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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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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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5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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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3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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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0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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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 23. 마녀의 요람

DUMMY

베니드렌을 빠져나오는 바닷가를 거닐며 이름이 없는 작은 마을로 도착하면, 딱히 배의 크기를 가리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게끔 적당하게 다져진 항구가 여행자들의 새로운 발걸음을 단단하게 받아주었다.


해변에 도착한 노인들의 복엽기에서는 앞날개의 거센 바람에 진한 흑자색 로브를 휘날리는 노파가 같은 나이가 될 법한 그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있었다.


"끌끌.. 여기라도 데려다줘서 고맙구려. 곧 내 고향에 축제가 있을진대, 당신들은 관심 없수?"


"저응비.. 허야 지요.. 홀홀.. 소온주드을도 보오고.."


"허긴.. 우린 언제 강을 건너도 이상하지 않을 때이니, 더욱 가까운 것을 자주 보는게 좋을지도 모르겠소. 뭐, 올해만 하는 것도 아니니 생각나면 찾아오시구려."


노인들은 기름과 가족의 선물을 사기 위해서 잡화점으로 자리를 옮기며 노파에게 작별 인사를 보냈고, 그녀 또한 로브의 넓은 소매에 가려진 팔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여행길을 찾아서 등나무가 우거진 그늘에 앉으며 새로운 이동 수단을 기다렸다.


갈매기는 새하얀 모래 위로 얕게 깔린 바닷물에 내려앉아서 부리로 헝클어진 날갯죽지를 다듬었고, 마을 사람인지 여행객인지 모를 사람들은 바짓단을 접어 올리고 그 주변을 천천히 걸어 다녔다.


"후우.. 후우.. 다음엔 그냥 돈이 좀 더 들더라도 사람을 써야겠어. 이 짓도 3년이 넘어서니까 더는 못 해 먹겠군."


북쪽으로 향하는 정기선의 짐칸에 거무튀튀한 채소를 그물에 실어서 올리던 청년의 가슴 쪽은 땀으로 흥건했고, 선원옷을 입고 있던 사람은 수량이 맞는 걸 확인한 후 그에게 짧은 위로를 건넸다.


"인기가 많아서 그런지, 매번 재고를 적게 안고 오시는군요. 매번 이렇게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멀리서 봐도, 단단하고 튼실해 보이는군요."


"으윽.. 다음 해부터는 양을 줄이던가, 사람을 구하던가 확실하게 정해야겠습니다. 튼튼하기에 마구 집어던져서 담았지만 그래도 온몸이 쑤시는군요."


"하핫~ 올해도 즐거운 축제 되시길 바랍니다. 많은 사람이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어요. 귀엽고 예쁜 것들도 좋지만 아무래도 먹는 것 만큼 최고인 건 없으니까요. 선실에 계시면 제가 시원한 럼이라도 잔에 가득 부어드리겠습니다."


"꿀꺽.. 크으~ 생각만 해도 갈증이 싹 사라질만한 사례군요. 화로를 빌려주시면 저도 몇 개 꺼내서 구워드리겠습니다."


선원은 선적이 끝난 후 항해준비를 확인하러 자리를 비웠고, 화물칸으로 들어가던 물건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노파는 그에게 다가가서 날을 접어놓은 주머니칼을 불쑥 내밀었다.


"나도 길었던 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네."


"산서의 주머니칼이군요! 저도 종자를 얻으러 잠시 마을을 들렀을 때 본적이 있습니다. 대신, 제가 키우는 것들은 완전 돌덩어리와 다를 게 없어서 무식하게 큰 망치와 톱 같은 걸 부탁했었죠."


"며느리가 즐겨 만들어주던 게 생각나서 훑어보았네. 특히 요즘 이것들을 구해놓지 않으면 좀처럼 구경도 못 하는 처지거든."


"동생 녀석은 거의 흉기처럼 사용했습니다. 수확 시기만 되면 제 등 뒤로 사정없이 던지는데, 좀처럼 사람을 구하지 않는다는 무언의 불만으로 보였거든요."


