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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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닭
작품등록일 :
2018.01.25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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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3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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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1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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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 33. 거미와 손난로

DUMMY

폐부에 들어앉는 공기가 흐릿한 정신에 자극을 줄 때가 찾아오고, 얇게 얼어붙은 강줄기는 헤엄치는 녀석들의 고요한 성벽이 돼주었다.


움직임이 둔해진 곰도 조금은 걱정이 앞서서 그랬을까, 일꾼들의 보금자리를 다락방으로 옮겨주었다.


칼바람이 하나밖에 없는 창을 두드리자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요동쳤으며, 괭이는 뜨거운 우유에 혀가 말렸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지주의 아내는 '눈꽃물레'라는 작고 보잘것 없는 유산을 남겼고, 그것은 누구라도 자신을 써주길 바랐는지 터덜터덜.. 푸석한 소리로 반가움을 나타냈다.


새하얀 구름은 가늘고 질기게 늘어져서 나무봉을 타고 먹음직스러운 솜사탕을 연상케 해주었다.


첫 마디는 기다란 혓바닥이 붙였다.


"급한 일이 생겨서 나갔다고 했지?"


"자기보다 더 위에 있는 사람이 부른다고 헐레벌떡 뛰어나가던데~? 잠옷 차림에 '바람막이'만 뒤집어쓰고 정신없이 뛰어가더라. 오래간만에 나도 한참이나 웃었어."


"그럼, 내려가서 점심거리 좀 찾아보자."


"흐흐~ 어디, 우리가 일용할 양식이 그동안 잘 지냈으려나?"


사실 부엌이라 부르기에는 빈약한 감이 없진 않았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언제 읽었는지도 모르게 쩍쩍 달라붙은 책자가 낮은 함에서 숨을 죽였고, 창밖으로 보이는 밑동은 손도끼에게 약혼을 받았는지 수줍게 장작을 껴안고 있었다.


제온은 받침대도 없이 능숙하게 선반으로 올라갔으며, 미셀은 솥단지의 덮개를 살짝 밀어서 향기조차 나지 않음을 직감했다.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나 봐. 식사한 흔적이 전혀 없어."


"흐음..? 하지만, 무능함에 반비례해서 그만큼 성격이 누그러져야 하는 거 아냐? 아니라면 너무 괴짜인데.."


"채소도 말라비틀어지거나 썩은 것 밖에 없네..."


우당탕탕~ 으악~


"미셀, 할아버지는?"


"근처 숲으로 산책가셨어. 그런데, 주인이 우리 말고 손을 더 받았단 말이야..?"


"글쎄~ 아직도 움푹 패인 계단을 안 고칠 정도면 전혀 찬성할 수 없는 의견이야."


혹여나 도둑이라도 들었을까, 두 사람은 주걱과 밀대를 각자 나눠 들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받침대를 두고 벽장에 올라선 그것은 헐렁하게 늘어진 잠옷을 입고, 추위를 피해 보려고 무언가를 찾는 어린아이였다. 콧물이 흐르는지 연신 훌쩍였고, 두 사람의 인기척에도 그다 신경 쓰는 느낌이 없었다.


"누.. 누구지?"


제온은 푸른색 눈동자만 소리 없이 굴리며 연신 동료를 훑었고, 미셀은 머리만 긁적이다가 그의 무기를 거뒀다.


"아들이겠지. 안사람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자식 하나쯤 없다는 건 드문 일이잖아. 그리고 받침대는 더럽게 허술하니까 옆에서 받쳐주기나 해."


"분부가 있겠습니까~? 그리하지요. 우리의 여왕님."


듬직하게 불쏘시개를 찾아서 벽난로를 서성이는 그의 모습은 제법 능숙했고, 이내 웅얼거리다가 고개만 갸웃거리며 두 사람을 가리켰다.


제온도 또한 같은 자세로 미셀을 응시했다.


"그, 다음은?"


"장작이랑 뭐.. 부싯돌이 필요한가 봐. 제온, 장작 좀 가져와줘. 난 궤짝에서 잡동사니를 뒤져볼게."


