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도 알게 되다
현우가 사는 홍제동은 오래된 단독주택 단지였다.
지훈은 길 아래로 조금 더 내려가 있는 구멍가게로 들어갔다.
이것저것 과자를 몇개 담아 계산하면서 지훈이 구멍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아저씨, 저 위에 초록색 대문 집 언제 이사했어요?”
“아, 거기 아이 죽은 집?”
“네에···”
“애 장례 치르자 마자 바로 이사 갔지. 나 같아도 그 집에 살면 애가 눈에 밟혀서 살겠소? 다른데로 이사가고 싶지···”
지훈은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지훈은 다시 차로 돌아와 은영과 현우귀신에게 말했다.
“현우야, 부모님이 다른 집으로 이사 가셨대. 오늘은 일단 우리 집으로 같이 가고 내일 어디로 이사 가셨는지 확인해 보자.”
[네에] 현우의 대답은 은영이 대신 지훈에게 알려줬다.
“은영아, 현우에게 다녔던 초등학교나 교회 등등 확인할 수 있는 여러가지 정보들을 좀 물어봐 줘.”
“네에.”
현우를 맏기고 지훈은 저녁이 되어 은영과 만나기로 약속한 베네치아로 갔다.
8시가 좀 넘어서 지은이 들어왔다.
“늦었죠? 미안해요.”
“회사 다니시니까 어쩔 수 없죠, 괜찮습니다. 저녁은 드셨어요?”
“네, 먹었어요. 우리 지난번처럼 맥주 한잔 할까요?”
두 사람은 맥주를 주문해 마시기 시작했다.
“저···, 뭐라고 말씀드려야 좋을 지 모르겠습니다만···” 지훈이 먼저 입을 떼기 시작했다.
“지훈씨, 제가 먼저 얘기할게요.”
“예에···?”
“지훈씨 이런 말 하려고 하셨죠? 아직은 은영이 죽은지 얼마 안됬다.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아직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둘 준비가 안 되어 있다. 당분간 혼자 있고 싶다. 나중에 다시 연락하자.”
“예? 예···거의 비슷하긴 합니다만··· 어떻게 그걸···?”
“지훈씨 말도 맞아요. 이런 일에는 시간이 약이죠. 은영이 죽은지 두달도 안 된 것도 잘 알구요. 어떻게 보면 제가 미친년이죠. 친구 죽자마자 친구 남편 꼬시려고 한다는 소리 듣기 딱 좋으니까요.”
“아, 그런 뜻은 아니고···”
“우선, 제 입장을 말씀드릴게요. 전에도 솔직하게 말씀드렸지만, 저 지훈씨에게 호감 있어요. 그것도 오래 전부터.”
“···”
“호감은 은영이 살아 있을 때부터 갖고 있었지만, 저도 임자 있는 남자를 뺏을 만큼 팜므파탈은 아니구요, 그냥 호감 정도였어요. 하지만, 은영이가 죽고 나서 그 호감이 부쩍 강해지더군요. 거기에 더해서 친구의 남편이기에 내가 위로해 줘야겠다는 연민 같은 것도 생겼어요···”
“···”
“아마 본인은 못 느끼실 지 모르겠지만, 지훈씨 은영이 죽고 나서 엄청나게 많이 변한 거 아세요? 너무 힘들어 하고 계세요. 은영이 죽음이 지훈씨 책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책하고 계시잖아요. 얼마나 자책이 심했으면 은영이가 귀신이 되어 나타나는 환상도 보시는 것 같고···, 혹시 악몽도 꾸시죠? 은영이가 귀신으로 꿈에 나타나서 지훈씨를 해치는. 요즘 지훈씨 혼자서 중얼중얼 하시는 것도 저 여러번 목격했어요. 게다가 이제는 직장까지 그만 두셨다고요? 좀처럼 밖에 외출하기 싫으시죠? 이러다 은둔형 외톨이에 고독사 하시는 거 시간 문제에요. 지금 지훈씨는 주위에 지훈씨를 붙들어 줄 사람이 필요해요.”
“저어, 그게···”
“변명은 그만 두세요. 그리고, 스스로를 직시하세요. 우선 제가 조언 드리고 싶은 것은 맨 먼저 신경정신과 한번 가서 환상, 환청 있다고 상담 한번 받아 보세요. 그리고, 저를 뿌리치지 마세요.”
“저, 지은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필요가 없긴 왜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치료받기를 주저하지만, 우울증은 그저 마음의 감기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신경정신과에 가서 진료 받는 거 두려워하실 필요 없어요.”
