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노벨작가 그녀와 문학작가 그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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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lin123
작품등록일 :
2018.02.09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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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1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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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2.14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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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작가는 365일이 슬럼프다-(7)

DUMMY

금성이 꺼낸 말은 정말 실로 흥미로웠다. 어쩌면 어제부터 규석을 궁금해 죽을 지경으로 몰고 갔던, 금성과 편집자 사이의 가족사에 대한 비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규석은 잔뜩 기대에 찬 눈빛을 하며 금성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뭐야 그 쓸데없이 초롱초롱한 눈빛은. 부담스럽게.”


“부담스럽다니...”


“...갑자기 말 해주기 싫어졌어.”


“아니 먼저 말 해준다고 해놓고 그러는 법이 어딨냐.”



규석은 이렇게 또 궁금증을 풀 만한 기회가 날아가는 건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하라고 다그쳤다간 금성의 성격상 외려 절대 말 안하겠다고 버틸게 뻔했다. 결국 소심하게 항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 맘이야. 왜? 여자의 비밀이 그렇게도 알고 싶어? 역시 저질이네.”


“저질이라니...아니 꼭 알고 싶다기 보다는 그냥 궁금하니까...”


“그래? 그럼 말 안 해줘도 되겠네.”



그 말과 함께 금성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양 입꼬리가 씰룩씰룩 거리는 모습은 그녀가 분명 이 상황을 명백히 즐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말 그대로 규석은 지금 금성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한껏 놀아나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 그렇게 허탈해 하는 규석의 모습을 보고 금성은 까르르 웃더니 ‘농담이야 농담, 말 해줄 테니까 삐지지 마.’ 라고 하며 그를 달랬다.



“사실은...”


“사실은?”



규석은 엄청 뜸 들이는 그녀의 모습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 가볍지만은 않은 이야기 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는 숨까지 참아가며 금성이 다음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사실은...그...나... 예전부터...너의 팬이었어! 그러니까 사인 해 줘!”


“그렇구나. 알았어 사인 해 줄게...가 아니고 뭐라고?!?!?!?!?”



팬. 국어사전에 의하면 ‘운동 경기나 선수 또는 가수, 배우 혹은 그 밖의 유명인 등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 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 고로 사전적인 해석에 따르면 금성은 규석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극도의 혼란에 빠진 규석은 결국 금성을 향해 말도 안되는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너 나 좋아해?”


“미쳤냐?”



금성은 바퀴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규석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 경멸어린 시선에 규석은 굉장히 주눅이 들었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항변했다.



“아니 그...네가 내 팬이라 길래...”



규석의 말에 금성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무슨 착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정확히는 네가 쓴 ‘작품’의 팬이라는 거야. ‘작가 박규석’과 그 작품의 팬이라고. 너라는 인간이 아니고 말야.”


“아...”



규석은 대충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해야 하나, 문장을 너무 문장 그 자체의 의미로만 해석해버리고 말았다. 그는 이제 그때 편집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김 작가님 제가 알기로는 예전부터 박 작가님 패...읍]


저 ‘패...’는 팬 이라는 단어였던 것이다. 사실 책 읽기에 취미를 둔 사람이라면, 한번쯤 규석의 책을 접해봤다 해도 크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다만 갑자기 금성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조금 놀랐을 뿐이다. 좀 아쉬운 것은 가까운 주위 사람들을 제외하고 규석에게 팬이라고 말해준 것은 금성이 처음인데, 그런 첫 팬이 ‘난 너한테는 별 관심 없고 그냥 너의 책을 좋아할 뿐이야.’ 라고 말했다는 것.


물론 규석도 ‘꺅! 작가님 너무 멋있어요! 사인 해줘요!’ 같은 반응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좀 힘이 빠지는 상황이다. 그런 그의 마음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금성은 규석의 얼굴을 보며 뚱한 표정과 함께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아쉬워하는 표정이야. 진짜 아쉬운 건 나라고. 책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기대하고 두근거렸는데...하필 이런 소심남이...”


“응? 뭐라고 했어?”


“시끄러! 안 들어도 돼! 그리고 내 꿈을 돌려내 이 허당 작가야! 덤으로 사인도 빨리 내놔!”


“그렇게 사인 요구를 협박처럼 하는 팬이 어딨냐!”