"여기에 없다면, 지금 안에 타고 있나?"


"아, 그건 아닙니다. 보름 정도 전에 먼저 출발했습니다. 동생은 저에게 이걸 떠넘기는 대신, 참가등록과 간이 매대 제작을 시켜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했거든요. 그리고 올해는 유난히 신경을 썼다고 들었습니다. 돈 좀 써서 반짝이는 간판을 얻어왔다고 했는데.."


"그래도 난 아직 향초가 좋다네. 깊은 잠을 자는데 그것과 견줄만한 물건은 딱히 보이질 않거든."


"동감입니다. 저도 오히려 요란한것 보다는 자연스러운 게 좋은데 말이죠.. 아직 삶의 여정이 길어서 아쉬울 따름입니다."


"끌끌... 새롭고 재미있는 일들을 자네의 시대에서 볼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늙은이에게 부러움으로 다가온다네."


"먼저, 올라가시죠. 저는 말과 수레를 맡기고 타겠습니다."


"좋은 여행하게나. 우리의 요람에 축복을 내려주는 자여."


노파는 지하 2층의 선실의 해먹에 몸을 눕히고 보라색으로 물든 작은 향초에 불을 붙였다.


평범한 것보다 크기가 작지만 몸이 뜨거워지면 어느 간식보다 달콤해지는 단호박은 의기양양하게 속이 꽉 차 있었다. 그것 중 몇 덩이는 그물에 뚫린 구멍 사이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이번엔 어떤 녀석들이 큰 사고를 터뜨려주려나. 뭐.. 난 구경이나 하고 누런 과육이나 나눠주면 그럭저럭 그들의 위로가 되겠지."


청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곤 빈 수레를 몰아서 보관소를 향했다.


* * *


트란실바움, 타문하르트, 코반을 가로지르는 베르딘 대륙의 위쪽으로 벗어나면 새로운 대륙이 굵직한 인사를 건넸다. 베미보아는 국가 톨디바이에 속해 있었고, 마지막으로 폰다사막을 서쪽으로 횡단하면 순례를 무사히 마쳤다고 알려주는 점성술사들의 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


노파가 굳이 머나먼 여정에서 부유지를 찾아간 것은 그 대륙에선 보기 힘든 장소였고, 뜻하지 않게 마을 사람들의 권유를 받아서 가본 것이 신비한 인연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표지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말썽꾸러기 유령들이 살지도 모른다는 마을답게 베미보아는 이름의 이중성을 담고 있었다.


전력장치를 도입한 시기가 얼마 되지 않은 것도 한 몫 했지만, 한 해 정도의 적당한 수명과 개똥벌레를 한 움큼 쥔 정도의 불빛이 그럭저럭 쓸만하다는 호박석은 마을 주변에서만 맺히는 식물성 광석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름의 본래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호박'은 자라는 게 영 시원치 않았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받아오거나 한 해에 한 번씩 그것을 기념하는 축제를 열었다.


모래 위를 달리기에 적합하도록 넓은 나무판자를 대서 만든 썰매에는 물건을 요청한 각지의 교역소를 위해 진한 녹색으로 보이는 호박석이 가득 담겨 있었고, 거대한 몸집을 가진 동물이 이따금 작은 움직임을 보일 때면 자극을 받은 돌들이 은은한 빛을 띠었다.


"후우~ 물량이 엄청나네요.. 평소처럼 셀디노트까지 나르면 되나요?"


"아닐세. 이번엔 벨포잔 쪽에서 물건을 받겠다는군."


"네?! 거긴 습지를 지나서 가야 한다구요. 이 모습으로 갔다간 열병에 걸려서 돌아오는 길엔 제가 실려 올 겁니다!"


"푸하핫~ 하지만 비벤이 새벽에 먼저 출발해 버렸다구. 자네, 이번엔 한 방 먹었어!"


