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염살( 부제: 시선의 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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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us.D
그림/삽화
Camus. D
작품등록일 :
2018.01.29 21:44
최근연재일 :
2018.07.04 07:00
연재수 :
2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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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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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2.26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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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 9. 네 시선이 머문 곳에 내가 있지 않기를

DUMMY

# 9. 네 시선이 머문 곳에 내가 있지 않기를




연일 관련 판례들을 찾아 읽고 정리하느라 눈이 빠질 듯이 뜨겁고 아팠다.


책상 위 반투명한 플라스틱 인공 눈물 용기들이 몇 시간이 흘렀는지를 얘기해 주듯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하율은 안경을 벗고 뻣뻣해진 목을 좌우로 까딱까딱하며 어깨와 목의 뭉친 부분을 풀어보았다.


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 있는 서류들의 무게가 그대로 어깨를 짓누르는 양어깨의 결림이 점점 심해졌다.


손가락들을 맞물려 깍지를 끼고 팔을 쭉 늘려 보았다.



" 으으윽!

집에 가기 전에 팔 좀 몇 번 휘젓고 가야 하나?

에쿠, 몇 시지? "



하율은 앞으로 뻗었던 팔을 깍지 낀 채로 위로 들어 올리며 시선은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 입장이 9시까지였지....... 아마. "



흐릿하게 겹쳐 보이는 초점을 맞추려고 하율은 눈을 찡그렸다.



' 퉁. 퉁. '



양손에 커피를 들고 있는 탓에 준우는 빼꼼히 열려 있는 문을 발로 툭툭 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 이 밤에 또 어딜 입장하려고?

테마파크 야간 입장이라도 하게? "



준우는 커피를 하율의 책상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옆에 놓인 하율의 안경을 집어 건넸다.



" 어, 고마워. "



하율은 안경알에 붙은 먼지를 바람을 불어 털어 냈다.



" 우와~ 향 죽인다. "



하율은 커피의 뽀얀 김과 함께 퍼지는 진한 향기에 피곤한 몸이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마치 커피 액이 아닌 향을 마시는 것처럼 하율은 눈을 감고 천천히 길게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 어디 가냐고 물은 것 같지, 내가? "



" 테마파크 ㅋㅋㅋ.

오늘도 야간 불침번이야? "



안경 유리에 그윽이 서린 김처럼 서서히 입안에 번지는 커피 향을 음미하며 하율은 따스한 컵을 양손으로 꼭 쥐었다.



" 오늘은 들어가야지.

으아앗! 결혼도 못 하고 관부터 짜겠어 이러다가······. "



준우는 팔을 뻗어 힘껏 기지개를 꼈다.


초췌한 눈과 까칠한 얼굴의 준우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하율은 무엇인가 생각인 난 듯 서랍을 열었다.



" 너, 강이안하고 친분이 있더라...... "



준우는 턱을 손가락 끝으로 긁적이며, 스마트 폰을 쳐다보고 있는 하율을 물끄러미 보았다.



" 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어?

설마 기사 난 거야? "



생각지도 못한 말이 준우를 통해 나오자 하율은 허겁지겁 꺼져있던 컴퓨터 모니터를 켜 뉴스 화면을 열었다.



" 둘이 무슨 일이 있었는데 기사 날까봐 이리 허둥지둥 이야?

서....... 얼마 싸웠어?!

그래서 강이안이 폰을 자기가 깼네, 어쨌네 했군.

어, 그런데 보통 싸운 상대방을 집까지 데려가기도 하나? "



" 너는 원래 희망대로 작가를 했어야 했어.

사회적 지위와 이목이 있는데, 강이안 씨가 나랑 싸우겠다? "



하율은 자신의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대로 굳은 듯 멍하니 앉아 있는 준우의 어깨를 손으로 툭 쳤다.



" 지금 갈 거면 자리로 가서 정리하고 나와.

눈 뜬 채로 여기서 잠들지 말고.

꿈에 보일까 무섭다.

너, 멍한 표정은 되도록 서현이에게 보여주지 마. "



" 조심하지 내가.

여기서 더 반하면 24시간 밀착 보호하려고 들 텐데, ㅎㅎㅎ "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준우의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 사람은 역시 적당 시간 수면을 해야 해.

야간 진료하는 병원이 근처에 있던가? "



하율은 손을 좌우로 흔들며 사라지는 준우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커피는 마시기 좋을 정도로 적당히 식어 있었다.


하율은 컴퓨터를 끄며 너저분하게 뒹굴고 있는 플라스틱 용기들을 하나씩 집어 봉지에 담았다.


