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영의 비밀
지훈의 말을 듣고 있는 은영의 눈시울이 뜨끈해 지고 있었다.
은영이 뭔가 말 하려는데 ‘딩동~’ 하고 벨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나다, 용범이.”
용범이는 손에 차례주를 들고 들어왔다.
“아무것도 없네? 제사상 같은 거 안 차려 놨어?” 용범이 말했다.
“그런 거 필요 없어. 그냥 형식적으로 이혼식만 진행하면 되니까···”
“그런가? 그럼 잔이나 두개 꺼내라 술이나 따라 놓고 시작하자.”
지훈은 예전에 은영과 와인 마실 때 썼던 크리스탈 와인잔 두개를 꺼내 식탁 위에 놓았다.
“초 있냐?”
“있지···”
지훈은 초도 꺼내와서 두개 식탁 위에 불을 붙여 놓았다.
지훈은 촛불 외의 모든 불을 껐다.
“잠깐만 기다려.”
지훈은 냉장고에 넣어둔 모닝빵을 접시에 담아서 식탁 위 가운데에 올려 놓았다.
초와 술잔만 있어도 테이블이 그럴듯 했는데 여기에 모닝빵이 추가되니 마치 교회에서 하는 성찬식 분위기가 났다. 성찬식도 따지고 보면 제사의 일종 아닌가.
“시작할까?”
용범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응···”
“야, 엄숙한 식 진행하는데 귀에 이어폰 꽂고···, 너 나이가 몇이냐? 빼라.”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는 지훈을 보더니 용범이 한마디 했다.
“아, 이건 그냥 신경쓰지 말고 진행해라.”
“으이그···, 자, 그럼 이제부터 남편 김지훈과 아내 최은영의 이혼식을 거행하겠습니다..., 남편 입장~”
지훈은 일어나 촛불이 차려진 식탁 앞에 반듯하게 섰다.
“아내 입장~”
용범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렇게 말했지만, 실제로 귀신이 된 은영도 지훈 옆에 똑바로 섰다.
“두 사람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결혼했으나 성격 차이로 이혼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혼 당일 안타까운 교통사고로 사별을 하게 되어 부인이 이혼을 못 한 채 고인이 되었습니다. 혹시 고인이 된 아내가 남편과의 인연을 끊지 못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이렇게 이혼식을 거행하오니 부디 이 이혼식이 끝나고 나면 고인은 편안히 하늘나라로 올라 가시기 바랍니다.”
용범은 제법 주례자 역할까지 해 가며 사회를 잘 보고 있었다. 여자 문제만 빼면 용범은 어느 자리에서건 제 역할 이상을 해 내는 든든한 친구였다.
“자, 그럼 남편 김지훈은 아내 최은영과 이혼을 서약합니까?”
“예!”
“자, 그럼 아내 최은영은 남편 김지훈과의 이혼을 서약합니까?”
[예···]
은영은 대답하고 지훈이 들을 수 있도록 모르스신호로도 알려 주었다.
“자, 그럼 결혼 반지를 제출하시기 바랍니다.”
지훈은 이미 전에 찌그러뜨린 결혼반지를 내밀었다.
“벌써 깨뜨렸구만···, 자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남편 김지훈 할 말 있으면 하세요. 아내 귀신이 있다면 들을 수 있도록···”
“이건 예정에 없던 거잖아?” 지훈은 작은 목소리로 용범에게 속삭였다.
“나쁠 거 없잖아. 그냥 해.”
“음···, 그동안 변변치 못한 남편을 만나 고생만 시켜서 미안해. 내가 좀 더 마음이 넓은 남자였더라면 너를 제대로 품어줄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했구나. 좀 더 많이 벌어다 주지 못해서 미안했구, 좀 더 사랑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무쪼록 하늘나라에 잘 올라가서 나같은 못난 인연은 잊고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란다···”
“자, 그럼 이제 아내 귀신도 있다면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있으면 해 보세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말씀이 없으시네, 그럼 이제 이혼 선언을···”
“잠깐만.”
“응?”
“잠깐만 더 기다려 보자.”
지훈은 이어폰에 귀를 기울이며 말했다.
[오빠···, 그럼 나도 이야기 좀 할게요. 만약 이걸로 이혼식이 효력을 발휘해서 내가 하늘나라로 곧바로 올라가 버리고 나면 오빠에게 영원히 이야기 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니까···
오빠는 나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었어요. 그 점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 오빠 스스로를 자책하진 말길 바래요.
