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야 (4)
키리류에의 모습을 한 검보랏빛 근원, 한참이나 자신의 모습을 베껴낸 근원을 바라보던 키리류에가 조용히 입을 연다.
“약속은.. 지키는 거지?”
“그럼! 당연하지. 신성하고 진정한 결투를 치러준다는데 그 정도 약속은 당연히 들어줘야지. 아, 뒤처리는 깔끔하게 잘 해놨겠지?”
“수면제를 부어놨으니 해가 뜨기 전까지는 아무도 일어나지 못할 거야”
‘수면제? 그게 무슨.. 아!’
저녁의 식사거리였던 향이 강한 수프, 아마도 리 엔이 보지 못하는 틈을 타 몰래 그 수프에 수면제를 넣은 것 같다.
‘하지만, 어째서..’
꿋꿋하게 서 있는 키리류에를 나긋나긋 바라보던 검보랏빛의 근원은 오른손을 뻗어 키리류에의 턱을 매만지더니 그녀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넨다.
“그럼 낮에 봤던 창고로 따라오라고~ 우후후후후”
경쾌한 스냅으로 새로운 균열을 만들어내는 근원, 근원은 그것을 벌리더니 그 속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가 발걸음을 옮김과 동시에 내가 구속되어 있는 이 정체불명의 장소가 강하게 진동하더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기묘한 무늬의 타일들이 알 수 없는 깊은 바닥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어두컴컴했던 이 공간 전체가 눈부시게 흰 광채에 뒤덮여간다.
“으으으윽!”
순백의 광휘에 눈이 잔뜩 시리다. 그 빛에 눈이 멀어 시야가 흐릿해진다.
“스승님? 스승님!”
‘뭐..지’
흐려졌던 시야 사이로 모습을 비춘 것은 다름 아닌 설향이었다.
설향은 조그마한 등불을 옆에 올려둔 채 나를 흔들며 깨우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이불을 해치며 화들짝 침대에서 일어난다.
“스승님, 뭔가 이상해요. 모두들 죽은 것 마냥 잠에서 깨질 않아요, 그리고..”
“키리류에! 키리류에는 어디 있느냐?”
“네? 그걸 어떻게..”
“아무래도 근원을 따라간 것 같다. 시간이 없다. 서둘러 키리류에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어디로..”
“창고! 낮에 봤던 그 창고다!”
나는 곧바로 샬롯을 깨우고 황급히 코트만을 등에 걸친 채, 설향과 함께 계단을 뛰어 내려가 탑을 나서며 키리류에의 행방을 찾기 시작한다. 설향이 어떻게든 사람들을 깨워 같이 가는 것이 낫지 않겠냐며 묻지만 그러기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도 촉박하다.
“스승님! 저기!”
설향의 손끝이 언덕위의 창고를 가리킨다.
“오.. 맙소사”
분명 지금은 태양이 자취를 감취고 차갑고 시린 이슬만이 지면에 내려앉아있는 새벽이건만, 언덕에서 뻗어 나오는 휘황찬란한 광채들과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폭발음이 무언가 다급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알려주는 것만 같다.
“서두르자!”
나는 샬롯을 품에 안은 채, 설향과 함께 발을 구르며 언덕을 뛰어오르기 시작한다.
- 작가의말
야식이 땡기지만.. 참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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