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막
헬무스는 마법 학원의 학장실에 앉아서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 이 학원이 세워진 뒤로 벌써 10년. 그의 스승인 더스틴은 6서클에 다다른 헬무스에게 학원장 자리를 넘겨줬다.
우수한 졸업생들을 배출해낸 학원은 벌써부터 로치린의 중심으로 자리잡았으나, 아직 더스틴을 8서클로 올려주기엔 부족했다. 헬무스는 그의 빈자리를 기꺼이 이어받았다.
헬무스의 스승은 요새 자신의 연구에 빠져서 그를 괴롭히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아들이 문제다. 물론 그 아들이 헬무스 본인의 아들은 아니었다.
"삼촌, 안에 계시죠?"
마지막 싸움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화련은 더스틴을 더욱 잘 감시하기 위하여 마침내 결혼식을 치뤘다. 물론, 평소부터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인지라 결혼 생활이 아주 순탄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그들의 아들은 틈만나면 '헬무스 삼촌'을 찾아왔다.
헬무스는 노크조차 없이 불쑥 들어온 소년을 보고 앓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자신의 오른손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과자가 담긴 통을 슬쩍 내미는 중이었다.
그는 간식을 그리 즐기지 않았으므로, 이 과자는 오직 조카를 위해서 준비된 것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외모를 적당히 잘 물려받은 소년이 그의 맞은편에 앉아서 능숙한 솜씨로 과자를 집어먹는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니."
"아니, 글쎄. 어젯밤에 부모님들이 다투셔서요."
부모들끼리 다퉜다곤 하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싸운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로치린의 수도에 거주하는 헬무스가 지금까지 살아있었을리 없다. 헬무스는 너무도 익숙한 사연에 고개를 끄덕이며 캐묻는다.
"이번엔 또 왜?"
"어젯밤에 원자폭탄에 대한 대응책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연구 도중 갑자기 9서클을 찍어버렸거든요. 그거 때문에 아버지가 삐져버려서..."
"... 9서클? 마법은 8서클까지 있는거 아니었어?"
"그러게요. 저도 어제까진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봐요."
헬무스가 기묘한 표정을 짓고있는 사이, 소년은 의자 위에서 대충 자세를 잡았다.
"어디 한 번 실험해볼까요?"
"뭐야?"
눈 깜짝할 사이에 어머니를 따라한 녀석은 꽤 산뜻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됐다. 9서클 있는거 맞네요."
"..."
10년에 걸쳐서 6서클을 뚫어낸 헬무스도 역대급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있건만, 그래봤자 눈 앞의 재능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시기심이 한 없이 약하다는 것은 헬무스의 몇 안 되는 장점들 중 하나였다. 그는 금세 자괴감을 떨쳐내곤 눈 앞의 조카에게 물었다.
"너 나 놀리려고 오는거지?"
"원래는 알레네 이모한테 가려고 했는데, 그쪽은 지금 재혼 상대 찾느라 바쁘거든요. 이모는 반응이 너무 살갑기도 하고."
"아, 그렇지."
스승들의 위세를 등에 업은 알레네는 마침내 남편을 차버리고 다른 상대를 고르기로 했다. 사촌이 너무 시원찮은 남자로 자라버린지라 이모쪽도 별 말이 없었다고 한다. 사실 10년이나 왕을 해먹었으니, 어지간한건 다 해봤을 것이다.
그 뒤로도 이런저런 잡담을 떠들어대고, 학원의 업무를 처리하던 두 사람은 저녁이 되어서야 헤어지게 됐다. 헬무스는 집으로 돌아가는 조카를 멈춰세우곤 조심스레 물었다.
"잠깐만. 그런데... 스승님은 언제쯤 다음 벽을 넘어가실 수 있을까?"
더스틴도, 천화련도 모르고 있지만. 헬무스는 알고있다. 이 맹랑한 녀석의 재능은 그야말로 초월적이다. 만약 그가 마음을 먹는다면 아버지의 경지를 강제적으로 끌어올리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짧게 고민해본 소년은 무척 가볍게 대답했다.
"제가 안 도와주면 100년이 지나도 힘들겠죠. 어머니는 어중간한 천재라서 본인이 어떻게 9서클에 도달하셨는지도 잘 모르거든요. 그러니까 아버지를 도와주고 싶어도 못 도와줘요."
"어중간한 천재라..."
헬무스가 그의 말에 기가 차서 멍하니 굳어있던 사이, 조카가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제가 도와드리면 오늘 밤에라도 가능할걸요? 근데 아버지의 성질이 좀 더 죽으면 생각해볼래요."
"스승님께서 또다시 원자폭탄 같은 주문을 발명할까봐?"
"아뇨. 만약 아버지를 8서클에 올려드리면 저를 산 채로 해부하려고 들 것 같아서요."
헬무스는 조카의 말을 단호히 부정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게 본인의 잘못은 아니었다.
조카를 보낸 그는 간만에 과자를 씹으며 학원의 전경과 학생들을 내려다봤다. 아무래도 존경하는 스승님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았다.
<완결>
- 작가의말
조기 완결을 쳐버린 본인으로서도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제가 부족한걸 어쩌겠습니까.
제가 의도적으로 가볍게 쓰긴 했는데, 이건 좀 너무 가볍게 써버렸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장기연재를 들어가도 좋은 꼴을 볼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됐네요.
다음에는 꼭 길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써보겠습니다.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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