“지은씨, 현재 저의 정신상태는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그리고, 저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도 잘 알고 있구요. 그래서, 오히려 저를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구요. 은영이가 없는 이 상황도 잘 극복하고 있어요.”
“그렇게 정상적인 척 하실 필요 없다니까요. 마음 문을 여세요.”
“그러니까요. 그래서 사실 오늘 지은씨를 뵙자고 한 것은 진실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거라니까요.”
“네. 그럼 한번 말씀해 보세요.”
“예. 저는 아직 은영이와 대화를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은영이는 아직 귀신이 되어 이승에 남아 있고요.”
“···, 흑흑~ 지훈씨··· 제가 곁에 있어 드릴게요. 제발 정신 차리세요. 지훈씨! 우리 내일 바로 신경정신과 저랑 함께 가요. 가서 상담하면 많이 나아질 거에요.”
“아직도 제 말을 의심하고 계신 것 같은데, 그럼 제가 증거를 보여 드리죠.”
“···”
“자, 이건 제가 최근에 은영이와 나누었던 대화입니다.”
지훈은 은영과 메신저로 대화 나누었을 때 자동으로 저장된 대화 기록을 보여주었다.
“이걸 보세요. 아무려면 제가 이렇게 은영이에게 빙의되어 혼자서 묻고 답하고를 할 수 있겠어요?”
지은은 차분히 지훈이 내민 핸드폰 메신저의 대화기록을 살펴 보았다.
대화기록을 읽던 지은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지훈씨···”
“이제 알겠죠? 은영인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어요. 하하~”
“어머, 저걸 어째. 오~ 지훈씨···, 이젠 조울증까지···, 불쌍해라···, 흑흑흑~”
“하하~ 왜 우세요? 이렇게 기쁜 일인데. 저희는 그래서 매일 대화를 나누고 있답니다. 하하~”
“엉엉~ 지훈씨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신 거에요?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네에? 아직도 절 못 믿고 계신거에요?”
“지훈씨, 제발 현실로 돌아 오세요.”
“아우, 답답해···, 쉽게 받아들일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잠시만요. 은영아, 지금 여기 있니? 아무래도 방법을 좀 바꿔봐야 할 것 같아.”
“엉엉~···., 어우~ 우리 지훈씨 불쌍해서 어떡해···, 엉엉~~~ 설마 이 정도일 줄은···.”
그 때, 지훈의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지훈은 메신저를 확인해 봤다.
[이럴 줄 알고 혹시나 해서 와 봤는데 역시나로군요? 잘 수습할 자신 있다면서요?]
“왔구나. 나 그럼 이어폰 끼고 말할게.”
지훈은 주섬주섬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은영아, 아무래도 네가 도와줘야겠다.”
[어떻게요?]
지훈은 지금 이어폰을 꽂고 혼잣말을 하고 있는 자신을 울며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지은에게 말했다.
“지은씨, 이거 한번 보실래요?”
지훈은 메신저 창을 열어 지은에게 보여 주었다.
지은은 울면서 지훈의 핸드폰을 들여다 보았다.
“자, 우리 셋이서 대화 한번 나눠봐요. 자, 은영이가 방금 왔대요.” 지훈이 말을 시작했다.
[지은아 안녕? 나 은영이야.]
“흑흑~ 그래. 은영아, 나 지은이야. 만나서 반갑다.”
[나도 만나서 반가워.]
“으흑흑흑흑~~~ 지훈씨, 이거 요즘 나온 AI 비서 서비스에요? 이거 아이폰이에요? 안드로이드에요? 이거 어디서 나온 앱이에요? 지훈씨, 이 정도로 외로우셨어요? 이토록 은영이와 대화를 나누고 싶으셨어요? 흑흑흑~”
[오빠, 아무래도 실패 같죠?]
“그런 것 같아. 오늘은 안되겠다.”
[그러지 말고 나한테 맏겨 봐요. 지은이에게 이거 끝까지 보고 있으라고 해 주세요.]
“지은씨, 이제 좀 진정하시구요. 제발 이거 끝까지 좀 지켜봐 주세요. 부탁입니다. 제 부탁 들어 주시면 저 내일 신경정신과 진료 받겠습니다!”
“흑~ 그럼 약속이에요? 자 약속!”
“넵. 약속!”
두 사람은 손가락을 걸었다.
지은은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지은아, 우리가 만난 것도 벌써 10년이 넘었구나. 우리가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으니까 말이야.]