"장난이지..? 눈이 내 허리만큼 쌓였다구!"


"가운데 자리는 비워줄게. 작업복도 젖을 테니까 몽땅 벗고 갔다 와."


"인간에게 그런 말을 통용했다면 너... 그거 꽤 심한 인격모독이야."


불구덩이 앞에 수북하게 쌓여있던 모래와 잿가루 더미는 꼬챙이들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헛간에 숨겨져 있었던 감자, 고구마, 옥수수는 볼품이 없긴 했으나 나름 자태를 뽐냈고, 부엌에서 가져와 바닥까지 박박 긁어서 얇게 펴 바른 버터는 열기를 타고 세 사람의 입가를 촉촉하게 만드는 마술을 부렸다.


"호아~ 호아~ 어우, 으어워요.."


"천천히 먹어. 뺏어 먹을 사람도 없으니까. 제온, 고생했어."


"우물우물~ 다들 조금씩 바꿔먹자."


담백한 만찬을 마친 세 사람은 성한 곳이 없었기에 솜 덩어리와 볏짚이 삐져나온 방석 의자에 줄지어 앉았고,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쓴 채 오래된 신문이나 책자를 끄적였다.


"둘이 살아?"


"훌쩍~ 네에~ 엄마는.. 아빠가, 잠깐 먼 곳으로 갔다고 하셨어요."


"씩씩하네. 앞가림도 할 줄 알고. 기특한걸?"


"그리고 아빠가 돈을 많이 모으면 보그덴트에 집을 살 거래요. 여긴, 너무 춥다고 하셨거든요. 훌쩍~"


"어쩐지, 짜게 굴더라니. 우리 얘긴 없었어?"


"우웅.. 훌쩍.. 꼭 데리고 갈 거라 하셨어요. 거기에 가면 맛있는 것도 듬뿍 사주고 예쁘고 깨끗한 옷도 입혀줄거라 했구요.. 훌쩍~"


제온은 따뜻하게 녹아 말랑해진 육구로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자신의 소감을 짧게 밝혔다.


"미셀, 나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 촉촉하네."


"글쎄.. 아까 곰주머니에서 들려오는 한숨 소리에, 다들 사이좋게 땔감이나 안 되면 다행이지 싶은데."


"훌쩍.. 무슨 얘기에요?"


"몰라도 돼. 정 안되면 누군가 삥땅 친 거라도 다시 뜯어야겠지."


"뭐라구? 왜 나만 가지고 그래. 크흠.. 나 그 정돈 아냐. 그중에 절반은 부업으로 챙긴 거라구."


"네~ 어련하시겠어요?"


"크흑.. 정말, 너무하네."


꼬마의 한쪽 팔에는 투박하지만 조밀조밀하게 깎아낸 나무 팔찌가 조금씩 보였고, 그것은 희미하게나마 그의 이름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되게 오래전에 쓰던 글자네.. 잠깐, 잠깐~ 이 정돈 나도 읽을 수 있어. 기다려 봐."


"뭐? 제온, 너 언제 그런걸 배운거야..?"


"언덕 위의 사원에 놀러 다닐 때, 벽 너머로 드문드문 배웠지. 쓰는 건 뭐.. 어림도 없지만, 읽는 건 꽤 괜찮다구."


북슬북슬한 손등 위로 뭉툭하게 깎아내린 손톱은 그것을 천천히 훑었다.


"뒤에는 잘 모르겠고... 보자, 앞에 글자가 르..오.. 브어.. 트.. 으! 엣헴~ 맞지?"


"뭐라는지 전혀 모르겠거든요~ 어휴, 믿은 내가 무지렁이지."


괜히 머쓱해진 괭이는 머리만 계속 긁적였고, 뭔가 보여줄 게 있다고 붕붕 뛰던 어린아이는 허름한 종이 모자와 나뭇가지를 들고 와서 헛기침을 했다.


"제가 크면, 꼭 하고 싶은 게 있어요. 콜록.. 아버지는 어려운 사람들을 거두어서 도와주었으니, 저는 나중에 크면 아버지도 지켜줄 수 있도록 튼튼한 기사가 될 거예요~! 훌쩍.."