"빌어먹을.. 이 일이 끝나면 아주 죽여버릴거야. 으아악! 비벤~"


폰다의 배달꾼은 보통 동쪽으로 끝까지 가로질러서 셀디노트에 도착하면 가볍게 일을 끝낼 수 있지만, 사막을 벗어나는 일이 생기면 가장자리의 근처에 있는 마을에 들려야 했다.


그들에겐 썰매의 물건을 평범한 수레에 옮겨서 거대한 습지를 뚫고 남부를 향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었지만, 그보다 남부를 꺼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도착하면, 다른 대륙에서 온 사람이 자넬 기다리고 있을걸세."


"아~ 아예 절 죽여주시죠. 가는 김에 혹까지 제대로 달아주시네요."


"손님 앞에서는 좀 웃어주게. 자네들을 보려고 은근슬쩍 상단을 찾는 이도 있을 정도니 말이야. 이것도 꽤 짭짤하다구."


"흥, 감자나 드시죠!"


그는 중개인에게 오른손으로 반대쪽 팔뚝을 짚으며 움켜쥔 왼손을 치켜들었다.


"크으~ 작별인사도 귀엽구만~!"


말랑말랑한 육구를 치켜든 그는 자신의 몸보다 몇 배나 큰 썰매에 뛰어올랐고, 천으로 둘둘 감아놓은 모자를 눌러쓰자 짧은 삼각형 귀가 날카롭게 비집고 나왔다.


그렇게 모래빛 털이 북슬북슬한 괭이는 길게 늘어진 줄을 가볍게 흔들었고 입이 찢어지라 크게 하품만 하던 동물은 겉모습과 대조적으로 빠른 출발을 알렸다.


습지를 지나는 그의 모습은 매우 짧게 쳐낸 털과 바람이 잘 통하는 어린이용 튜닉으로 바뀌긴 했지만 변함없이 끈적하게 달라붙는 땀은 그의 불쾌감을 한껏 돋구었다.


"베리포말의 노래가 들리는 것 같기도.. 젠장! 정신이 너무 혼미해. 열이 빠지질 않는다구."


그는 무의식적으로 채찍을 흔들긴 했지만 미리 대비해서 묶어놓은 몸은 겨울날 모슬렉에서 날리는 연처럼 펄럭거렸고, 이어달리기의 막대를 받은 2마리의 말은 남부에 위치한 항구를 향해서 상쾌한 바람을 갈랐다.


* * *


"크르르으.. 고향.. 요리.. 다.."


"푸흡~ 자.. 잘 먹겠습니다. 꿀꺽~ 우아아악! 너무 매워~ 무우울!"


거대한 여객선의 갑판에서 친의 고향 요리를 한 입 먹은 그는 붉고 퉁퉁 부은 입술로 얼음물이 가득 들어있는 나무잔을 연신 들이켰다.


용인은 음식을 건네주고 생각보다 좋은 반응이라고 여겼는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새.. 새로운 영감을 얻으려고 여객선에 올랐는데, 시작부터 아주 화끈하게 터지는군요."


"그렇죠?! 그렇죠?! 저도 의뢰를 받고 마을을 찾아갔을 때 얼큰하게 당해버렸다구요~"


"그.. 그것도 그렇지만 생각보다 그 쪽분이 험난한 일을 하시나 보군요.. 손바닥에 구멍이며.. 몸에 성한 구석이 없으시니.."


"우움.. 저건 그냥 최근에 큰 사고를 당하셔서 그렇데요. 고향에서 하시는 일은 아~주 작은 걸 만들어서 팔거나 콩으로 음식을 만든다고 들었어요!"


"후우.. 아흐으.. 저는 '피델 요제프'라고 합니다."


"루민이에요~ 루민! '루민 파미데르'라구요~ 친으로 떠나는 의뢰인의 통역을 맡았어요!"


"크르.. 난.. 왕..롱..이다.."


"제가 아는 녀석의 친구와 이름이 비슷하시군요.. 아, 그리고 저는 항구에 도착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적당한 마을을 물어볼 생각입니다."


