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짐
튜튼 제국과 서부 왕국 연합은 정확히 왈롱 강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었다. 왈롱 강의 발원지는 대륙 북부에 위치한 백호(白湖)였는데, 대륙 최북단의 만년설 산맥과 빙원 지대를 배후에 두고 있는 거대한 얼음 호수였다.
그리고 이 거대한 호수에서 흘러나온 물줄기는 왈롱 강으로 이어져 대륙의 한가운데를 관통해 남쪽의 테티스 해(海)로 흘러나갔는데, 오늘날엔 이렇게 서부 왕국들과 튜튼 제국의 자연적인 경계선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이 왈롱 강을 사이로 대치하던 서부 왕국 연합군과 제국군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물론 제국군 사령부에서 황실에 보고하는 내용엔 정확히 '신경전'이라 표현하고 있었지만, 일선의 병사들에겐 결코 단순한 신경전이 아니었다.
1개 소대 병력의 군단병들이 왈롱 강이 흐르는 강변에서 조금 떨어진 숲 속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금 전 왈롱 강 주변 지역으로 위력 정찰을 떠난 경보병들을 기다리며 경계 중에 있었다.
날씨가 더워지는 계절이었지만 군단병들은 갑옷을 그대로 착용한 채 두 눈을 빛내며 숲 밖의 강변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관찰하던 장교는 잠시 투구를 벗어 이마에 송글송글 맺은 땀을 훔친 뒤 다시 투구를 눌러썼다. 장교는 병사들을 관찰하면서 방패와 창을 들고 있던 병사들이 흉갑과 견갑, 완갑까지 착용하고 있어 이 더위에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나마 높이 솟아오른 울창한 나무와 우거진 수풀이 이들에게 더위를 식힐 만한 공간을 제공해주어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이들은 브라반트 제일 남쪽 경계 지역을 담당하던 4군단 병사들이었다. 부대를 상징하는 '멧돼지'답게, 부대의 상급 지휘관들은 병사들에게 멧돼지 같은 저돌성을 강요하곤 했지만, 이런 더위 속에서는 대형을 짜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마침 옆에 있던 병사가 장교에게 가죽 물통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한 모금 마신 장교는 병사에게 고개를 끄떡여주며 물통을 되돌려줬다. 다들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장교와 병사들 모두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더위도 더위지만 혹시라도 적의 정찰대와 마주치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전투를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면 장교는 자신의 소대와 동행하고 있던 석궁병들의 존재를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었다.
2인 1조로 구성된 석궁병들은 방패수를 겸한 장전수와 석궁수가 한 팀이 되어 움직였는데, 비록 기동성은 기대할 수 없었지만 중거리 전투에서는 꽤나 충분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에, 장교는 이곳에 오기 직전 중대장을 졸라 1개 분대의 석궁병들을 동행시킬 수 있었다.
바로 그때 물통을 건넸던 병사가 장교에게 살짝 속삭여 왔다. 연락병인 한스였다.
" 소대장님... 정찰대가 좀 늦는 것 같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죠...? "
장교는 옆에 있던 연락병 한스를 바라봤다. 그의 소대에는 '한스'라는 이름을 가진 병사가 몇 명 더 있었다.
한스, 귄터, 뮐러, 슐츠, 마이어, 페터, 하인츠...
안타깝게도 평범하고 흔한 이름들이 이 왈롱 강 유역에서 허다하게 사라져 갔다. 부모들이 이름 짓는 것이 귀찮아 그런 흔한 이름을 지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흔한 이름만큼이나 이곳에선 죽음 또한 흔한 것이었다.
세상을 동경하며 군대에 지원했던 시골의 순박한 청년들이 끝내 발견한 것은 이 세상의 잔혹함이었던 것이다.
" 아니면 물 좋은 어디에선가 농땡이라도 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
연락병 한스 옆에 있던 또 다른 병사 '한스'가 빈정거렸다.
" 요즘 그 '악마'들 때문에 다른 부대에선 난리라고 하던데... 정찰대 친구들이 그놈들에게 걸려든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소대장님... "
과연 연락병답게 타 부대의 사정까지도 훤하게 꿰차고 있던 한스였다. 그때까지도 잠자코 있던 장교를 대신해 또 다른 한스가 연락병 한스에게 되물었다.