"푸엣취~ 뭐? 기사? 미셀..? 우읍.. 읍.."


(됐어. 지금이야 귀족들끼리 돌려먹긴 하지만, 아무렴 어때? 한참 뒤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진 아무도 모른다구. 그냥, 그러려니 해줘.)


(그래도.. 왠지 우울하네. 아무튼, 힘내~! 나중에 혹여라도 변한 게 없다면 나라도 위로해 줘야겠어.)


나중에 돌아온 지주는 온몸에 멍이 들고 무언가로 지졌는지 팔에서 탄내가 비릿하게 풍겼다. 그러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심술 난 두꺼비처럼 볼을 살짝 부풀렸다가 널찍하게 입을 열었다.


"아이고~ 녀석들, 아주 난장판을 만들어 놨구만! 간만에 고기 좀 얻어왔구만. 아이구~ 우리 하인켈가의 큰 도련님, 아빠가 뽀뽀~ 해줄게."


눈에 선명하게 찍혀있던 괭이의 손도장은 점차 모슬렉으로 나아가 희미한 발자국이 되었으며, 블리보슈타인을 힘차게 도약하려는 기차의 열기로 폐선로 위에 천천히 녹아들었다.


* * *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풍경은 철조망에 가혹한 냉기가 결실로 맺혀 자라난 고드름들이었고, 베르딘과는 또 다른 거대한 만화경이었다.


거대한 늑대들은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며 낮게 달리던 광차들의 거친 행렬이 아니라, 조금은.. 아니 너무도 대조적인 우아함으로 무장한 여행용 객차가 설원을 헤치며 달려갔기에 매우 황당하다는 눈치였다.


철커덩~ 철커덩~


"으음~ 간식 좀 들어요. 짐칸에 화로도 넣어와서 방금 끓인 홍차는 우리 또한 따뜻하게 만들어 줄 거에요."


"크흠.. 이것 참, 달콤살벌한 다과회네요. 여왕님, 다른 손님들은 생각보다 우리 쪽을 예의주시하는 기분인데.. 맞죠..?"


"푸핫핫~ 이거이거, 완전 상식을 깨는 상황이구만. 누가 보면 평범한 겨울 여행으로 착각할 정도네. 특히, 이 쌀과자도 아주 담백한 게 마음에 들어."


식당차의 오래된 목재 바닥은 시간의 힘에 뒤틀려서 꽤 고상한 느낌을 자아냈지만 원형 탁자에서 의도치 않게 만국회담을 열게 된 세 사람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온기가 몸을 움츠린 객차의 입구와 짐차, 그리고 기관실은 철제 무기를 단단히 부여잡은 괭이들이 식당차를 중심으로 경계를 나섰다.


기관실에서 삽으로 석탄을 채우던 기관사는 한겨울인데도 이마에 굵은 땀이 흘렀으며, 곧 동굴이 나타날 거라는 신호를 주기 위해 경적용 끈을 연거푸 당겼다.


"영감님, 고생이 많으십니다."


"케피는 아예, 손사래를 치더군. 여기에 비하면 불구덩이는 완전 애들이 웃어넘길 만 한 놀이터랬나? 끙차!"


"얘기는 간략하게나마 들었습니다만.. 아직, 몸에 힘은 잘 들어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겐 평생 일어나지도 않을.. 그런 일이잖습니까?"


"푸흐~ 콜록콜록.. 이하동문이네. 그 망할놈의 대문만 따러가는 게 아니었다면, 대꾸도 안 했을 거야!"


"문, 말씀입니까? 그건 또 무슨.."


"별거 없네. 그냥 문이야. 아주 무식하게 큰 문. 그건 기회가 되면 나중에 또 얘기함세.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손에 힘이나 풀지 말게!"


가볍게 수신관을 열어젖힌 드워프는 심술과 한숨을 한데 섞은 칵테일을 만들었고, 경계의 중심이 되는 식당차를 향해 소리쟁반을 거칠게 날렸다.