규석은 대체 팬으로서 부탁을 하는 건지 협박을 하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 그녀의 행동에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하지만 규석의 반응에도 금성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막무가내의 태도를 유지했다.



“흥. 이 내가 사인을 해 달라고 하는거잖아. 그럼 된 거 아냐?”


“...너 무슨 대단한 사람이냐?”


“대단한 사람 맞지. 엄청 귀여운 미소녀에 능력까지 겸비한 인기 작가잖아.”


“얼씨구...”



결국 금성의 어거지를 이기지 못 하고 규석은 사인을 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금성은 단순히 사인을 받는 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작가가 보유한 책에다 사인을 받으면 더 가치가 있겠지?’ 라고 말하더니, 규석의 책꽂이에서 멋대로 책 한권을 꺼낸 다음 기어코 거기다 사인을 받아내고 말았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대신 나중에 우리 집에 있는 네 책을 줄게. 그럼 됐지? 훔쳐 가는 거 아니다?”



였다. 물론 규석은 책은 안 돌려받아도 상관없으니 이런 팬과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처음 만난 팬이 이 모양이다 보니, 나중에 다른 팬을 만났는데 또 이런 이상한 팬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졸지에 이상한 트라우마가 생겨 버렸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금성은 사인된 책을 받아들고는 좋다고 헤헤 웃고 있었다. 막상 그 모습을 보니 규석은 마치 선물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소녀의 모습이 연상되며 흐뭇함과 뿌듯함이 느껴졌다.


그래, 좋은 일 한번 한 셈 치자. 그렇게 생각하자 규석은 마음이 더 편해졌다. 그러던 중 그는 문득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느새 저녁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어쩐지 이상하게 허기가 느껴진다 싶었다. 규석은 소파에 앉아 헤헤 웃어대며 사인 된 책을 읽고 있는 금성을 향해 말을 걸었다.



“시간도 꽤 늦었고 난 저녁 먹을 건데. 넌 어떡할래?”


“저녁? 뭐 먹을건데?”


“음 뭐 그냥 대충 있는 거로 해 먹으려고. 왜? 너도 먹고 갈래?”



그냥 예의상 던져본 말이었건만 규석의 예상과 달리 금성은 덥석 하고 미끼를 물었다. 그녀는 눈까지 반짝반짝 빛내며 대답했다.



“응! 먹을래! 뭐 해먹을 건데?”



규석은 예상외로 적극적인 그녀의 반응에 조금 아차 싶었지만, 어차피 1인분이나 2인분이나 만드는 수고나 재료의 차이는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에 그냥 좋은 일 하는 셈 치고 한 끼 대접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베이컨 까르보나라 스파게티나 해 먹으려고. 먹을 줄 아냐?”


“까르보나라를 싫어하는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아니 그보다 그걸 만들 줄 안다고?”


“뭐 그리 어렵지도 않은데. 어쨌든 넌 좋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상관없겠지?”



규석은 부엌으로 가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금성이 가만있기 미안했는지 괜히 부엌쪽으로 와서 얼쩡거렸지만 고작 파스타 2인분 만드는데 사람이 둘이나 있는 것은 인원과다이다. 걸리적거리니까 가서 책이나 읽으라는 말에 금성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얌전히 거실로 가서 소파에 앉았다.


그렇게 요리를 하고 있던 중, 규석은 갑자기 뒤통수를 찌르는 듯한 알 수 없는 시선을 느끼고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금성이 책도 내팽개친 채 넋이 나간 표정으로 부엌 쪽을 보고 있었다. 침 흐르겠다 침 흐르겠어. 하긴 다진 마늘과 베이컨 볶는 냄새가 끝내주긴 하지. 규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미소 지었다.



“야 다 됐다! 먹으러 오...는 너 언제 여기 와 있었냐?”



파스타를 접시에 담고 식탁으로 옮기려던 규석은 깜짝 놀랐다. 금성이 어느새 식탁 의자에 앉아 목이 빠져라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 됐지?! 빨리 줘 빨리!”


“알았다 알았어.”



포크를 건네받자마자 그녀는 바로 고개를 접시에 처박다시피 하고서는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다 먹어치운 그녀는 여전히 아쉽다는 듯 포크로 빈 접시를 긁어댔다. 결국 보다 못한 규석이 냉장고에서 식빵 한 봉지를 꺼내주자 그녀는 남은 소스에 식빵 5조각을 찍어 먹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완전히 생긴 것과는 반비례의 극단을 달리는 놀라운 식성이었다.