"호오~ 아직, 오늘 나온 신문을 안 보신 모양이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그리 꼼꼼한 편이 아니라서.."


"베르딘의 국왕님이 새로운 마을을 만드신대요~ 아직 완성된 건 아니지만 꽤 많은 사람이 찾아가고 있다구요!"


루민은 세게 움켜쥐어서 완전히 구겨진 두루마리를 넓게 펼치며 자랑스럽게 내밀었고, 피델은 거대하게 부서진 유적지와 터져 나오는 지하수 사이에 희비가 엇갈리는 표정으로 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베르딘의 새로운 칙명! 타문하르트의 아들이 생긴다? 새로운 온천 도시 '펠라하임' 하몬의 의지를 받들어 새로운 시대를 열다.'


피델은 부어오른 얼굴에 부채질하며 찬찬히 읽어내려갔고 루민은 드센 기운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팔짝팔짝 뛰었다.


왕롱은 그 일에 조금 아쉬움이 남았는지 짧게 깎은 손톱을 긁어서 향초에 댄 후, 시야를 밝혀주곤 바다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니면~ 이미 여기에 타셨으니까, 저희랑 같이 베미보아로 가는 게 어떠세요?"


"그.. 머나먼 여행을 떠난 자들을 축복해준다는 축제.. 말입니까?"


"생각보다 그리 고리타분하진 않을 거예요~ 여왕님과 점성술사들이 특별한 행사를 연다고 하셨거든요."


"행사요?"


"최근에 자신을 엄청난 마술사라고 소개한 도둑이 쌀과자 공장에 도전장을 보냈어요. 여왕님의 입맛을 겨냥한 과자 말고도 다양한 과자가 만들어지길 희망한다며 축젯날이 되면 시원하게 창고를 털어서 온 마을에 뿌리겠다고 엄포를 놓았거든요."


"현상금을 걸었나요..?"


"으음.. 비슷하긴 한데 특별한 선물이라고 들었어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며 노랗게 바랜 호박석이라는데~ 대신, 도둑질이 성공하면 그에게도 줄 생각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그럼, 저분은 그 일로 가시는 겁니까?"


"아~ 그건 아니에요! 광장에 우뚝 서 있는 종탑으로 가셔서 엄청~ 큰 시계를 달아주실 거에요. 이런 일은 본인도 처음이라 긴장감을 무시할 순 없다고 하더군요."


"엄청, 시끌벅적한 축제가 되겠군요.."


* * *


노파는 주머니칼을 꺼내서 속을 파낸 단호박의 얼굴에 기괴한 미소를 새겨주며 머리에 고깔모자를 씌워주었다.


해맑게 웃으며 일기장을 검사받은 퀴노아는 호박과 비슷한 표정이 된 포디반의 이마에 '참! 잘했어요.'라는 감자 도장을 큼직하게 찍어주며 기공식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푸흣~ 살아있는 망자에게 위로를!'


그렇게 한 해 여름의 마지막을 장식할 베미보아의 대축제는 괴짜들의 대행진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 * *


내가 신들의 정원에 도착했을 때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것은 새하얀 천이 파도를 타는 넓은 들판뿐만은 아니었다.


튜닉과 반바지의 고장답게 기묘한 문양으로 물들어가는 저녁노을과 홀씨를 맞으며 주변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한껏 내 마음을 띄워주었기 때문이었다.


도서관의 곤돌라는 친에서 본 그것보다는 아주 작았지만 데일하르의 기술자들이 세심하게 이어받은 기술이 아쉬운 평가를 받지 않도록 제구실을 톡톡히 해주었다.


"비르마스 부유지에서 오셨다구요? 잘 찾아오셨습니다. 마침 친에서 교환으로 들어온 새로운 고서들이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그.. 혹시 같은 재질로 표지를 만든 작은 동화책도 거기서 왔나요?"


"으음.. 역사서가 아니라면 동화를 잘 아는 서기들에게 여쭤보시는 게 어떠신가요?"