"아아~ 잘 들리십니까? 오늘도 데일하르의 열차를 이용해주시는 손님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임시로 노선이 편성된 지옥행 눈꽃열차는 곧 산맥의 허리로 향하는 메디악 동굴을 통과할 예정이며, 혹시나 야생동물들이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무수한 악수의 요청을 보내도 당황하지 마시고~ 그동안, 잘 갈아놓은 칼날로 친절히 응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상!"


빠아아아아앙! 푸화아아악~


방녹용 도색을 하지않아 구릿빛으로 눈 속을 가르던 열차는 새하얀 눈으로 거대하게 막혀있던 동굴 쪽 선로로 거칠게 들이 받았다.


그리고 충격으로 남은 두 사람이 찻물을 엎지르는 동안 퀴노아는 미동도 없이 찻잔을 유지했고 눈꺼풀을 여전히 감고 있었다.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나, 어느새 열차에 있던 손님들은 천천히 일어서서 무언가를 맞이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럼, 다들~ 살아서 만나요!"


쿠웅~ 쿠웅~ 카아..카가가가각! 쨍그랑! 쨍그랑~


곧 객차의 천장이 여기저기서 움푹 패더니, 마치 찬란한 보석을 정교하게 깎아놓은 예술품처럼 생긴 거미들이 거침없이 차창을 부수며 뛰어들었다.


"키류류우웃! 크웨에엑!"


퓻~ 퓨욱! 퓻~


탁~ 탁~ 탁~?


퀴노아는 나무쟁반으로 날아오는 수정침들을 재빠르게 막아냈지만, 묵직한 일격들은 가볍게 쟁반을 뚫고 반 정도 튀어나와 그녀의 목덜미에 시큼한 인사를 보냈다.


"꿀꺽.. 그보다.. 으아악~ 너무 추워! 정중하게 문으로 들어오란 말이야!"


"공주님, 앞 칸을 향해 계속 달리십시오. 저라도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겠습니다!"


무덤덤하게 듣고 있던 메데이아는 검지를 살짝 흔들며 반감을 표했다.


"아아~ 그건 아니야. 여기선 모두가 하나지. 사륜마차에 바퀴가 하나 빠진 후, 멀쩡히 달렸다는 얘기가 있다면 난 당장 사서장을 때려치겠어."


"껄껄~ 다들 농담은 집에 가서 따먹고, 서두르세!"


"그르윽.."


덜컹~ 덜컹~ 쨍그랑!


"크샤아앗~!"


콰아앙!


"키에엑~"


주력이 되는 세 사람이 먼저 뛰어간 후, 식당차의 앞문이 닫히자 거미들이 연신 들이박으며 문을 열려고 난동을 부렸다.


칼눈괭이중 보릿대를 물고 있던 노병은 바로 거대한 망치을 휘둘러 앞창으로 기어 나오려는 거미 한 마리를 힘차게 때려 넣었다.


(그르륵.. 마지막 객차는 포기한다. 잘라버려!)


그는 손날로 가볍게 목을 긋는 시늉을 했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괭이들은 지렛대와 망치들을 가져와 연결 부분을 거칠게 뜯어버렸다.


식당차를 점령했던 거미들은 앞차를 향해 크게 도약했으나, 그들이 사정없이 뿌려대는 그물망 덕분에 절벽 쪽으로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남아서 후방을 이어주는 객차는 탑승자의 위치를 숨길 수 있도록 동차의 한계 마력에 맞춘 11칸이었으며, 짐차와 급탄차가 각각 1칸, 그리고 눈으로 덮인 선로를 거칠게 뚫고 나걀 머리 차량이 전체적인 구조였다.


퀴노아는 개구리가 그려진 갈색 가죽 너클을 손등에 채우며 각오를 다졌지만, 괭이들의 파도에 휩쓸려 앞칸으로 넘쳐버렸다.


그리고 '수정 새끼 거미' 들은 산등성이에서 눈덩이를 굴려 오며 끊임없이 쏟아졌다.


"두 사람 먼저 뛰어가세요! 저랑 남은 괭이들이 최대한 시간을 끌겠습니다."