금성은 잠시 그렇게 배를 두드리며 시간을 보내다 대접을 받았으니 자기도 할 일을 하겠다며 설거지를 하겠다고 제안했다. 규석은 좀 피곤하기도 했고,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그러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생겼다. 금성의 키가 워낙 작은 터라 씽크대와 높이가 잘 맞지 않았다. 물론 아예 설거지를 못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불편함을 느끼기엔 충분한 정도였기 때문에, 결국 국어사전 하나를 꺼내 와서 발판으로 써야 했다. 그 모습을 본 규석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대체 집에선 어떻게 설거지 하고 사냐?”


“처음엔 발판을 사서 썼는데, 그것도 영 불편해서 그냥 아예 부엌 싱크대를 새로 맞춰서 리모델링했어.”



정말 어찌 보면 돈지x의 극치라고 할 수도 있는 행동. 역시 인기 작가는 다르구만. 규석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소파에 앉아 설거지 하는 금성의 뒷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뭐가 신나는지 연신 흥흥- 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규석은 문득 옛 기억이 떠올랐다. 그도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즐겁게 식사를 하고, 설거지 하는 뒷모습을 보며 행복해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 그 기억을 다시 마음 깊숙이 밀어 넣었다. 어차피 지나간 일, 생각해봐야 자신만 힘들어질 뿐이었다. 그리고 금성의 모습을 보며 그 추억을 떠올리는 것도 왠지 그냥 마음에 걸렸다.


“후...다 했다.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 슬슬 집에 갈게.”


“설거지 하느냐 고생했다. 뭐 시간은 늦었지만...어차피 집까지는 5초도 안 걸리는 거리니까 안 데려다 줘도 괜찮지?”


“뭐 그렇지. 그리고 어차피 너보다 내가 더 싸움 잘해.”


“말이나 못하면...”



그렇게 티격태격 하면서 금성은 주섬주섬 자신의 물건들을 챙겨들었다. 지갑이나 휴대폰, 그리고 규석의 사인이 그려진 책은 물론이고 남은 식빵이 들어있는 봉지도 규석에게 반강제로 강탈해서 챙겨들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은 그녀는 배웅을 하기 위해 현관에 서 있던 규석을 향해 갑자기 주먹을 내밀었다. 뭐지? 규석은 당황한 표정으로 멍하니 금성의 얼굴과 주먹을 번갈아 보았다. 그런 그의 반응에 금성은 입을 살짝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이...인사치레일 뿐이야! 딱히 니 번호를 따고 싶은 건 아니거든? 오해 하지 마!”


“아니 오해고 자시고를 떠나서...번호 교환 하자는 뜻이었냐?”



자세히 보니 그녀의 주먹에는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었다. 정권 지르기로 착각할 정도로 힘차게 휴대폰을 내밀었으니 오해할 만도 했다. 금성은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양 볼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난 또 무슨 남자들 의리! 하듯이 주먹이라도 부딪치자는 줄 알았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 뭐 어쨌든 그...번호 교환하자는 건 친하게 지내자 이런 의미는 아니고 어, 어차피 가까이 사는데다가 출판사 까지도 같으니 나쁜 사이로 지낼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아서. 거기다 같은 작가끼리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을 지도 모르고...”



기세 좋게 시작한 것과 달리 뒤로 갈수록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만 갔다. 하긴 어제, 아니 아까까지만 해도 서로 죽이니 살리니 신고하니 마니하며 난리를 치던 사이였는데 갑자기 잘 지내자고 말하기도 당연히 부끄러울 것이다. 마음에 안 드는 구석도 제법 있지만, 규석으로서도 굳이 그녀와 나쁜 사이로 지낼 필요는 없다. 적당히 원만한 사이로 지내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금성의 스마트폰을 받아들고는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뭐 그래. 잘 지내자고는 차마 말 못 하겠지만, 최소한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살지는 말자고. 이웃사촌.”


“흥...! 내가 할 말이야 이 소심남. 그럼 나중에 또 보자.”


“그래. 잘 가라 폭력녀.”



