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권
제국 치안청 수사관인 루터 자이스 경사는 후배 수사관인 욀스가 데려온 소년을 보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일을 맡기기에는 너무 어린 데다가 자칫 잘못하다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네 이름이 무엇이냐...?"
" 루디라고 합니다, 자이스 경사님. "
자신의 이름을 루디라고 밝힌 소년은 한눈에 봐도 똘똘하게 생긴 아이였다. 치안청 수사관 앞에서 주눅이 들만도 했건만, 소년은 그런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자이스 경사가 자신에게 맡기려는 일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욀스의 추천으로 마지못해 소년을 만나게 된 자이스 경사는 일단은 루디라는 소년이 내심 맘에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 너는 우리 같은 수사관들이 무섭지 않은 거냐...? "
" 무섭긴요... 제가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 걸요. 다만 자이스 경사님께서 저에게 시키실 일이 무엇일지 그게 궁금하긴 해요..."
" 내가 왜 너에게 뭘 시킬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
" 그야 제게 시키실 일이 없다면... 거리에서 구걸하며 사는 저 같은 아이를 이렇게 부르실 이유가 없으니까요..."
고놈 참 똘똘하네...
자이스 경사가 내심 안타까운 눈빛으로 루디를 바라봤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꿈을 꾸며 살아갈 이 시기에, 암흑가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는 소년을 보고 있자니 내심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루디는 낡고 추레한 옷차림에 지저분한 몰골이었지만 그 눈동자 만큼은 생기를 가득 담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욀스의 설명에 의하면, 루디는 거리의 아이들을 대표해 크로이네 거리의 특정 펍을 운영하는 가게 주인들과 계약을 맺어, 손님들로부터 의뢰가 들어오면 감시와 미행, 내용을 알 수 없는 물품의 배달과 수령 같은 일들을 대신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심부름으로 인해 받은 돈을 루디는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에 쓰고 있다는 욀스의 설명에 자이스 경사는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심 그런 루디를 기특하다 생각한 자이스 경사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소년에게 한 가지 의뢰를 맡겨보기로 결심했다. 자이스 경사는 곧 종이에 어떤 가문의 문장을 쓱쓱 그려내더니 그것을 루디에게 건네며 부탁을 했다.
" 이 종이에 그려져 있는 문장의 저택을 감시해줬으면 한다. 그 문장의 이름을 알게 되면 너에게도 귀찮은 일이 생길 수 있으니 그걸 네가 알 필요는 없다만... 만약 그 문장이 그려진 마차나, 아니면 그 가문의 기사나 하인이 은밀히 어딘가로 향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즉시 그 미행까지 부탁할까 하는데... 어때, 할 수 있겠니...?"
그 문장을 지닌 귀족 가문의 귀부인이 의뢰한 것으로 보이는 살인미수가 이미 한번 있었기 때문에 자이스 경사는 두 번째, 세 번째 시도도 곧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재차 살해 시도가 있을 거라 예측한 자이스 경사는 귀족 가문의 여인을 직접 수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렇게 직접 거리의 아이들에게까지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그런 자이스 경사의 한심한 상황을 이해라도 한 모양인지 루디가 고개를 끄떡이며 다부지게 대답했다.
" 걱정 마세요! 수사관님의 일을 도울 수 있게 되어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란데스후트 주(州)의 비츠바덴 시(市)에 도착한 홀슈타인 기병연대는 도시 인근의 임시 연병장에 주둔하며 사령부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홀슈타인 지역이 제일 먼 거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남부 4개의 권역에서 파병된 병력 중 홀슈타인 기병대가 제일 마지막에 도착함으로써 사실상 남부 영지의 병력 모두가 집결하게 되었다.
남부 영지의 병력을 환영하기 위해 군부대신 뮐러 폰 비요크 백작이 특별히 연회를 준비한 가운데, 그 전에 지휘권 조정을 위한 회의가 1군 사령부 건물 안에 위치한 대회의실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 회의의 주관자는 제국군 참모총장 알프레트 폰 마켄젠 자작이었다.
각기 병력을 이끌고 집결한 남부 귀족들이 대회의실에 모여든 가운데 프란츠 역시 흥분된 마음으로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프란츠는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대회의실에 모여든 인물들의 면면을 세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로트링겐 공작령 홀슈타인 지역에서는 프란츠 자신을 포함해 기병대의 총지휘관인 헬무트 폰 자이들리츠 자작과 오토 폰 슈텐달 남작, 하인츠 폰 아데마이트 남작이 참석해 있었다.
마찬가지로 알렌슈타인 지역에서는 슈트라흐비츠 공작의 수석 기사이자 챔피언인 아들러 폰 괴를리츠 자작이, 브라운슈타인 지역에서는 루돌슈타트 공작의 둘째 아들인 피르몬트 라이바흐 폰 루돌슈타트 남작이 영지의 기병대를 이끌고 이 자리에 참석해 있었다.