"뭐.. 뭐라구? 마.. 말도.. 꺄아악~"


콰아아앙! 우지지직~ 휘이이이잉~


아슬아슬하게 비켜 갈 줄 알았던 눈덩이들은 뒤에 달려있던 2대의 차량을 연달아 덮쳤고, 급하게 뽑아서 가운데가 허전해진 고정용 말뚝 구멍은 거센 칼바람만이 넘나들며 스산해진 상황을 노래했다.


"앞쪽이 막힐 땐 꼭, 저희 공주님의 가방을 여셔야 합니다! 그분은 아마 투기에 정신을 뺏기셔서... 무작정 주먹만 치켜드실 겁니다."


"너.. 너도 빨리 따라붙어야 해. 알.. 알았지? 계속 뒤돌아볼게!"


"행운을 빌겠습니다, 사서장님."


그녀가 다급히 빠져나간 후 찰나는 목화솜을 길게 짜낸 듯 매우 느려졌다.


째애애앵그으으라아앙.. 콰아아앙.. 콰아아앙..


로버트가 8호차의 끝에서 앞문을 닫는 순간 거미들은 흩날리는 유리 조각들을 헤엄치며 객차로 뛰어들었고, 동시에 그는 위쪽으로 뒤틀린 나무 바닥을 거칠게 뜯어냈다.


그리고 열쇠가 들어가기에는 꽤 거대한 구멍이 나타나자 자신의 검을 거칠게 박아넣었다.


까앙! 철컥.. 기리릭.. 기리릭.. 타캉! 타캉! 타캉! ···


그의 검은 거대한 열쇠가 되어 객차의 구멍을 힘차게 열어젖혔고, 고요하게 앉아있던 의자들은 뒤쪽으로 일제히 뒤집혔다.


"칼눈괭이의 영웅, 그리고 특수부대 초대 단장.. '제온 플라티나 뤼미에르'시여... 저에게도 무리를 지킬 힘을 주옵시고.. 무기력한 퇴로에 들어섬에도.. 뜨거운 유혹이 제 곁을 훑는다고 해도.. 부디 무릎을 꿇게 하지 마소서. 흐아아압!"


피이잉! 피잉! 카아앙~ 카아캉카캉 챙 - 채챙 체 - 엥 ! 휘리리릭~


그는 남아있던 괭이들과 함께 받침대에서 튀어나온 무기들을 나눠 잡았고,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투박하게.. 강렬하게.. 그리고 혹한에서도 달아오를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전투 중에 독침이 박힌 자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은방울꽃'으로 만든 강심제를 허벅지에 찔렀으며, 유예 시간을 가지게 된 심장과 부풀어버린 눈동자는 끊임없이 몰려올 거미들을 향해 굳건한 경의를 담아냈다.


* * *


"이런.. 젠장! 내 쇠뇌도 망가졌어. 하지만, 앞쪽엔 아직도 꽤나 바글바글 하단 말이지.."


"흐압! 다들, 물러서요. 제가 몽땅 물리치고 깔끔하게 길을 열겠.. 우읍~"


메데이아는 한숨을 쉬며 그녀의 목덜미와 얼굴 쪽을 쓸어 담았고, 손쇠뇌를 집어넣으며 말을 붙였다.


"후우~ 토텍스, 이 녀석의 단장에게 들었어요. 말괄량이의 가방에 쓸만한 게 들어있다고 말이죠."


부스럭~ 부스럭~


"허어~ 생긴 게 꼭 복층 도시락같이 생겼구만. 안에선 묵직한 쇳소리가 나고.. 덮개 쪽에 달린 걸쇠엔 끈이 달려있다네."


"아마도.. 설명서 같은 게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건 혹시 모르니까 조심히 꺼내주세요."


"옳거니, 여기 있다네. 그런데.. 이건 깔개로 썼나..? 꽤... 꼬질꼬질하구만."


종이를 넘겨받은 그녀는 잠잠해진 완두콩을 품 안으로 끌어안은 채, 꼬깃꼬깃 접어놓은 딱지를 넓게 펼쳤다.