"흐흠.. 죄송합니다. 새로운 관심사가 생겨서요."


바다향이 물씬 풍기는 색을 품은 사서들의 그림자를 따라 1층에 주르륵 늘어진 부서를 보았을 때는 생각보다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늘 쪽으로 큰 통풍구를 만들고 도서관의 이파리 사이로 조금씩 들어오는 햇살은 작은 창문들이 따스하게 받아주고 있었으니까.


"'케프러스' 입니다. 주로 어린아이나 마음의 성숙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관리하고 있어요."


"그.. 혹시 대나무 종이로 겉을 감싼 오래된 동화책을 알고 계신가요?"


"흐음.. 아, 그 개구리 책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요!"


"외관을 빼면 그리 특별해 보이진 않는 물건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끝부분이 뭔가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다음에 또 알려주겠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건, 어쩌면 일기장 같은 걸지도 몰라요. 저도 그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그럼, 여기에 그 새로운 부분이 담긴 책을 소장하고 있나요?!"


"글쎄요.. 쓴 사람이 매우 다양한 일을 한다고 들었어요. 아직은 소식이 없네요."


"아.. 그렇군요."


그녀는 무언가 알고 있는 듯 얕은 미소를 보여준 후 동료로 보이는 사서에게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벌써, 점심인가?


대나무로 만들었다는 자전거를 빌렸는데 독특한 향이 났다. 친에서 많이 자라는 옻이라는 나무로 만든 기름으로 마무리를 줬다고 했는데..


한 손에는 오늘 나온 달걀에 옥수수, 양상추, 토마토가 들어갔다는 샌드위치를 들고 있었지만 폭이 넓은 바퀴는 불안정한 내 자세를 생각보다 잘 받아주었다.


"우물우물.. 색이 아주 잘 나왔네요. 혹시, 베미보아에서 들여온 호박석으로 물들인 건가요?"


"아뇨, 그건 단가가 매우 비싸서 염료로 쓰기엔 부담이 있어요. 붉나무 열매라면 조금씩 사들여서 그림을 더해주긴 하지만요."


"그렇군요.."


"주로 옻이나 쑥을 즐겨 쓰고 있어요. 특히 쑥은 마을 주변에서 잡초가 기죽을 만큼 풍성하게 자라거든요. 그리고 당신이 말한 것을 조금이라도 사서 쓰기에는 맞지 않는 속성이 한층 더 사용을 피하게 만들어요."


"속성이요?"


"따끔거리는 기운이 몸을 자주 타기에, 편하게 입어야 할 옷들을 못쓰게 만들거든요."


"따끔이라.. 으음.. 그걸 물감처럼 개어서 썼다고 하셨죠?!"


나는 묽은 황토가 가득 묻은 그 엘프 여인의 팔을 무의식적으로 세게 움켜잡았고, 화들짝 놀란 상대방은 보름달 같은 눈동자로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었다.


그것과 비슷한 기운은 몇 배로 강하게 내 관자놀이를 때렸고 그 주변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처럼 크게 웃음소리를 내며 뛰어다녔다.


"저.. 정신이 나간 건가..? 저런 병에는 약도 없는데.."


금보다 비싸다는 구리를 타문하르트에서 구해오기는 여간 쉽지 않았다. 수도의 지원을 받던 새카만 베리더미도 조금씩 받아서 썼을 정도니까..


그런데 그게 잘 흐른다고?!


소각장을 찾아가서 다 쓰고 버려진 호박등을 팔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아저씨는 생각보다 시큰둥했다.


"버리는 물건인데 무슨 염치로 돈을 받고 팔겠수? 필요한 만큼 가져가시게."


마음 같아선 드워프들이 쓴다는 대형 수레를 빌려서 모두 가져가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가야 할 곳의 거리와 내가 몰고 다니는 허름한 비행정의 적재량은 험악한 자세를 취하였기에 갈대로 엮은 과일 바구니에 소복하게 담는 정도로 만족했다.