그리고, 이제 마지막이니까 나도 오빠에게 그동안 간직해왔던 비밀 한가지를 말할게요.
실은 나 오빠의 아기를 유산했었어요···]
지훈은 갑자기 얼굴이 굳어졌다.
“용범아, 나 화장실에 좀 들어갔다 올게.”
“응? 이혼식 중에? 급하냐? 빨랑 다녀와.”
지훈은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계속해···”
[결혼하고 일년쯤 되었을 때, 갑자기 임신 사실을 알게 됬어요. 우린 피임을 했었잖아요.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실패했는지 임신이 된거에요. 예정하지 않았던 거라 당황스러워서 오빠에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 하고 몇일을 그냥 보냈어요. 그러던 와중인데 아침에 오빠 출근하고 나서 하혈이 나왔어요. 병원에 가보니 유산이 된거라고 했어요.
임신한 걸 알지도 못한 오빠에게 어떻게 유산 소식을 알리지? 하고 혼자서 끙끙 앓다가 그냥 시간이 흘러가 버렸어요. 나중에는 그냥 오빠가 걱정할 거 같아서 알리지 말고 나도 없었던 일로 잊기로 했어요.
금방 다시 임신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그 이후로 웬지 점점 마음이 우울해지는거에요. 자꾸만 제가 몸 관리를 잘 못해서 임신도, 유산도 일어난 것 같은 생각이 들고···, 나 혼자만 이런 고통을 짊어지고 가는 것 같고··· 내가 바보였어요. 오빠한테 다 말했으면 될텐데 그러지도 않으면서...
나는 힘든데 오빠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아서 짜증이 나기 시작했어요. 오빠에게 트집을 잡고, 잔소리를 하고, 짜증을 내고··· 그렇게 되어갔던 거에요.
그러니 오빠도 나에게 좋게 대해주지 않았고, 점점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멀어졌던 것 같아요.]
말을 하는 은영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듣고 있는 지훈의 눈시울도 뜨끈해졌다.
은영은 계속해서 말을 했다.
[모든 것은 내 잘못이에요. 오빠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 오빠에게 유산했던 일을 말하려고 했지만, 어느새 우리 사이는 냉랭해져 있었고 그런 말을 꺼낼 수 조차 없는 분위기가 되어 버렸어요. 저는 더 외로움을 느끼고 저 만의 껍데기 안에 숨어 지냈구요. 오빠, 미안해요···]
은영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훈도 밖에 있는 용범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 소리를 꾹 참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지훈은 스마트폰 메모장을 꺼냈다.
[그런 줄 몰랐어. 정말 몰랐어. 이런 힘든 일을 혼자서 감당하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
[모두 내 잘못이에요. 내가 말 했어야 했는데···]
[내가 빨리 눈치 챘어야 하는데···,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물어보지 않았지. 내가 적극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대화했어야 하는데, 그냥 화가 나서 아무 말도 않고 있었어···]
[어쩌면 이 모든 일이 우리가 인연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라요. 결국 난 이렇게 죽게 되었잖아요. 우리가 화해를 했었더라도 그 교통사고를 피할 수는 없었을 거에요. 결국 우리는 헤어질 운명이었던 거에요. 그래서···, 이제는 오빠를 놓아주려고 생각해요. 오빠도 좋은 사람 만나서 남은 생은 행복하게 살아요.]
[안돼. 이제 막 진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런 감정을 지닌 채 널 보낼 수는 없어. 우린 좀 더 함께 할 시간이 필요해.]
[대화를 하면 할수록 오빠랑 난 서로를 힘들게 할 뿐이에요···]
[그건 내가 이 사실을 몰랐을 때 얘기야. 네가 혼자서 이렇게 고통받고 있었던 줄 몰랐을 때 얘기라구.]
[···]
은영은 말이 없었다.
[우리 오늘 이혼식을 하지 말고 조금만 더 시간을 갖자. 네가 이대로 오늘 밤에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면 난 정말 미칠 것 같아. 제발 부탁이야···]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달라지는 건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최소한 마음은 홀가분해 질거야. 너도.., 나도···]
지훈은 화장실에서 나왔다.