"그르륵! 오래 버틸 수는 없다.. 좀 서둘러줘!"


거세게 흔들리는 앞문을 막아선 괭이들 중 하나가 버겁다고 판단했는지 다급히 도움을 구했고, 메데이아는 미간을 찡그리며 도무지 정체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이게.. 손쇠뇌 같은거라구..? 보기 전까진 잘 모르겠는걸.. 카트리지는 공주의 허리에 차고 있는 것까지 총 3통.. 여왕, 허리 좀 봐야겠습니다."


"으흐흣~ 너무 간지러워요. 죽음의 고비에서도 제가 숨겨놓은 과자를 찾아내시다니 꽤 엉큼하신데요?"


"그런 건 이 일이 끝나는 대로 원 없이 입에 쑤셔줄 터이니, 잠시만 좀 다물어주시죠."


메데이아는 곧 도시락을 정면으로 높게 눕힌 뒤, 도시락의 허리에 접혀있던 손잡이를 펼치며 자세를 잡았다.


안전끈은 입으로 물고 있있기에 말을 전하기 어려웠던 그녀는 퀴노아를 발로 툭툭 건드렸고, 명령을 받은 완두콩은 괭이들처럼 몸을 둥글게 만 채,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쓰는 사람 빼고... 몽땅 엎드려요!"


덜컹~


"취야아앗!"


"으읍.. 흐압!"


카랑~ 티캉.. 달칵~ 콰아아아앙!


터기지 직전, 기관실에서 미리 엎드려있던 드워프는 화구 쪽으로 담배를 대곤 깊게 들이마셨다가 세상의 끝이라도 본 듯 거세게 내쉬었다.


"후우우우~ 맛이 제법 시큼하니까.. 간만에 녀석들, 혀가 좀 말리겠구만."


일순간 도시락의 바닥을 뚫고 튀어나온 수백 개의 백일홍빛 눈꽃들은 맨 앞에서 독니를 내밀던 거미들까지 한꺼번에 휩쓸어 버렸으며, 거대한 화염과 매캐한 연기도 이에 질세라 앞쪽의 객차를 가득 메워버렸다.


무게와 폭발력의 반작용을 이기지 못한 엘프는 후문까지 밀려나 고꾸라졌으며, 어처구니없는 위력을 실감한 그녀는 또다시 멍해진 표정을 지었다.


"쿨럭쿨럭~ 크윽... 여.. 여왕.. 이건.. 대체..?!"


자욱한 매연을 뚫고 애벌레처럼 꼬물꼬물 기어온 퀴노아는 평소의 모래 괭이들 같이 얍삽한 얼굴로 그녀의 볼을 비비적거렸고, 당황해서 열려있는 그녀의 입가엔 딸기사탕을 두세 알 정도 던져주었다.


"푸엣취~ 음.. 구우.. 슬.. 아냐. 별론거 같아. 콜록콜록.. 그럼, 할머니 집에 갈 때 들고 다니는 '딸기 사탕 바구니' 그렇게 불러주는 게 좋겠어요!"


"껄껄~ 그 누나에 이어서 동생까지 못말리겠구만. 콜록~ 자, 거침없이 나아 가세나!"


"메데이아씨, 제 손을 잡아요.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요. 우리는 계속 나아가야 해요."


"크으윽.. 으그적~ 정말, 당신은 매번 어처구니없는 일만 벌이는군요. 나의 스승만큼이나.. 당신은 미쳤어!"


"대신.. 정신이 곱게 나간 거니까~ 용서해주실 거죠?"


"후우... 정말... 못 당하겠네요."


그녀는 일그러진 웃음기를 보이며 퀴노아의 손을 받아들였고, 일행은 짐차의 앞까지 거침없이 돌진했다.


홍옥을 넘치도록 머금은 기차는 가슴이 벅차올랐는지 광분하여 산맥의 꼬리를 넘어 질주를 강행했다.


그리고, 드워프는 담뱃재를 털어내다가 수정 파편과 피로 범벅이 되어 짐차에 도달한 일행을 차분하게 맞이했다.