"우리는 오래된 물건을 찾아서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박물관이지. 고물상이 아니라구!"


"새로운 것이 있기에 낡은 것이 생기는 법. 너무 야박하게 굴진 말아줘."


나는 동료의 따끔한 잔소리를 들은 뒤, 동화를 만든 그 사람을 위해 대나무로 얇게 만든 붓을 들고 새로운 답장을 써내려갔다.


* * *


'반드시 모셔와야 해요~ 드워프들을 도와줄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까!'


간곡한 부탁을 받은 두 사람은 으스스한 습지의 분위기와 오묘하게 들어맞는 옷을 입은 모습으로 문을 두드렸다.


똑똑..


"뉴우우.. 계신가요?"


"..."


거대한 버섯 모양으로 만들어진 기묘한 집은 주변의 호수에서 들려오는 개구리의 소리라도 듣고 싶었는지 긴 침묵을 유지했다.


"우사기씨, 제가 한번 확인해 볼게요!"


"뉴우.. 남의 집인데 함부로 열면.. 뉴우우욱~"


"으아아악~"


우르르르~


모슬렉의 대장간처럼 창고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그 건물은 기도가 막혀서 대답을 못한 것처럼 시원하게 돌덩이들을 쏟아냈다. 굴러떨어지는 충격을 받아도 빛이 더 나오지 않던 그것들은 새로운 방문자에게 감동했는지 격렬하게 덮쳐왔다.


"우으윽.. 누가 좀 살려줘요~"


"뉴우욱~"


"쿨쿨.. 음냐음냐.. 고오옫.. 나아~ 갈게요.."


성공적으로 침입자를 무찌른 집주인은 양쪽 눈 밑에 검은 반달이 늘어진 모습으로 침대를 부여잡다가 환하게 들어오는 햇빛을 거부하려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나무로 조악하게 만들어진 고블렛은 구멍 난 집의 삿갓에서 떨어지던 아침 이슬을 다 받았는지 투명하게 반짝이는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고, 허름한 옷장에서는 코반의 편지나 오래된 신문들이 한데 뒤엉켜 소박한 선인장으로 자라 있었다.


"으으.. 이것들이 왜 여기 있는 거야?! 광물 창고가 없는 건가..?"


"뉴우욱.. 원래, 학자들은 이상한 것에 영감을 받아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다고 하더군요.."


게슴츠레한 눈빛을 내며 일어난 그녀는 돌덩이가 많이 굴러가서 여유가 생긴 문틈을 비집으며 기어 나왔고, 헝클어진 더벅머리와 멜빵바지를 입은 루반과 찌그러진 우사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흐아암~ 죄송해요. 평소에도 청소를 즐기는 성격이 아니라서 폐를 끼쳐드렸네요."


"으윽.. 퀴노아가 편지를 보낸지 두 달 가까이 흘렀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다고 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뉴우.. 비르마스 박물관 / 기술 고문 '페다일 디마커스'씨 맞으신가요?"


"하음~ 복원이나 감정의뢰라면, 다른 사람을 찾으셔도 괜찮아요."


"그 일로 찾아온 게 아니에요. '땅 속성을 독특하게 활용한 세상의 모습을 상상하다.'라는 논문의 저자를 찾아서 온 거라구요. 뉴우!"


"끄응~ 그런 걸 쓴 적이 있었나..?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


"최근에 이 돌덩이들을 재활용하는 방법을 데일하르에서 가르치신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퀴노아는 당신에게 '베르딘의 심장'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한 거라구요."


"음냐.. '타문하르트'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거절할게요. 메데이아 동굴에 비할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지반이 불안정해서 발전소를 지었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요."


"아, 그곳이 아니라 '펠라하임'이라는 새로운 마을에 세울 거예요."


"네..? 그런 지역은 지도에서도 본 적이 없는데요.."


"최근에 트란실바움이 전면적으로 지도를 개편했어요. 완성된 '톨디바이'의 지리와 베르딘에 새로 생긴 마을의 위치가 그려질 거래요."