폰을 돌려받은 금성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밖에서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확인한 규석은 천천히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파에 몸을 뉘이자 마자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다. 하긴 그가 오늘 겪은 일들은 진짜 하루 만에 겪은 일들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이나믹했다.


밀려오는 피로를 온몸으로 느끼며 소파에 기대 있던 규석은 문득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가 금성을 집안으로 들이고, 오해를 풀고, 사인을 해주고, 밥까지 차려서 같이 먹게 된 것일까. 사실 금성과의 첫 만남은 거의 최악에 가까웠다. 싸움에 휘말린 그녀를 도와주려다 오히려 욕을 먹고, 그 뒤에도 신촌 한가운데서 서로 말싸움을 벌이거나, 편집자를 앞에 두고 서로 으르렁거리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편집자의 권유로 오늘 금성이 사과를 하러 오고, 그 후 급속도로 악감정이 사라지며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당사자인 규석이 생각하기에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상황이 전개되었다. 만약 이 이야기가 소설이나 영화 소재로 쓰여 진다면 개연성이라고는 저 멀리로 날려버린, 엉성하고 조악한 삼류 스토리라는 취급조차 아까워지는 그런 작품이 될 것이다.


한번 의문이 들기 시작하자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의문들이 생겨났다. 아무리 편집자에게 혼나는 것이 무섭다 해도, 그녀의 말 한마디를 듣고 매우 싫어하는 사람에게 사과를 하기 위해 그 집 현관문까지 두드린다는 것은 뭔가 석연치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같은 여성도 아닌 혼자 사는 남자 집까지 직접 찾아온다? 그러려니 넘기기엔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문제였다. 차라리 편집자에게 규석의 전화번호라도 물어본 다음 전화를 통해서 먼저 사과하거나, 혹은 편집자를 통해 만남을 주선한 다음 그녀를 사이에 두고 사과를 하거나 하는 것이 훨씬 더 이치에 맞는 행동이다.


사실 금성이 규석의 엄청난 팬이라 사과를 핑계로 직접 찾아왔다는 가정을 해 볼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이것도 애매한 것이 정말 팬으로서 만나는 게 주 목적이었다면 그녀가 가지고 있다는 규석의 책 한권이라도 가져와서 사인을 받아갔을 것이다. 외려 금성이 ‘인간 박규석이 아니라 작가 박규석의 팬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냥 편집자를 통해 그의 사인된 책을 받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규석은 문득 피식 하고 실소가 새어나왔다. 따지고 보면 오늘 자신이 한 행동들 역시 이상한 점 투성이었다. 저런 여자랑은 얼굴조차 마주치기 싫다고 한 것이 엊그제이건만, 그 여자에게 사인을 해준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저녁밥까지 차려주고는 마지막에는 개인 연락처까지 알려주었다. 제3자가 보기엔 정말 뭐하는 인간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 투성이었다.


글 쓰는 문제로 아무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모양이군. 규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머릿속의 의문들을 털어냈다. 그리고 애초에 사이가 나빴던 것은 서로 오해가 겹쳤기 때문이고, 막상 대화를 나눠보니 생각보다 이야기도 통하고 재미도 있어서 생각이 바뀐 것이다, 라고 결론지었다. 별거 아닌 일로 지나치니만큼 깊게 생각하는 그의 나쁜 버릇이 또 발동해 버린 모양이었다. 결국 쓸데없는 생각들을 해봐야 손해 보는 건 나지. 규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완전히 머릿속을 마무리 지었다.


규석은 소파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책상에 앉아 시계를 보니 어느덧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한 글자가 아쉬운 상황이건만 오늘 하루도 결국 글 쓰는 데는 거의 시간을 할애하지 못 했다. 지금부터라도 집중하자는 생각을 하며 팬을 집어든 찰나 갑자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확인해보니 편집자로부터 온 전화였다. 대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규석은 그런 생각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박 작가님. 집필은 잘 되어 가십니까?]


“막 집중하려는 타이밍에 누군가 전화를 걸어온 탓에 산통이 깨져버렸네요.”



규석은 방해받은 탓에 살짝 나빠진 기분을 풀어볼 겸 편집자의 탓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가 그것이 큰 실수였음을 깨닫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흠...그럼 지금까지는 글 쓰는데 전혀 집중하지 않고 계셨다는 결론이 나오는 군요.]