"푸하핫~ 다들, 고생은 꽤 했겠지만 결국은 종착역에 다다라야 합니다. 만년설의 머리가 보이면 그녀가 친히 마중을 나올 텐데, 다들 선물은 양손에 두둑이 준비하셨습니까?"


"그건.."


"껄껄~"


쿠우우웅~ 키이이이잉!


서먹한 정적이 아쉬웠는지, 이내 겨울 여행의 끝으로 삼는 종착역이 희미하게 보이자 그것들을 조종하던 거대한 어미 거미가 사납게 뛰어들었다.


"키야아앗! 크슛~ 키슈아앗!"


4호 차는 당장이라도 처참하게 떨어져 나갈 듯 흔들거렸으며, 그것이 올라타고 있는 천장 부분이 반파되긴 했지만 거대한 다리는 차창을 뚫고 단단히 매달려서 앞쪽에 있는 일행을 무리 없이 위협했다.


그리고 객차 쪽에서 살짝 뒤틀린 바퀴는 당장이라도 선로를 벗어날 듯 기괴한 음을 내며 불티들을 쏟아냈다.


완두콩은 그런 상황들을 따라 실소를 터뜨리다가 지열발전소를 맡게 된 누군가처럼 하늘 쪽을 향해 검지를 치켜들었다.


"엣헴~ 여러분, 그걸 꺼내줘요."


"그릉~ 명령을 따르겠다!"


덜컹~ 휘이이잉! 펄럭~ 끼릭~ 끼릭~ 콰앙!


"여왕, 설마 '친'에도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파하핫~ 이거 참! 이젠 나조차도 할 말을 잃게 만들 준비성이구만."


한이 서린 '귀신살'을 한껏 머금고 나타난 화차는 평소, 수도의 관청에서 보이던 것과는 다르게 미묘한 변화를 겪은 모습이었다.


"물론.. 이것 때문에 올해는 꼼짝없이 비황만 잔뜩먹게 생겼지만요. 흐윽.. 괭이분들, 모두에게 방화포를 씌워줘요!"


"무.. 무슨?"


"껄껄~"


"캐피보다 놀라는 게 많으시구만. 저런 개구리 곁에 있으면 자주 있는 일이니, 맘 단단히 잡수시오."


괭이들은 동시에 방화 처리된 망토로 그들을 감쌌고, 퀴노아는 찢어진 여행복을 거침없이 벗어 던졌다.


이내 그녀의 안쪽에선 두껍게 재수선을 끝낸 쌀여우의 두루마기가 그녀를 감싸며 위용을 과시했다.


그리고 그녀는 짐차의 구석에서 자신의 몸집만한 포대를 들어 짐차의 머리로 힘겹게 올라갔다.


거대한 수정 거미는 입가에 소화액을 흘리며 괴성으로 상대를 위협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차분하게 주시할 뿐이었다.


"나 - 알도~ 추우신데!"


타캉! 철컥~ 피유우웅! 피유웅!


"몸 좀 녹이시라고~"


찌이익~


"손난로 좀 만들어 왔습니다아!"


푸화아아악~


화르륵..


콰아앙~ 콰아아아아앙! 퍼어어엉~


은빛으로 새하얀 세상을 뒤덮은 잡금속 가루는 '귀신살'에 달린 화련석과 샐러맨더 모래의 약혼을 받았고, 강렬하게 몰아치는 눈보라와 찬란하게 날아올랐다.


"언니, 나.. 이제야 겨우.. 겨우.. 스스로 나아가려 해. 그래... 반드시 해낼거야!"