"이건..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여기는 어떻게 찾아오셨나요? 동료도 제집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는데.."


"뉴우우.. 황금 해파리들이 길을 알려주었어요. 이런 습지에 사람이 산다는 건 저희도 알 리가 없었으니까요.. 뉴우.."


"흠.. 말랑말랑한 인연이네요. 힘들게 오셨는데 좀 앉아서 쉬도록 해요. 호박죽을 좀 만들었거든요."


물푸레나무에서 굵게 뻗은 가지를 잘라서 만든 창문 너머로 주변을 구경하던 두 사람은 밧줄에 몸이 묶여서 흐느적거리는 마부를 실은 마차가 신나게 남부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저.. 저 마부 기절한 거 아니에요?! 말들은 거침없이 나아가네.."


"아! 가끔, 폰다사막을 거쳐서 습지를 지나가는 배달꾼들이에요. '모래바람 괭이족'이라서 이런 환경에 많이 취약하거든요. 그래도 목적지가 한 곳밖에 없어서 말들이 스스로 길을 찾아가니 안심하셔도 돼요."


그녀는 조리용 화로에 올려둔 찜통과 가마솥이 뿜는 증기를 바라보며 루반에게 답변을 해주었다.


"뉴우.. 말에 사람 탄 듯, 사람에 말 탄 듯.. 기묘하긴 하네요.."


"그나저나 두 사람은 왕궁에서 오셨나요? 독특한 조합으로 절 찾아주셨네요."


"엣헴~ 저는 '코반 지질 탐사단'에서 탐사일지를 쓰고 있어요. 최근에 겨우 정식단원 되었죠. 뉴우~"


"모슬렉에서 작은 대장간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부탁받은 호박석을 브뤼알루엔에 전해준 뒤, 이 분을 따라왔죠."


"그럼 여기까지 힘들게 찾아오신 것 같으니 두 분에겐 재미있는 걸 보여드려야겠네요."


입가에 노란색으로 범벅이 된 두 사람은 호기심을 가진 표정을 지었고, 나무 식기를 든 채 천천히 고개를 들자 페다일이 꺼낸 큼직한 판자를 볼 수 있었다.


* * *


오랫동안 버려져서 녹이 심하게 슨 기찻길 조각에 털썩 앉은 보한은 그릇에 소복하게 담아놓은 부럼을 가득 집었고, 아귀 같은 널찍한 입에 털어 넣으며 반대쪽을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우음.. 춘우, 그게 성자의 유품이라고 했던가? 왜 그 청년에게 보내지 않고 이쪽으로 온 것 같나..?"


"으아주~! 죽여주는 걸 만들어주길 바랐나 보네. 푸핫~"


"정말 미안하지만, 그 노인과 자네의 정비부가 품고 있던 딴길로 새는 머리는 알다가도 모르겠구먼. 우적우적~"


"이거 하나 만드는 데만 데일하르가 30년을 쏟아부었어. 따분해서 죽을뻔한 우리들도 마침내 빵~ 터져버렸다구."


"페다일이랑 빌도 이렇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을 거야. 탐사단이 평생을 걸어서 찾아다녀도 볼까 한 그 구슬을 2개나 가지고 있으셨다니.."


"커허~ 막걸리가 죽여주는구만. 하나는 깨졌다고 했나?"


"구리광산 매몰사건에서 장렬히 산화하며 광부들을 구하고 하몬을 넘어서 노인의 손을 잡으러 갔다고 들었네. 참 씁쓸한 일이었지.."


"유연한 철학 '왕롱' / 호박피 '페다일' / 성자의 심장 '모르잔' / 황금 피부 '길쥬르' / 화신의 설계 '엘라하임' 그리고.. 루만티의 기둥 '빌'.. 이게 희대의 연금술이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하여튼.. 노망이 났나, 장광설 퍼뜨리지 말고 작동이나 시켜보게."