빠른 손놀림으로 산만했던 책상 위를 정리하다 하율의 시선이 멈춘 곳은 깨진 자신의 스마트 폰이었다.


하율의 집게손가락이 늘 그랬듯 왼쪽 눈썹을 매만지고 있었다.


하율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와 함께 하율의 시간은 되감은 듯 지난 주말로 돌아가 있었다.



" 정리하다 말고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



준우의 투박한 목소리는 하율의 달콤한 타임 슬립을 깨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 야야, 그 깨진 걸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어떡해.

어디 봐 봐! 안 베였어? "



준우는 화들짝 놀라 스마트 폰을 뺏어 자신의 옷 주머니에 넣으며 하율의 손가락들을 자세히 살폈다.



" 으이구, 오버하는 버릇은 못 고치나. "



하율은 잡힌 손을 빼 준우의 주머니에서 자신의 전화기를 꺼내 준우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 액정 필름 붙어있는 거야.

여기 기포 보이잖아, 밥팅아. "



하율의 말대로 잘게 부서진 액정 화면 위로 기포가 여러 군데 보였다.



" 이 필름 업체를 고소할까 생각 중이야 내가.

보호필름이라더니 혹시나 해서 살짝 떼어 보니 필름만 멀쩡해.

액정 보호필름이 아니고 필름 보호필름인가 봐. "



" ㅋㅋㅋㅋㅋ 둘 중 하나라도 보호했으면 된 거지 ㅋㅋ "



준우는 껄껄 웃으며 하율의 전화기를 앞뒤로 돌려 보다 다시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 새 버릇이 생겼냐?

왜 내꺼를 자꾸 네 주머니에 은근슬쩍 집어넣어?

전직하려고 연습 중이야? "


머리를 살짝 옆을 갸우뚱하며 하율의 시선이 빠르게 준우의 눈에서 웃옷 주머니로 옮겨 갔다.


멋쩍은 표정을 짓는 준우를 향해 하율은 손바닥을 내밀며 머리를 살짝 옆으로 까딱여 다시 한번 재촉했다.


준우는 코를 찡긋하며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이다 마지못해 전화기를 하율에게 돌려주었다.


전화기를 가방에 넣느라 시선을 아래로 둔 탓에 하율은 준우의 씁쓸한 미소가 얼굴에 드리워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




계절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흐르고 있었다.


며칠 전의 밤공기와 오늘의 밤공기가 확연히 달라졌음을 하율은 뺨을 스치는 바람의 온도로 느낄 수 있었다.


울긋불긋 사람의 불빛들 속에 노란 개나리와 분홍빛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 아까 대답을 못 들은 거 같은데, 강이안 씨 얘기 뭐야? "



평소와 다르게 아무 말 없이 운전을 하고 있는 준우를 슬쩍 곁눈질로 보며 하율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아, 나한테 네 번호 묻더라. "



" 헉!

너랑 아는 사이였어? "



흥분했는지 하율의 목소리 톤이 조금 올라가고 눈도 더 동글하니 커졌다.



" ....... 맞다!

형이 그쪽에서 일하신다고 했지. "



준우는 하율의 이런 모습이 실로 오랜만이었다.


준우의 기억으로는 부상과 함께 사라진 모습이었다.


원래 하율이 일희일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유도 경기가 끝난 후면 항상 극도로 흥분해 웃고 떠드는 하율을 볼 수 있었다.


기억 속에만 존재했던 하율의 환한 미소에 준우의 마음속은 복잡해졌다.


반가움과 애잔함, 그리고 왠지 모를 서운함이 준우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 강이안 소속사 대표야, 형이.

전에 한 번 얘기했었던 거 같은데....... "



준우는 서운한 마음을 하율에게 드러내고 싶었다.


조금은 퉁명스럽게 낮은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 아, 어쩐지 어디서 뵌 거 같더라니......,

그냥 너 닮은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있구나 싶었는데, ㅋㅋㅋ.

형이구나. ㅋㅋㅋ "



사람이 귀를 가까이 대지 않아도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신의 것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지금 하율은 준우에게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을 몰라 한숨만 연거푸 쉴 것이다.



" 형도 같이 있었던 거야, 그날 밤? "



준우는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어루만지듯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 곱슬머리 얌전하게 묶으시고 키는 나보다 조금 크시고, 약 75~ 7정도.

너처럼 피부 까맣고 쌍꺼풀 없는 눈에 입 크고.

어려서 몇 번 뵀기는 했는데, 전혀 못 알아봤네. "



하율은 연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 형도 나를 못 알아보시던데......,

하긴 내가 한 체급 밑으로 떨어졌으니. ㅋㅋㅋ "



" 몇 년 동안 너.......