곧 모두가 도착할 눈의 신전에 박혀있을 두 번째 성물.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 를 뜨겁게 축복한다는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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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노래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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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11장 - 52. 작은 날갯짓, 큰 손으로 22.10.23 20 0 22쪽
51 11장 - 51. 낡은 봇짐 21.01.05 19 0 18쪽
50 10장 - 50. 떡잎의 시대 +2 20.10.24 38 1 19쪽
49 10장 - 49. 어스름한 항해 20.10.23 25 0 15쪽
48 10장 - 48. 높은 바다가 보이는 자리 20.10.21 25 0 19쪽
47 10장 - 47. 뭉뚝한 뿔과 부리 20.05.01 25 0 15쪽
46 10장 - 46. 금가루 잔향 19.09.30 36 0 18쪽
45 10장 - 45. 묵은 말 19.09.26 31 0 13쪽
44 9장 - 44. 볕 속에서 18.11.07 83 0 18쪽
43 9장 - 43. 하얀 뜰 18.11.05 72 0 26쪽
42 9장 - 42. 소금꼬리밟기 18.11.03 93 0 15쪽
41 9장 - 41. 거푸집 벗 18.11.01 80 0 15쪽
40 9장 - 40. 길잡이의 취향 +2 18.08.05 111 1 20쪽
39 9장 - 39. 차갑게 마시는 독 18.07.19 83 1 14쪽
38 9장 - 38. 밤비단 열매 18.06.21 96 1 24쪽
37 9장 - 37. 갈퀴와 숲밥 18.06.15 100 1 16쪽
36 9장 - 36. 뿌리둥지 나들이 +2 18.06.09 119 1 20쪽
35 9장 - 35. 풀잎향 풍경 +6 18.05.28 138 2 13쪽
34 9장 - 34. 우는 뱀 18.05.21 160 1 13쪽
» 9장 - 33. 거미와 손난로 18.05.18 101 1 22쪽
32 9장 - 32. 숨고르기 18.05.16 83 1 14쪽
31 9장 - 31. 솜송이 18.05.05 99 1 14쪽
30 9장 - 30. 시큼한 쇠수레 18.04.30 123 1 18쪽
29 9장 - 29. 푸른 등불 18.04.28 143 1 15쪽
28 9장 - 28. 허름한 자루 18.04.26 102 1 18쪽
27 8장 - 27. 안개를 걷는 손길 18.04.22 107 1 25쪽
26 8장 - 26. 별 헤는 밤 18.04.16 112 1 16쪽
25 8장 - 25. 변덕스러운 전야제 18.04.13 138 1 14쪽
24 8장 - 24. 콩과 여우 18.04.08 127 1 15쪽
23 8장 - 23. 마녀의 요람 18.04.03 109 1 25쪽
22 7장 - 22. 꿈꾸는 일기장 18.03.28 120 1 17쪽
21 7장 - 21. 말괄량이의 부탁 18.03.23 118 1 15쪽
20 7장 - 20. 불나방패 18.03.07 165 1 26쪽
19 7장 - 19. 돌풍선 18.03.04 123 1 14쪽
18 6장 - 18. 기다림의 끝 18.03.01 143 1 17쪽
17 6장 - 17. 울지 않는 두꺼비 18.02.25 150 1 16쪽
16 6장 - 16. 테라바시아 18.02.23 153 1 15쪽
15 6장 - 15. 찻잔 너머 그 무언가 18.02.21 139 1 14쪽
14 6장 - 14. 가득 담긴 사탕과 버섯 18.02.19 168 1 15쪽
13 6장 - 13. 붉은 장막 18.02.16 154 1 14쪽
12 5장 - 12. 무지개 정원 18.02.14 142 1 20쪽
11 5장 - 11. 구름바다 18.02.10 167 1 22쪽
10 4장 - 10. 빛보라 18.02.06 203 1 17쪽
9 4장 - 9. 안짱걸음 18.02.01 160 3 14쪽
8 4장 - 8. 모래집 왕자 18.01.28 225 3 22쪽
7 3장 - 7. 얼음치레 18.01.27 249 3 15쪽
6 3장 - 6. 뜨거운 길 +2 18.01.26 261 5 14쪽
5 3장 - 5. 보라색 날개 18.01.26 329 4 26쪽
4 3장 - 4. 추운 날 18.01.26 397 4 26쪽
3 2장 - 3. 밤비단꽃 18.01.25 527 3 20쪽
2 2장 - 2. 의뢰 방식 18.01.25 751 5 17쪽
1 1장 - 1. 나그네 +8 18.01.25 1,697 10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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