비쩍 마르고 지저분하게 수염을 깎은 그는 술기운에 흥이 절로 났고, 에메랄드빛으로 은은하게 깜빡이는 구슬을 그것의 몸속에 조심스럽게 넣어주었다.


관속에 고여있던 호박피는 구슬의 기운을 받았고, 부드러운 흐름을 통해 세밀한 톱니바퀴들의 움직임에 힘을 주었다.


끼릭.. 치지직.. 피이잉..


올빼미 소리만 고요하게 울려 퍼지던 그들의 정적에 작별을 고한 그것은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하몬이 아니에요.. 그리고, 성자가 떠나셨다고.."


보한은 두툼한 양손으로 그것의 한쪽 손을 부드럽게 쥐며 무릎을 꿇었다.


"디니가 안부를 전했단다. 남은 사람들을 잘 부탁한다고.."


"그렇군요.. 이젠, 제가 두 사람의 뒤를 이어서.."


"커허~ 보한, 정말 소문대로 감정을 가지고 있었어. 이 녀석은 두 사람의 품에 안겨서 모든 걸 느끼며 살았던 거야!"


"크흠.. 어떻게 불러주면 좋겠니..? 없다면 우리가.."


"받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투박한 사암 조각들을 버리고 고운 색동옷을 입게 된 그것은 유성우가 조금씩 떨어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잘게 부서져서 찬란하게 빛나는 석영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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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10장 - 50. 떡잎의 시대 +2 20.10.24 38 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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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0장 - 48. 높은 바다가 보이는 자리 20.10.21 25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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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10장 - 46. 금가루 잔향 19.09.30 36 0 18쪽
45 10장 - 45. 묵은 말 19.09.26 31 0 13쪽
44 9장 - 44. 볕 속에서 18.11.07 83 0 18쪽
43 9장 - 43. 하얀 뜰 18.11.05 72 0 26쪽
42 9장 - 42. 소금꼬리밟기 18.11.03 93 0 15쪽
41 9장 - 41. 거푸집 벗 18.11.01 80 0 15쪽
40 9장 - 40. 길잡이의 취향 +2 18.08.05 111 1 20쪽
39 9장 - 39. 차갑게 마시는 독 18.07.19 83 1 14쪽
38 9장 - 38. 밤비단 열매 18.06.21 96 1 24쪽
37 9장 - 37. 갈퀴와 숲밥 18.06.15 100 1 16쪽
36 9장 - 36. 뿌리둥지 나들이 +2 18.06.09 119 1 20쪽
35 9장 - 35. 풀잎향 풍경 +6 18.05.28 138 2 13쪽
34 9장 - 34. 우는 뱀 18.05.21 160 1 13쪽
33 9장 - 33. 거미와 손난로 18.05.18 100 1 22쪽
32 9장 - 32. 숨고르기 18.05.16 83 1 14쪽
31 9장 - 31. 솜송이 18.05.05 99 1 14쪽
30 9장 - 30. 시큼한 쇠수레 18.04.30 123 1 18쪽
29 9장 - 29. 푸른 등불 18.04.28 143 1 15쪽
28 9장 - 28. 허름한 자루 18.04.26 102 1 18쪽
27 8장 - 27. 안개를 걷는 손길 18.04.22 107 1 25쪽
26 8장 - 26. 별 헤는 밤 18.04.16 112 1 16쪽
25 8장 - 25. 변덕스러운 전야제 18.04.13 138 1 14쪽
24 8장 - 24. 콩과 여우 18.04.08 127 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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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7장 - 22. 꿈꾸는 일기장 18.03.28 120 1 17쪽
21 7장 - 21. 말괄량이의 부탁 18.03.23 118 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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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6장 - 16. 테라바시아 18.02.23 153 1 15쪽
15 6장 - 15. 찻잔 너머 그 무언가 18.02.21 139 1 14쪽
14 6장 - 14. 가득 담긴 사탕과 버섯 18.02.19 168 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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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장 - 1. 나그네 +8 18.01.25 1,697 10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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