“응. 맞어. 너 참 나에 대해서 많은 데이터를 축적했구나. 똑똑한 AI인가봐.”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너 고 2때 시험기간이면 우리집에서 밤샘 시험공부 한다고 알리바이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고서 사귀던 동현고 남학생이랑 밤새 놀러 다녔잖아, 맞지? 항상 새벽 3, 4시에 몰래 우리집에 들어와서는 미니스커트 갈아입고 화장 지우고 했었던 거 기억나지?]
“어머, 어머. 얘가 무슨 소리야? 남들이 들으면 진짠 줄 알겠네.”
[그 남학생 축구부였잖아. 그래서 별명이 슛돌이였지. 내가 맨날 너한테 ‘오늘도 슛돌이 만나러 가냐?’고 놀리곤 했잖아.]
“어머, 어머. 근데 그런 정보는 어떻게 알았니? 너 진짜 똑똑하다···”
[그리고, 너네 고모 이혼하시고 재혼하셨잖아. 조카들은 그거 전혀 모르고 있고, 자기 엄마가 친엄만 줄 알고 있잖아.]
“어머···, 그걸···, 어떻게···”
[우리 대학 들어가서 처음으로 홍대 클럽 갔다가 막차 끊겨서 집에 오느라고 난리 쳤었지. 차비가 한사람 꺼 밖에 안남아서 결국 우리집에 전화해서 우리 아빠가 데리러 와 주셨었잖아.]
“···”
[지은아, 계속할까? 얼마나 더 얘길 해야 내가 은영인 줄 믿겠니?]
“···,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래. 나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단다. 죽고 나니 내가 귀신이 되어 있더라구.]
“귀,귀신? 엄마야~~ 지훈씨, 얘 귀신이래요.”
“···”
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지은을 바라보았다.
[겁내긴. 천하의 이지은이 무슨 겁을 그렇게 먹고 그래? 너 대학 엠티때도 담력훈련한다고 밤중에 공동묘지로 불려 갔을 때도 안 운 건 너 밖에 없었다고 자랑했잖아.]
“···실은, 나도 울었어···, 그 때. 너한테 그렇게 말했지만.”
[기지배. 항상 내 앞에서 강한 척 했구나?]
“항상 넌 보호 받는 캐릭터였구. 난 널 보호해 주는 캐릭터였잖아.”
[그랬지···, 그 시절이 그립구나. 이지은.]
“너, 그럼···, 정말··· 귀신···?”
[맞어. 그렇게 됬어.]
“헉!~ 믿을 수 없어.”
[그럼 좀 더 확실하게 말해줄까? 너 조금 아까 화장실 가서 그 안에서 카톡 쳤지? 너 밑에 대리한테 ‘다들 퇴근했어?’라고 메시지 보냈잖아.]
“야!~ 너, 화장실까지 따라왔어?”
[나도 여잔데 그럼 여자 화장실에 왜 못가니?]
“너, 혹시 내 핸드폰까지 해킹 가능한 AI 아냐?”
[어휴, 핸드폰이라 못믿겠다 이거지? 그럼 이건 어때? 너 오늘 속옷 색깔 맞춰볼까? 검정색 쉬폰···]
“끼약! 그만!~~~~ 알았어. 믿어줄게!”
지은은 순간 얼굴이 빨개지며 지훈이 읽지 못하도록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기지배. 이제야 믿겠니?]
“근데, 어떻게 된거야? 죽으면 하늘나라에 올라가는 거 아니야?”
[나도 잘 몰라. 죽는 건 처음이니까. 대부분은 죽으면 하늘로 곧바로 올라 들 가더라구. 근데, 귀신이 되어 이승에 남는 경우도 드물게 있대. 그건 이승에서 풀지 못한 매듭이 있어서 그런 거래. 그 사연을 풀게 되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대.]
“넌 그 사연이 뭔데?”
[그걸 찾아야지. 나도 잘은 모르지만, 아마 지훈씨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싶어.]
“지훈씨와 관련된 거라니?”
[확실친 않지만, 우린 이혼하려고 했었잖아. 근데 이혼하려던 날 사고 때문에 이혼을 결국 못했구. 그런 것들이 풀지 못한 매듭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
“그럼 지훈씨랑 이혼을 마무리지어야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는 거야?”
[이혼을 확실하게 하든가, 아니면 화해를 하든가 둘 중에 하나겠지···]
지은은 한숨을 푹 내 쉬었다.
‘이거 참,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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