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급(2)
2황자 지기스문트 빌헬름의 주관 하에 비다르의 진급을 축하하는 조촐한 만찬이 열리게 되었다.
물론 비다르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3군 사령관 알트마르크 남작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졌다는 이유(?)로 만찬 초대를 정중히 거절했는데, 그로서는 비다르에게 망신을 주기는 커녕 바로 눈앞에서 진급하는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기에 심기가 상당히 불편할 터였다.
어쨌든 만찬이 열리고 있는 지금 이 자리엔 2황자와 그의 근위 기사 라데마허 경, 비다르와 하인츠 하르바르트 대위, 그리고 5군단장인 디터 브라이트너와 10군단장 마르틴 융 장군이 자리하고 있었다.
" 그래서... 그 반란군 수장이 그대의 말을 그대로 믿어주었다는 것인가?"
지기스문트 황자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하르바르트 대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들은 지금 하르바르트 대위가 바로고스 숲의 반란군에게 잡혔을 당시 벌였던 사기극(?)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중이었다.
사실 평민 신분에 위관급 장교에 불과한 하르바르트 대위가 이런 거물들이 모인 자리에서 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기꾼 기질이 충만한 위인이었기에 평상심을 유지하며 제법 뻔뻔하게 만찬장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하르바르트 대위의 이야기에 유독 라데마허 경이 불편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는데, 하르바르트 대위가 반란군을 속이기 위해 자신을 지기스문트 황자의 특사로 소개했다는 이야기에 주군인 지기스문트 황자에게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감히 불경하게도 황자 전하의 특사를 사칭하여 전하의 이름을 더럽히려 했다니...
하지만 지기스문트 황자는 대범하게도 하르바르트 대위의 이야기에 별 개의치 않은 듯 오히려 하르바르트 대위의 이야기를 흥미로운 태도로 듣고 있는 중이었다.
" 당시 저는 반란군의 수장을 속이기 위해 제가 알고 있던 잡다한 지식들을 모두 꺼내야만 했습니다, 황자 전하. 다행히 운 좋게도 그자가 제 말을 믿어주었기에 다행이지, 만약 일이 잘못되었더라면 그곳이 제 무덤이 될 뻔했습니다."
" 하하, 그대는 참으로 임기응변에 능한 자인 듯하군. 그런데 내 그대에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네. 그대는 내가 제위에 오르기 위해 반란군과 협상을 하길 원한다 하여 그들을 속였는데, 진정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리 이야기를 하였는가?"
지기스문트 황자가 다음 제위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만찬장 자리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런 만찬장 자리에서 대화의 주제로 삼기엔 심히 부담스러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한낱 위관급 장교가 무엄하게도 황자와 말상대를 하는 광경에 10군단장 마르틴 융 장군은 힐끗 비다르를 쳐다봤다. 자신의 수하가 황자의 심기를 어지럽힐 수도 있는 상황에서 비다르는 예의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융 장군은 비다르가 어째서 하르바르트를 가만히 내버려두고 있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해졌다.
그런 만찬장의 기묘한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것인지 하르바르트 대위가 사기꾼다운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지기스문트 황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 알메리아의 상황을 안정화시키기 위해서는 제일 싸게 먹히는 방법이라 생각해서 그리 말하였습니다. 물론 알메리아 속주가 나중에 자치를 하든 독립을 하든 그것은 나중에 가봐야 알게 될 일이겠지만, 그래도 우선은 알메리아가 안정되어 황자 전하의 공을 황실에 보여주는 것이 제일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어 그리 이야기했습니다. "
"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내가 반란군과 직접 협상을 하게 된다면 제국의 위신에 흠이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알메리아의 자치나 독립을 협상물로 삼으려다가는 자칫 잘못하다간 황제 폐하의 눈밖에 나는 꼴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네."
" 그래서 비밀 협상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가 반란군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황자 전하의 상황을 적절히 이용할 수밖에 없어 그리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지요."
" 무엄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자 전하의 상황을 이용하려 들다니!"