“...그, 그렇지 않습니다. 아하하. 그냥 해본 말일 뿐입니다.”



규석은 본전도 못 건지고 그저 쭈그러들어야 했다. 괜히 최 편집자가 작가들 머리 꼭대기에 서 있다는 평가를 듣는 것이 아니었다. 규석은 졸지에 숙제 안한 것으로 변명하는 학생 같은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대로 가다간 또 그 지옥 같은 잔소리 한 시간 코스 확정이다. 규석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편집자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뭐 알아서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제가 아니라 박 작가님이시니까.]


“아 네! 당연하죠! 알아서 잘하겠습니다! 하하하하!”


[그러시리라 믿습니다. 뭐 그건 그렇고, 박 작가님.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중요하거나 글에 관련된 질문은 아니니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질문이란 말에 뜨끔했지만, 글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편집자의 말에 규석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섣부른 판단이었다. 편집자의 다음 말은 규석을 충격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질문이요...? 말씀해보시죠.”


[네. 다름이 아니라 박 작가님께서 어린 여자애의 팔을 잡고 집안으로 끌고 들어간 다음 맛있는 것을 대접해주고 사인을 해주겠다는 말로 유혹하고 데리고 놀았다는 파렴치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게 정말 사실입니까?]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규석은 기겁하며 편집자의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편집자는 그런 그의 반응에도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해갔다.



[그렇습니까?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어디 사는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들으셨는지는 몰라도, 절대 아닙니다.”


[그래요? 그럼 하나하나 따져 보죠. 일단 어린 여자애 외모를 가진 사람의 팔을 잡고 집안으로 끌고 들어가신 건 맞죠?]


“아니 그...”


[그리고 그 사람에게 사인을 해 주었죠?]


“예...”


[거기다 그 사람에게 저녁 먹고 가라는 말을 하며 맛있는 걸 해 주었죠?]


“맛이 있는지 없는지는...적어도 음식을 해서 대접한 건 맞습니다만...”


[그리고 안에서 대화도 나누시고 차도 마시며 시간을 보내셨죠?]


“그랬...죠.”


[그럼 결국 사실을 하나하나 다 나열해 보면, 작가님은 어린 여자애로 보이는 사람을 집안으로 끌고 들어가, 맛있는 것과 사인을 해 주겠다고 달랜 다음 서로 놀아나...]


“스톱! 스토옵! 인과관계나 상황을 살피지 않고 그냥 사실만 나열하니 제가 무슨 소아 성애 범죄자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본인 입으로도 밝히셨네요. ‘사실만 나열했다’ 고요. 자 그럼 이제 더 이상 무의미한 저항은 그만하시고 순순히...]


“끄아아아아아악!”



결국 편집자의 계속되는 공세에 규석은 그저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규석의 멘탈을 탈탈 털고 나서야 편집자는 만족한 듯 공세를 멈추었다.



[후후...장난은 이 정도만 치겠습니다. 작가님이 너무 괴로워하시는 걸 보니 왠지 기분이 좋아지지만...더 했다가는 작가님이 목이라도 매실 것 같으니 이쯤 해 두겠습니다.]


“좀 봐 주세요...그런 장난은, 그것도 거짓말까지 섞으시면 제 심장에 정말 좋지 않습니다.”



규석은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아까 금성에게서 ‘이거, 납치?’ 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잔뜩 당황했었다. 이러다 신고 당해도 할 말 없는 거 아냐? 라는 생각이 들었던 그 순간이 아직도 기억속에 생생하다.



[어머, 저는 결코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진실을 덜 말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조금 왜곡된 생각을 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게 더 나쁩니다! 그나저나...그 꼬맹이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바로 편집자님한테 연락해서 있는 일 없는 일 다 얘기했답니까?”



편집자가 이 일을 알게 된 출처는 금성일 가능성이 백퍼센트였다. 규석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냥 적당히 사과하고 잘 끝났다고 얘기하면 될 것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시콜콜 다 편집자에게 불어버린 탓에 결국 자신이 이런 일들을 겪고 있다. 물론 금성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만 그건 그거고, 규석은 지금 당장 자신이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이 억울할 뿐이었다.



[없는 일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과 하고 나면 저한테 반드시 연락하고 어떻게 됐는지 말하라고 했으니, 너무 그 아이 탓은 하지 말아 주세요.]