오랜만이네 그렇게 웃고 떠드는 거. ㅎㅎㅎ "



준우는 하려던 말을 이내 삼키며 씁쓸함을 감추려는 듯 하율의 웃음에 씨익 웃어 보였다.



" 평상시에는 네가 떠들어서 끼어들 틈이 없었나. ㅎㅎ

아니면, 만연한 봄꽃에 설렁설렁 바람이 들었나. ㅎㅎ "



하율은 반쯤 열어 놓은 차 창문을 닫으며 준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 그러는 너는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왜 그리 무거운 데? "



어느덧 하율의 눈가를 빛내던 웃음이 사라졌다.



" 왜긴....... 피곤해서 그러지.

야, 3일 만에 들어가는 집이다. ㅎㅎ "



준우는 하율의 시선이 자신의 표정을 낱낱이 훑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애써 하율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자신이 대답을 회피하고 있지 않음을 피력하려 했다.



" 눈이 뻘겋게 충혈됐네. 쯔쯧.

그러니까 나처럼 공판 끝나면 바로 렌즈 빼고 안경을 써. "



하율이 팔을 뻗어 홀더에 있는 커피를 준우에게 건넸다.



" ....... 서현이랑 그새 다툰 거야? "



" 너랑 나의 대화는 기. 승. 전. 서현이군. 후~ "



준우는 하율에게서 받아 든 커피를 마시지 않고 다시 홀더에 내려놓았다.



" ....... 어떻게 우리 형도 기억을 못 하냐! "



" 아! 미안.

너도 알다시피 내가 고도근시라 사람 얼굴을 잘 못 알아보잖아.

더구나 어렸을 때는, 대회 때 빼고 안경만 썼잖냐.

안경은 또 불편해서 자주 벗고 다녔고......, "



하율은 미안한 마음에 얼굴을 옆으로 숙여 준우의 눈과 시선을 맞추려고 애썼다.


준우의 눈가에 슬며시 웃음이 번졌다.



" 전화, 받을 수는 있는 거야? "



신호가 바뀌자 준우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웃음에 따라 미소 짓고 있는 하율을 넌지시 바라보며 물었다.



" 헤드셋이나 블루투스 착용하면 가능하니까 전화할 일 생기면 해.

도착했네. 고맙다.

남은 거리 조심히 운전하고!

아~~ 졸지 말고!

마구 졸리면 전화해. "



" 10분 거리도 안 되는 거릴....... 새삼 ㅎㅎㅎ.

들어 가. "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 주는 말과 하율의 활짝 웃음에 봄 햇살에 눈 녹듯 서운한 기분이 어느새 사라져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둑어둑한 길을 조금 걸어 아파트의 입구에 불이 켜지고 다시 하율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불빛이 따라 꺼지고 켜지는 것의 횟수가 일정 숫자에 이르자 준우는 핸들을 돌려 차를 출발했다.


하율은 서서히 멀어지는 준우의 차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 나는 비겁해서 네 표정을 알지 못해.

그저, 네 시선이 머무는 곳에 내가 있지 않기를......,

너에 관한 이런 생각들이 틀렸기를......,

그리하여 그 마음이 한낱 가벼운 호기심이기를......,

오늘도 나는 또 이렇게 차마 전하지 못하는 부탁을 네게 해.

소리가 되면 되레 형용하지 못할 생각이 될 거라는 것을,

너도, 나도 너무도 지독히 잘 알고 있으니......, '



하율은 차마 건네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감정의 말들을 뒤로 한 채 허울을 벗듯 소파 위에 입었던 옷들을 하나 둘씩 벗어 걸쳐 놓으며 욕실로 향했다.


그 뒤로 전화벨 소리가 샤워기의 물소리에 잠식되어 홀로 가방 안에서 나지막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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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25. 너, 그거 하지 마. 18.06.20 84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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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22. 어떤 이름으로든 내 옆에 있게 다면, 18.04.12 90 0 17쪽
21 # 21. 각인( imprinting ) 18.04.09 83 0 17쪽
20 # 20. 비익조( 比翼鳥 ) 18.04.05 69 0 19쪽
19 # 19. 하율의 이야기 18.04.02 144 0 18쪽
18 # 18. 15분,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러 가는데 필요한 시간. 18.03.29 98 0 16쪽
17 # 17. 다가가면 안 되는 또 하나의 이유 18.03.26 94 0 14쪽
16 # 16. 918059 18.03.26 83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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