황자의 근위 기사인 라데마허 경이 끝내 분을 참지 못하고 하르바르트 대위에게 성을 냈다. 하지만 지기스문트 황자가 자신의 근위 기사를 손짓으로 자제시키며 하르바르트 대위에게 재차 질문을 건넸다.
"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로군. 그럼 하르바르트 대위 그대는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떠한 것이라 생각했던 것인가?"
그제야 만찬장 분위기를 파악한 하르바르트 대위는 예기치 않게 또다시 오우거의 등 위에 올라탄 신세가 된 듯하여 황자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 송구스러운 말씀이긴 합니다만... 현재 황자 전하께서는 원래 갖고 계신 배경을 버리고 군부에 투신하셨으니, 제법 험한 길을 걷고 계시다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하."
" 험한 길을 걷고 있다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가, 하르바르트 대위?"
" 전하의 외숙부이신 크로센 공작 전하는 남부 귀족 사회를 대표하는 제국 최고의 귀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크로센 공작 전하와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황자 전하의 손발을 잘라버리는 것과도 다름없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데, 자고로 전술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아군의 세력을 결집시키고 적을 분열시키는 것이 제일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외가인 크로센 공작의 이야기가 나오자 지기스문트 황자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실 지기스문트 황자가 크로센 공작과 관계를 끊은 이유는 바로 베른하르트 백작이 해준 조언 때문이었는데, 그는 베른하르트 백작이 내심 음흉한 마음을 품고 그런 조언을 해주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에도 살짝 의구심을 품고 있던 그였기에, 황자는 하르바르트 대위의 이야기를 듣고 내심 혼란스러운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 거기엔 말 못할 사정이 있다고 할 수 있네. 더욱이 황제 폐하와 크로센 공작 가문의 대립으로 인해 나는 황실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었지."
" 그래도 크로센 공작 전하가 이끄는 남부 지역은 제법 강대한 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황자 전하의 힘이 되어줄 세력과 관계를 끊었다는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 되리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전하."
" 그럼... 그대는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는가?"
" 우선은 전하의 외숙부 되시는 크로센 공작 전하와의 관계 회복이 급선무입니다. 물론 그것이 부담스러우시다면 황실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히 관계를 맺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앞으로 다가올 서부 왕국 연합과의 전쟁에서 당당히 공을 세워 황실에 황자 전하의 능력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르바르트 대위의 이야기는 베른하르트 백작이 해준 조언과는 정반대 되는 것이었다. 베른하르트 백작은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는 신경을 끄고 오직 알메리아의 안정에만 힘을 쏟으라고 조언을 해준 반면, 지금 여기 있는 하르바르트 대위는 오히려 전쟁에서 공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제국에서 '현자'라고 소문난 베른하르트 백작의 식견을 고작 하르바르트 대위 같은 무명의 평민 장교가 반박한다고 해서 이를 따를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지기스문트 황자는 내심 하르바르트 대위의 의견에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활동적이고 정력적인 그로서는 이렇게 알메리아의 안정화 같은 수비적인 임무에 이미 진덜머리가 나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르바르트 대위의 의견에 지기스문트 황자가 내심 고심하는 동안, 마르틴 융 장군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비다르에게 말했다.
" 비다르 대령. 이제 보니 하르바르트 대위 저 친구는 중대장 보직이 아니라 참모 보직이 딱인 듯 보이오, 허허."
아직 번듯한 진급식이 열린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진급이 예정되어 있던 비다르를 '대령'이라 칭한 융 장군에게, 비다르가 마침 뭔가 생각났다는 듯 융 장군에게 한 가지 부탁을 건네기에 이르렀다.
" 각하께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만... 괜찮으시다면 각하의 휘하에 있는 장교 좀 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빌려달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요...?"
" 각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비토리오 왕국군이 끝내 점령하지 못한 전방 요새의 책임자 고멜 라시드 대위를 말입니다."
" 고멜 라시드 대위...? 혹시 비다르 대령 그대는..."