마지막으로 문제의 영지라 할 수 있는 바르텐슈타인 지역의 기병대 병력을 이끌고 온 인물은 바로 크로센 공작의 둘째 아들인 오스발트 빌헬름 폰 크로센 남작이었다. 크로센 공작의 혈육답게 야심으로 가득 찬 그는 차남이라는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 공작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가문의 장남인 제바스티안 빌헬름 폰 크로센 백작에게 공개적으로 도전장을 내민 호전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이번에 남부의 기병대를 이끌고 온 인물들 중엔 공작의 둘째 아들이라는 신분을 가진 존재가 세 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서로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해서 이들이 서로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특히 오스발트 남작과 피르몬트 남작은 서로 동맹을 맺은 가문의 자제들이라고 하기엔 서로 냉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는데, 아직은 세상 경험이 일천한 프란츠가 보기에도 그들의 관계는 그리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프란츠의 관심은 그들에게 있지 않았다. 로트링겐 공작령에서 출정식을 갖기 직전, 프란츠의 이복형인 베른하르트 백작은 그에게 군부의 주요 인물들을 가르쳐주면서 특히 주목해야 할 대상을 세세히 일러주었는데, 그 인물들 중 곧 한 사람을 회의 석상에서 보게 될 예정이기에 프란츠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어서 회의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아마도 오늘 회의에서 지휘권에 대한 문제가 꽤 심도 있게 논의될 듯 하니 프란츠 남작도 유심히 지켜보는 게 좋겠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데마이트 남작이 프란츠에게 속삭이며 조언해 주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프란츠는 페렌바흐 자작으로부터 틈틈이 검술 훈련을 받는 한편, 바로 옆자리에 있던 아데마이트 남작에게서는 부대 운영에 관한 조언을 받아 꽤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었다.
이윽고 제국군 총사령부의 참모총장인 마켄젠 자작과 참모차장 디터 만네르하임 준남작, 그리고 1군 사령관 요아힘 하프너 장군이 회의실에 입장하면서 회의를 알리는 알림종이 울려 퍼졌다.
제국군 총사령부의 수장은 당연히 총사령관이었다. 그리고 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레오폴트 5세가 바로 이 총사령관직을 겸임하고 있었다.
재밌게도 황제가 겸임하고 있는 직위는 꽤나 다양하고 많았다. 제국군 총사령관에 이어서 제국 귀족원장, 황실 근위군의 총사령관, 황실 근위기사단장 등 제국의 힘 있는 자리의 최고위직은 모두 황제가 겸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얼마 전에 근위기사단의 단장직을 1황자에게 물려주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제가 갖고 있는 힘이 줄어든 것은 전혀 아니었다.
여전히 제국의 실질적인 힘이라 할 수 있는 제국군 총사령관직을 황제가 거머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가 총사령관이라 해서 군대를 직접 거느리고 실질적인 지휘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황제는 군부대신의 보좌를 받아 참모총장을 임명하여 제국군을 총지휘하게끔 하고 있었는데, 그런 총사령관의 대리인이라 할 수 있는 참모총장 알프레트 폰 마켄젠 자작이 지금 이렇게 회의실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관하고 있는 중이었다.
프란츠가 관찰하기에 제국군 참모총장인 마켄젠 자작은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외모의 노인이었다. 베른하르트 백작의 설명에 따르면 마켄젠 자작은 나름 군부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지만 그 능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은, 그저 평범한 외모에 어울리는 평범한 능력의 귀족이라는 것이다.
베른하르트 백작의 평가대로 프란츠는 마켄젠 자작이 회의를 주관하는 모습에서 별다른 특징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하품 나오는 회의에 프란츠가 기대를 갖고 임하게 된 이유는 바로 한 인물 때문이었다. 베른하르트 백작이 일러준 군부의 주요 인물들 중 한 사람이 바로 참모총장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군 참모차장 디터 만네르하임 준남작.
중년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남자가 감청색 제복을 단정히 입은 채, 회의를 주관하고 있던 마켄젠 자작을 그 옆에서 보좌해주고 있었다. 장군임을 보여주는 금빛 계급장과 견장을 착용한 그의 제복엔 갖가지 훈장과 약장이 휘황찬란하게 부착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훈장이 그의 목에 걸려 있었는데, 바로 제국에서 세 번째로 등급이 높다는 제국 은십자장(銀十字章)이었다.
지난 플란데런 전투에서 율리안 파펜 장군의 참모였던 디터 만네르하임 장군은 절묘한 반격 작전을 계획하고 수립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사실상의 주역이라 할 수 있었는데, 결국엔 그 전공을 인정받아 준남작의 작위와 함께 명예로운 제국 은십자장을 수여받을 수 있었다.