" 악마라니! 혹시 그 시퍼런 '개구리' 놈들을 말하는 거야...? "
" 그래! 개구리 놈들 중에 시퍼런 갑옷을 입고 설치는 악마들 말이야... "
병사들이 말하는 '개구리'란 발루아군을 칭하는 것이었는데, 징그러운 개구리를 식용으로 삼으면서 이를 미식으로 생각하는 발루아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해 병사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하지만 '시퍼런 갑옷'을 입고 설치는 악마들은 결코 허투루 볼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장교가 연락병 한스를 힐끔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발루아 왕국의 '푸른 십자성 기사단'을 말하는 게로군, 자네... "
" 맞습니다, 소대장님! 그 푸른... 뭐시기 기사단 말입니다... 아무튼 그놈들이 최근에 이 근방에서 설치는 바람에 윗분들께서 꽤나 골치를 앓고 있다 합니다... "
이미 대규모 정규군이 동원되는 시대에 '기사'라는 존재는 그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기껏해야 귀족들의 호위를 담당하는 경호원으로 전락해 버린지 오래였지만, 최근 들어 발루아 왕국의 기사들이 자신들의 싸움법을 적극적으로 바꾸게 되면서 전투의 양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품위 가득한 싸움법을 버린 기사들이 마침내 전장터의 지저분한 싸움법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렇게 기습이나 매복, 대규모 난전을 기피하던 고지식한 기사들이 전장의 싸움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특히나 정찰대 간의 소규모 교전 같은 상황에서는 기사들이 그 무서운 전투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특히 발루아 왕국의 푸른 십자성 기사단은 봉건 영지에 매인 일반 기사단과는 달리 왕국의 정규 기사단이었다. 정규전에 특화된 기사단이었기에 제국의 일반 군단병들이 상대하기에는 가히 벅찬 존재라 할 수 있었다.
그러자 일반 병사 '한스'가 코를 후비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 기사 나으리들이 마침내 전장의 효율을 배운 게로군... "
장교는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병사 한스의 말대로 전장의 비극은 기존의 틀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기사들이 자신들의 싸움법을 바꾸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런 변화에 맞서 이쪽에서도 계속 변화하고 진화해야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앞으로의 싸움도 여전히 힘들어질 거란 생각에 장교는 씁쓸히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헛! 소대장님, 저기 좀 보십시오! "
연락병 한스가 한 곳을 가리키며 외쳤다. 정찰 나간 병력 중 일부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푸른색 판금갑옷을 착용한 기사가 부상당한 군단병의 머리 위로 플레일(Flail, 가시 달린 철퇴를 사슬로 연결한 도리깨의 일종)을 힘껏 내리찍었다. 기사가 플레일을 휘두를 때마다 기사의 투구 꼭지에 달린 푸른색 깃털 장식이 세차게 휘날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발루아 왕국의 정찰대원들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감히 뭐라 하지는 못했다. 준귀족인 기사를 어찌 감히 평민 계급의 병사들이 제지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부상당한 제국의 병사들을 순식간에 처치한 기사가 투구의 바이저를 위로 제쳐 올리며 아군 병사들에게 외쳤다.
" 어서 빨리 챙길 건 챙기고 여길 빠져나간다, 알겠나? "
기사의 명령이 떨어지자 왕국군 병사들이 전사한 제국의 정찰대원들에게 신속히 다가가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런 말단의 정찰대원들을 뒤진다 해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물건이 나올 가능성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뭔가를 건질 때도 있었기에 기사는 병사들에게 약탈을 허용한 것이다.
전투는 순식간이었다. 푸른 십자성 기사단의 일원인 기사는 혼자서 아군의 정찰대를 이끌고 왈롱 강을 대담하게 건너 매복해 있다가, 제국의 정찰대를 발견한 순간 벼락같은 기습을 통해 박살을 내버렸던 것이다.
사실 싸움이랄 것도 없었다. 경무장한 정찰대원들이 중무장한 기사를 당해낼 도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기사가 휘두른 플레일은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잔혹한 피바람을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제국의 정찰대원들이 휘두르던 검은 기사의 방패에 막히거나 판금갑옷을 뚫지 못해 허무하게 비껴나갈 뿐이었다. 발루아 왕국의 정찰대원들이 싸움을 거들 틈도 없이 전투는 순식간에 끝나버렸고, 그 와중에 살아남은 제국의 정찰대원들이 도망치는 것으로 그들의 전투는 그렇게 해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달콤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겐 뭉그적거릴 여유가 없었다. 도망간 적병들이 곧 지원군을 이끌고 올 거란 사실을 기사를 포함한 모두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투가 주는 흥에 너무 취했기 때문일까...
기사가 다시 투구의 바이저를 닫아 내리며 다음 전투를 대비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기사의 종자가 방패를 들고 재빨리 따라붙었다.
" 제롬 경! 어서 빨리 병사들과 함께 후퇴하셔야 합니다! 너무 늦으면 적들에게 붙잡힌다구요! "
자신의 종자가 잔소리하며 따라붙자 기사가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 어차피 병사들이 강의 여울을 건너기까지는 누군가가 뒤를 봐줘야 한다! 그러니 쟝 너도 어서 빨리 병사들을 뒤따라 가거라! "
" 주군을 놔두고 먼저 가는 종자가 세상에 어디 있다고 그런 말씀을! "
아직은 어린 나이의 종자가 방패와 한손검을 기세 있게 들어 보이며 기사의 사각지대를 경계했다. 곧 기사의 명을 들은 발루아 왕국의 정찰대원들이 노획물을 들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 놈들이 온다! "
기사가 저 멀리 강변을 끼고 있던 숲 속에서 제국의 군단병들이 몰려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경무장한 정찰대원이 아니라 중무장한 중장갑 군단보병들이었다.
