했다.
[ㅇㅋ]
은영은 어제 지훈의 행동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지은이 지훈의 뺨에 키스하는 모습을 보자 은영의 마음은 철렁 하고 내려 앉았다.
‘마음이 이렇게 쓰린 걸 보니 지훈씨에게 아직 감정이 남아있는 모양이야···
하지만 더 이상은 지훈씨 때문에 마음 아프고 싶지 않아.
이렇게 서로를 힘들게 할 바에는 빨리 깨끗하게 정리해 버리는 게 나아.’
지훈은 회사에서 하루 종일 얼굴에 웃음기가 없었다.
퇴근시간이 되자 지훈은 기다렸다는 듯 칼퇴근을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 좀 씻을게.”
지훈은 이렇게 은영에게 말하고 나서 꼼꼼히 샤워를 했다. 로션도 바르고 머리는 드라이를 다시 했다.
욕실에서 나와 새 와이셔츠를 정성껏 다렸다. 여러번, 정성스럽게.
양복바지도 다려 칼이 잡히도록 했다.
그리고는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모양이 예쁘게 매고 양복을 입었다.
“자, 이제 식을 진행하자구.”
“신랑, 신부 입장.”
“자 당신 먼저 해. 나 최은영은 김지훈과의 결혼을 파기할 것을 선언합니다, 라고 말해.”
[나 최은영은 김지훈과의 결혼을 파기할 것을 선언합니다]
“그럼 이제 내 차례. 나 김지훈은 최은영과의 결혼을 파기할 것을 선언합니다.”
지훈은 PC로 A4용지에 위의 문장을 커다랗게 써서 두장 인쇄했다.
그리고 한장에 자신의 사인을 하고 다른 한장은 옆으로 내밀었다.
“당신은 마음 속으로 사인해.”
지훈은 결혼반지와 망치를 가져왔다.
지훈은 결혼반지를 망치로 쿵쿵 내리쳐 동그란 모양을 찌그러뜨렸다.
“자, 이제 두사람의 이혼이 성사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동안 고마웠고, 미안했다···”
지훈의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옆에서 계속 따라하던 은영의 눈시울도 뜨끈해졌다.
“올라가게 될 것 같으면 미리 알려줘.”
[알았어요.]
지훈은 멍하니 식탁 의자에 앉았다.
5분, 10분을 기다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직 안 올라갔어?”
[네]
지훈은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홀짝 홀짝 마시기 시작한 캔이 3개 째가 되었을 때 지훈은 다시 물었다.
“아직 있어?”
[네에···]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지훈은 양복을 벗고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이혼식을 한 지 두시간이 지났지만 은영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무래도 방법이 틀렸나보다. 나 너무 피곤해서 이만 잘게.”
[네에···]
지훈은 그대로 침대로 가서 잠이 들어 버렸다.
은영은 짜증이 났다.
지난번 자기가 혼자서 진행했을 때에는 지훈이 동의를 안 해서 무효가 된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지훈이 동의를 했는데도 승천이 안 일어났다.
뭐가 문제일까?
혹시, 주례나 사회자가 없어서 그런건가?
이혼식에도 주례나 사회자가 필요한건가?
아무래도 모를 노릇이었지만, 무슨 방법이든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시도는 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일 아침까지도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지훈씨더러 주례나 사회자를 구해 보라고 해야겠어.’
다음날 아침,
지훈은 갑자기 번쩍 잠에서 깨어났다.
어제 은영에게 변화가 생기는지 확인하지 못한 채 잠이 들어 버렸는데, 혹시 밤새 은영이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작별인사 없이 이별하면 안되는데···
지훈은 얼른 라디오앱을 켜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은영아, 아직 있니?”
대답이 없었다.
지훈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은영아, 없니?”
[저 아직 여기 있어요.]
휴우~ 하고 지훈은 한숨을 돌렸다.
“어제의 방법은 아닌가보네···”
[주례나 사회자가 없어서 그런 걸까요?]
“그런가? 그럼 사회자를 구해볼까?”
[누구한테 얘기하시게요?]
“그야, 용범이 밖에 더 있어? 우리 결혼식 사회도 용범이가 봐줬잖아.”
[용범씨한테 어디까지 얘기하실 건데요?]
“글쎄, 지난번엔 실패했는데 다시 한번 얘기해 봐야지.”
지훈은 회사에서 용범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용범아, 오늘 저녁에 시간 있냐?”
“왜, 술 한 잔 하게?”
“술? 술도 마실 수 있고···”
“술도···? 그럼 뭐가 메인인데?”
“나 이혼식을 했으면 하는데···”
“이혼식?”
“응. 일종의 위령제 비슷한거지. 은영이가 이혼을 못하고 죽어서 그게 내내 마음에 걸리네. 혹시나 이혼 못하고 죽어서 하늘나라에 올라가지 못하고 귀신이 되어 이승을 떠돌지 않을까 싶어서···”
“전에도 귀신 얘기 하더니, 혹시 은영이 귀신이라도 본 거냐?”
“응? 으응··· 꿈에···”
“그래··· 위령제라도 지내서 네 마음이 편해진다면 해 줘야지. 오늘 저녁에 하게?”
“응. 위령제 지내고 나서 제사주로 술 한 잔 하자.”
“좋아. 그럼 뭐 향불이나 그런 제사도구 집에 있어? 내가 사가지고 갈까?”
“아니,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딱 한번 지낼건데 제사도구는 무슨···”
“어차피 매년 기일에 제사 안 지낼거야?”
“그런가···, 그래도 제사는 제사고 위령제는 좀 다르니까 그냥 와라.”
“그래. 그럼 차례주만 내가 사갖고 갈게.”
“그래. 일 마치고 천천히 와.”
지훈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다시 양복을 정성껏 갖춰 입고 용범을 기다렸다.
“혹시 말이야···, 이혼식 하고나서 곧바로 하늘나라로 올라갈 때를 대비해서 미리 말해둘게. 하늘나라 조심해서 잘 올라가고, 그동안 죽은 줄 알았던 너랑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행복했다. 살아있는 동안 잘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죽어있는 동안에도 마음 편히 지내도록 해 주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하다. 하늘나라 올라가서는 부디 행복하게 잘 살아···”
은영은 지훈이 차분히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