곧 73연대의 연대장으로 부임해 브라반트로 파병될 예정인 비다르는 자신의 참모로 고멜 라시드 대위를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하르바르트 대위도 참모로는 괜찮은 인물이긴 했지만, 비다르는 '사기꾼' 보다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행동하는 '강박증 환자'가 자신의 참모로 더욱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 부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마르틴 융 장군이 흐뭇한 시선으로 비다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어지간히 라시드 대위가 맘에 들었던 모양이구려. 알았소, 내 신속히 그 일을 처리하도록 하리다."
만찬 자리가 파하고 숙소로 돌아가기 전, 지기스문트 황자가 잠시 하르바르트 대위를 따로이 불러 뭔가를 이야기하는 모습이 비다르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황자가 이내 비다르에게 다가오더니 악수를 청하며 입을 열었다.
" 곧 브라반트로 이동하게 되겠군. 그곳에서도 멋지게 전공을 세워 제국의 영광에 이바지하길 바라겠네."
" 명심하겠습니다, 황자 전하."
" 그리고... "
지기스문트 황자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비다르에게 살짝 몸을 기울이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속삭였다.
" 자네와는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틈이 없어 아쉽기 그지없군, 하지만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자네가 나를 좀 도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네."
지기스문트 황자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바라보며 비다르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모습을 긍정적인 반응이라 생각한 황자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배웅했다.
그렇게 숙소로 향하던 비다르를 따라가면서 하르바르트 대위가 뭔가를 주저하더니 이내 입을 열어 비다르에게 말했다.
" 사실 조금 전... 황자 전하께서 자신의 휘하에 배속될 의향이 없는지를 제게 물어보셨습니다."
" 난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다, 하르바르트 대위."
" 그래도 대대장님께는 미리 알려드려야 할 것 같기에... 어쨌든 황자 전하께는 정중히 사양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비록 천지분간 못하는 위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제 주제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르바르트 대위를 힐끔 바라본 비다르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 그대는 이미 훌륭한 사관이다, 하르바르트 대위. 그러니 잡생각은 그만 하고 앞으로의 일만 생각하도록."
하르바르트 대위는 그런 비다르의 등 뒤를 바라보며 자신의 결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비록 황자의 제안을 거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는 내심 제국 최고의 권력자 중 한 명으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르바르트 대위는 지기스문트 황자의 신세를 생각해 봤을 때 그 휘하에 들어가는 것만큼 위험한 짓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처럼 보잘것없는 평민 출신의 군인이 황자의 세력에 가담한다 해서 크게 쓰일 것 같지도 않겠거니와 나중에 실컷 이용만 당하다 버림받을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신의 진로를 생각해본다면, 하르바르트 대위는 이왕이면 보다 안정적이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쪽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해졌다.
그렇다면 바로 저 앞에 있는 검은 머리 귀족은 어떨까. 지금처럼 계속 저 냉혹한 존재를 따라다닌다면 달콤한 영광의 잔을 들이킬 수 있을 것인가.
그런 하르바르트 대위의 생각을 눈치라도 챈 것인지, 비다르가 뒤따르던 그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 후회하는 마음이 든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황자에게 돌아가도 좋다, 하르바르트 대위."
후회라니... 그래도 황자의 휘하에 들어가 살얼음판 같은 상황을 겪는 것보다는, 바로 눈 앞의 비다르 휘하에서 나름 인정받으며 경력을 쌓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 하르바르트 대위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별말씀을! 저 같은 사기꾼을 제대로 써주실 분이 대대장님 이외에 어디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하하!"
" 그대는 황제를 상대로도 사기를 칠 위인이니 그대를 휘하에 두는 사람은 분명 운 좋은 사람일 것이다, 대위."
칭찬인지 욕인지 불분명한 비다르의 이야기에 하르바르트 대위는 은근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비다르의 말대로, 하르바르트 대위는 이왕에 사기를 쳐야 한다면 크게 한번 쳐봐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 말대로 황제를 상대로 사기를 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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