물론 율리안 파펜 장군 역시 그 윗단계의 훈장인 제국 금십자장(金十字章)을 수여받았지만, 문제는 아무런 전공이 없던 비요크 백작이 제국에서 최고 등급의 훈장이라는 제국 대십자장(大十字章)을 수여받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상한 논공행상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비요크 백작은 제국의 말단 병사들에게까지 '돼지 백작'이라 불리고 있었다.
분에 넘치는 직위에까지 오른 비요크 백작은 바로 오늘 저녁에 그들을 위한 환영 만찬회를 주최할 예정이었다. 과연 소문의 '돼지 백작'이 어떤 인물인지 곧 만나게 될 예정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지금은 만네르하임 장군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이 가는 프란츠였다.
만네르하임 장군은 2군단장 마르틴 마리우스와 함께 제국군을 이끌어 나갈 차세대 주역으로 주목받고 있던 존재였다. 당연히 베른하르트 백작은 프란츠에게 만네르하임 장군을 주시하면서 어떤 인물인지를 살펴보라는 주문을 해왔지만, 아직까지 프란츠는 만네르하임 장군의 모습에서 그 어떤 특이점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회의 분위기가 상당히 어지러워진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개입 없이 방관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곳 란데스후트에서 알렌슈타인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입니다. 만약 물자의 보급이 시급한 상황이 닥치게 된다면 우리 알렌슈타인 영지에서 물자를 공급받게 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당연히 남부 연합 기병대의 총지휘권은 우리 알렌슈타인에서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알렌슈타인 기병대를 이끌고 온 괴를리츠 자작이 다소 진부한 이유를 들어 뻔뻔하게 지휘권을 요구하고 나섰다. 마치 제국군의 보급 능력을 의심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에 그것을 듣고 있던 참모총장 마켄젠 자작과 만네르하임 장군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는데, 오랜 시간을 전쟁 준비로 다져온 제국군 사령부에 보급 능력이 부족할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부의 장성들이 노려보는 것도 모른 채 괴를리츠 자작은 오직 자신이 통합 지휘권을 가져야 하는 정당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 괴를리츠 자작님께서는 여기 계신 마켄젠 총장 각하의 능력을 믿지 못하시는가 보군요. 마켄젠 총장 각하께서는 사실상 제국군의 수장이나 다름없는 분이신데, 설마 우리 남부 연합 기병대의 보급 문제에 소홀히 하시겠습니까! "
브라운슈타인 기병대의 수장인 피르몬트 남작이 참모총장 마켄젠 자작의 체면을 세워주면서 괴를리츠 자작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서자, 괴를리츠 자작의 얼굴이 곧 울그락 불그락해졌다. 고작 공작의 둘째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병대의 수장이 된 애송이에게 한방 먹은 사실이 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송이에게 재반박을 한다면 마켄젠 자작의 능력을 깎아버리는 것과도 같았기에, 그런 상황이 부담스러웠던 괴를리츠 자작은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괴를리츠 자작을 바라보며 히죽 웃은 피르몬트 남작이 능글맞은 태도로 입을 열었다.
" 우리 남부 연합 기병대는 비록 정규군이 아닌 영지군이라고는 하지만 어차피 이렇게 파병된 마당에 현실이라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제국군과 함께 전투에 나서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제국군과 협동하기는 커녕 손발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부대의 존재란 것이 결국엔 전체 전황의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 그대의 이야기는 마치 그대는 제국군과 손발을 잘 맞출 자신이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괴를리츠 자작의 비아냥에 피르몬트 남작이 고개를 끄떡이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 물론입니다! 어찌 보면 제가 뻔뻔하다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우리 브라운슈타인 기병대는 제국군에서 퇴역한 장교들을 교관으로 채용해 제국군의 보편적인 전술이라 할 수 있는 보병과 기병 간의 제병협동(諸兵協同) 전술을 중점적으로 훈련해왔습니다! 그러니 제게 막중한 소임을 허락해 주신다면 원만한 부대의 운영과 영광스러운 승리를 여러분께 반드시 약속해드릴 테니, 제게 통합 지휘권이라는 명예를 허락해 주시기를 이렇게 간절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피르몬트 남작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그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오스발트 남작이 손을 들어 발언 기회를 요청했다. 그 손동작 만으로도 좌중의 시선이 집중되자, 자신만만한 피르몬트 남작을 향해 오스발트 남작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 아무리 뻔뻔하다 해도 뻔뻔해서는 안될 장소가 있다는 것을 그대는 잘 모르는 모양이군. "
" 뭣이...! "
피르몬트 남작이 자신에게 딴지를 걸려는 듯한 오스발트 남작을 노려봤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프란츠는 침을 꿀꺽 삼키며 저들이 이렇게까지 다투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깟 지휘권이 무엇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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