“야, 임마. 엄숙한 이혼식 하다 말고 뭘 그리 오래 싸고 오냐?”
“미안, 미안··· 벼, 변비가 좀···, 우리 어디까지 했지?”
“이제 이혼 선언만 하면 된다.”
“용범아, 미안한데. 우리 이혼 선언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왜 임마. 이걸 해야 화룡점정이 되는거야. 딱 효과를 발휘하는 거라고.”
“그게, 아직 이혼식 할 때가 아닌 것 같아.”
“때가 아니라니? 뭔소리야?”
“어, 그게···내가 화장실에서 응가 보면서 검색해 본건데, 이번 달은 길흉화복 중에 ‘화’가 많은 달이라는거야. 그래서 말이지···”
지훈은 말도 안되는 소리를 둘러대서는 이혼식을 중단해 버렸다.
“짜식, 쪼잔하게 뭘 그리 따지는 게 많아.”
“미안하다. 대신 우리 술이나 마시자.”
“술?··· 좋지~”
지훈과 용범은 둘이서 차례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안주 삼아 모닝빵을 씹었다.
“야, 다른 안주 없냐? 안주거리 좀 꺼내와 봐.”
“찾아볼게.”
지훈은 냉장고에서 체다치즈와 햄 등을 꺼내다 식탁 위에 올려 놓았다.
“은영씨가 있었으면 그럴 듯 한 안주상 차려 주셨을텐데···”
“그랬겠지··· 착한 여자니까···”
“근데 왜 둘이 그 지경까지 간거야?”
“그러게 말이다···”
용범은 술이 다 떨어지자 집으로 돌아갔다.
지훈은 거실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소파에 앉았다.
“선미씨 아이를 구하려고 그렇게 애 쓴 것도 그래서였어···?”
[선미씨 아이를 보는 순간 마치 내 아이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내 뱃속에 들어있던 아이도 잘못 되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쯤 저 정도로 컸을 것 같았거든요.]
“그랬구나···”
지훈은 선미의 아이를 구하려 백방으로 노력하던 은영의 모습을 이제서야 이해 할 수 있었다.
[만약 선미씨 곁에 오빠와 내가 없었다면 선미씨는 자기 아이가 장기매매범에게 팔려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 볼 수 밖에 없었을 거에요. 그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끔찍하겠어요?
만약 선미씨 아이가 진짜 장기매매범에게 팔려갈 운명이었다면 아마 선미씨는 이승에 남겨지지 않았을 거에요. 그걸 반드시 막을 운명이었기 때문에 남겨진 걸 거에요. 그렇다면 오빠랑 내가 선미씨를 만난 것도 운명이고요.]
“그리고, 귀신이 된 너와 내가 다시 만난 것도···, 운명일 수 있겠구나···”
[모든 것이 운명이라면, 제가 이승에 남겨지고 오빠와 대화 할 수 있게 된 것도 운명이라면 거기에는 어떤 뜻이 있을 거에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뜻이란 건 내가 오빠에게 말하지 못했던 내가 유산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오빠가 그 사실을 몰랐다면 오빠는 아마 평생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살았을 거에요.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우리 사이가 멀어지게 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걸 알고 훌훌 털어 버리라고···, 그걸 말해주기 위해 제가 이승에 남겨진 것 같아요.]
“어쩌면 너도 나에게 털어 놓음으로써, 너 혼자서만 그 아픔을 짊어지고 가지 말고 훌훌 털어버리고 가라고 하늘이 이런 기회를 주신 건지도 모르겠구나···”
지훈은 여전히 은영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걸 왜 털어놓지 않고 혼자서만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는지···
결국 은영이 마음 놓고 털어 놓을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어야 하는데, 자신이 그러질 못한 탓이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은영을 왜 좀 더 보듬어 주지 못했을까?
은영의 마음을 왜 좀 더 이해하려 노력하지 못했을까?
후회는 앞서지 않는다지만 정말 지훈은 뒤늦게 후회를 거듭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더 이상 이혼을 하려고 노력하지 말고 화해를 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오늘부터 나 잘 때 내 곁에 있어주지 않을래?”
[그럴게요···]
지훈은 잠옷으로 갈아 입고 침대에 누웠다.
“잘자···”
[오빠도 잘 자요.]
지훈은 웬지 침대가 평소보다 더 따뜻해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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