“...뭐 그렇다고는 해도 그렇게 사소한 일들 까지 시시콜콜 다 말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요?”



규석은 편집자의 말을 듣고 역시 그랬을 것 같다고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그가 당한 일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조금 날카롭게 반응 해보았지만 편집자는 능숙하게 그의 날 선 반응을 받아넘겼다.



[아뇨, 제 질문 방식이 교묘했을 뿐입니다. 아마 그 아이는 지금도 자기가 그런 사실을 말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 하고 있을 겁니다.]


“거 무섭네요! 진심으로!”



역시 나무열매출판사의 히든 보스로 불리는 그녀다운 행동이었다. 규석은 정말 자신의 담당 편집자가 가진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사실 저 여자는 편집자가 아니라 형사나 검사를 해야 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규석은 왠지 몸에서 오한이 느껴져서 분위기도 바꿀 겸 조금 신경 쓰이던 것에 대해 말해보기로 했다.



“그나저나 그 꼬맹이가 다짜고짜 집까지 찾아온 건 정말 최 편집자님 때문이었군요.”


[네 그렇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김 작가님이 잘못하신 부분이 꽤 많은 것 같아서요. 그냥 넘어가긴 좀 곤란하다고 판단되어서 직접 박 작가님을 뵙고 사과드릴 것을 권유했습니다.]



역시 금성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의 원인은 편집자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긴 그러지 않고서야 저 안하무인에 외고집에 적반하장이라는 3박자를 다 갖춘 금성이 갑자기 사과를 할 리가 없었다. 집에까지 찾아온 것에 대한 규석의 의문도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편집자가 직접 사과하라고 말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순간 규석은 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몸을 움찔했다.



“어라?”


[...왜 그러시죠?]



하지만 그것은 잠깐이었고, 위화감은 곧 사라져버렸다. 규석은 아마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보다 하는 생각을 하며 넘겨버렸다.



“아뇨 별 일 아닙니다. 기분 탓이겠죠. 그나저나 시킨다고 바로 실천하다니...이래저래 그 폭력녀는 편집자님을 정말 잘 따르는 모양이군요.”


[과분하게도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박 작가님, 정말 글은 잘 쓰고 계십니까?]



잠깐 마음을 놓는다 싶으면 훅 치고 들어오는 것이 바로 편집자의 무서운 점이었다. 규석은 휴대폰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잘못 대답 했다간 잔소리 한 시간 코스 확정이다. 쾌적하고 원활한 수면을 위해선 이 위기를 잘 넘겨야 했다.



“네, 그렇습니다. 정말 잘 되어가고 있어서 저 자신도 정말 놀랄 지경이네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기분 탓일 겁니다.”



어차피 얼굴을 마주보는 상황도 아니고, 규석은 자신이 뻔뻔할 정도로 자신 있는 말투를 유지하는 이상 편집자도 더 이상 추궁하긴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다. 예상대로 편집자는 마지막까지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지만 결국 ‘뭐 알겠습니다. 일단은 믿어드리죠.’ 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규석은 전화가 끊어지고 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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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노벨작가 그녀와 문학작가 그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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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세상일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이다-(3) 18.02.21 62 0 11쪽
12 세상일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이다-(2) +1 18.02.16 73 1 11쪽
11 세상일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이다-(1) 18.02.15 102 0 10쪽
10 작가는 365일이 슬럼프다-(10) 18.02.15 69 0 5쪽
9 작가는 365일이 슬럼프다-(9) 18.02.15 66 1 16쪽
8 작가는 365일이 슬럼프다-(8) +2 18.02.14 70 1 19쪽
» 작가는 365일이 슬럼프다-(7) 18.02.14 58 1 24쪽
6 작가는 365일이 슬럼프다-(6) 18.02.14 84 2 16쪽
5 작가는 365일이 슬럼프다-(5) 18.02.13 86 2 18쪽
4 작가는 365일이 슬럼프다-(4) 18.02.13 83 1 17쪽
3 작가는 365일이 슬럼프다-(3) 18.02.12 91 1 15쪽
2 작가는 365일이 슬럼프다-(2) 18.02.10 123 1 20쪽
1 [프롤로그]+1장[작가는 365일이 슬럼프다] 18.02.09 156 1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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