" 좋아, 우리도 일단 튀고 보자! 쟝, 먼저 가라! "
" 제롬 경, 빨리 오세요!"
기사가 먼저 자신의 종자 쟝에게 깊이가 상대적으로 얕은 강여울을 건너게 했다. 이미 강 건너편에선 아군 병사들이 석궁을 장전하며 엄호 사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잠시 후 종자가 강을 건넌 것을 확인한 기사가 육중한 판금갑옷의 무게를 느끼며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들을 추격해온 제국의 군단병들이 강가에 도착하자, 강 건너편에서 발루아 왕국의 석궁수들이 볼트(Bolt, 석궁용 화살)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이에 제국의 군단병들이 평소 훈련받은 대로 방패를 앞세워 볼트를 막아내는 사이, 강을 건너던 푸른 갑옷의 기사가 강 건너편에 점점 더 가까워져 갔다. 이를 보던 제국군 장교가 이를 갈며 자신의 소대와 동행하고 있던 석궁병들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 저 기사만큼은 살려 보내선 안된다! 조준 즉시 발사하도록! "
장교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석궁병들이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2인 1조로 움직이던 석궁병들은 방패병이 커다란 방패를 땅에 고정시켜 가림막을 만들면, 그 방패 뒤로 몸을 가린 석궁수가 석궁을 조준해 볼트를 발사하는 사이, 방패를 등진 방패병이 석궁을 다시 재장전해주는 식으로 움직였다.
곧 제국의 석궁병들이 볼트를 쏘아대자 왈롱 강의 좁은 여울목 사이로 양 진영에서 쏘아댄 볼트들이 이리저리 사납게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강을 건너던 기사의 운명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누가 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제국군 진영에서 날아온 볼트가 등에 꽂히며 기사가 그대로 고꾸라졌기 때문이다.
무거운 판금갑옷 때문인지 기사의 몸뚱이는 그대로 강바닥에 가라앉아 버렸다. 비교적 얕은 여울목이라고는 하지만 육중한 판금갑옷의 무게를 견디며 몸을 일으키기에는 상황이 너무 좋지 못했다.
하지만 기사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발루아 왕국의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기사의 귀환을 응원했다. 기사의 귀환이 마치 전쟁의 최종 승리를 보증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푸른 십자성 기사단의 일원인 제롬은 이를 악물며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전투로 인한 흥분이 과다 분비라도 되었는지, 신기하게도 등에 꽂힌 볼트로 인한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몸은 이미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시야도 흐릿해져만 갔다.
바로 저 앞에 있던 자신의 종자 쟝이 큰 소리로 빨리 오라며 외치는 모습만이 느린 그림처럼 흐릿하게 지나갈 뿐.
그리고 정신없이 쏘아대는 석궁수들의 볼트가 휭휭 날아다니는 가운데 결정적인 충격이 기사에게 가해졌다. 두 발의 볼트 중 하나는 기사의 투구 뒤통수에, 그리고 또 다른 하나가 기사의 뒷목에 그대로 박힌 것이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기사의 몸뚱이가 힘없이 쓰러지더니 하얀 물보라와 함께 강바닥에 그대로 처박히고 말았다.
" 저 악마 같은 놈! 정말 잘 뒈졌다, 퉷! "
연락병 한스가 장교 뒤에서 기사의 죽음을 조롱했다. 저 기사가 단독으로 제국의 경보병 정찰대원 여섯을 해치웠으니 치가 떨릴 만도 했던 것이다.
곧 상황이 정리되었다. 양쪽의 지휘관들이 잠깐의 신사협정을 맺어 양쪽 병사들의 시신과 장비를 챙긴 것이다.
기사의 종자 쟝은 푸른 판금갑옷의 색깔 만큼이나 얼굴빛이 푸르뎅뎅한 제롬의 얼굴을 흰 천으로 덮으며 눈물을 닦아냈다. 그는 비록 자신이 모시던 주군이었지만 스승과 제자 사이 만큼이나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한편 정찰대원들의 시신을 수습한 장교는 거듭 한숨을 내쉬며 군단병들을 이끌고 부대로 복귀했다. 그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보고서에 어떤 식으로 적어내 제출해야 할지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왔다.
평범한 이름들이 오늘도 여럿 죽어 나갔지만, 안타깝게도 의미 없는 죽음에 불과했다.
평범한 이들의 평범한 죽음...
오늘 있었던 일들은 예전부터 그래 왔듯이 정찰 중 적과 '신경전'이 벌어졌다라고 보고서에 기록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이들의 '평범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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