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공전야(4)
어느 야심한 밤, 두에른에 위치한 제2군 사령부를 일단의 무리들이 말을 타고 달려와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바로 제국군 참모총장 알프레트 폰 마켄젠 자작과 참모차장 디터 만네르하임, 그리고 참모본부에 속한 상급 장교들이었는데, 난데없는 이들의 방문에 술라 남작은 깜짝 놀라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그들의 뒤를 따라 기라성 같은 제국군 참모들이 동행해 마치 제국군 참모본부를 제2군 사령부로 이전한 듯했기에, 그는 마침내 이것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곧장 깨닫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등장은 곧 한 가지를 뜻했기 때문이다.
전쟁의 시작이 이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 모든 부대가 제 위치를 찾아 포진했습니다. 이제 명령만 떨어진다면 별동대 역할을 수행할 기병대가 적진 깊숙이 파고드는 것을 시작으로, 제2군의 전병력이 왈롱 강을 넘어 정해진 시간 내에 적의 전초기지들을 완벽하게 제압하는 것으로 개전의 첫날이 마무리될 것입니다."
제2군 사령관 술라 남작의 설명에 마켄젠 자작이 손을 들어 그 설명을 멈추게 했다.
"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완료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미 잘 알고 있소, 사령관. 사실 우리가 여기 온 까닭은..."
마켄젠 자작이 만네르하임 장군에게 모종의 눈짓을 보내자 만네르하임 장군이 명령서가 들어있는 봉투를 직접 술라 남작에게 건네기에 이르렀다.
" 영명하신 프리드리히 레오폴트 폐하의 지엄하신 명을 받들어 2군 사령관 술라 남작에게 작전의 개시를 허한다는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이곳까지 급히 오게 되었소."
그렇게 봉투를 전해 받은 술라 남작은 마켄젠 자작의 통보를 통해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시작이다... 이번엔 진짜란 말이다...
그렇게 잠시 멍해진 술라 남작이 살짝 떨리는 마음으로 황실 인장으로 봉인된 봉투의 겉면을 살짝 뜯어냈다. 그 안엔 황제의 명령이 담긴 명령문이 들어 있었다.
" 작전은 내일 동이 트는 시간을 기점으로 일제히 개시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명령문은 보안을 위해 2군 사령부를 거치지 않고 참모본부 직속 명령으로 예하 군단에 각각 따로이 전달되었음을 유념해 주십시오."
참모차장 만네르하임 장군의 설명을 듣고 술라 남작은 지금 자신과 마찬가지로 예하 군단장들 모두가 이 명령문을 읽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물론 사령관인 자신을 통해 이 명령문이 전달된 것은 아니지만,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 중간 절차쯤은 가볍게 무시될 수 있다는 점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긴장과 흥분으로 가득한 회의실을 훑어보던 만네르하임 장군은 전방의 군단장으로 있는 자신의 동료들을 생각하며 속으로 그들의 무운을 빌어주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곧 전투에 돌입하게 될 군단장들 전원이 군부 내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혁명파 장성들로 채워져 있었기에, 그는 이것이 자신들에게 기회가 될 것인지 아니면 위기가 될 것인지는 전쟁이 끝나 봐야 알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며 마침 회의실 곳곳을 돌아다니며 술병과 잔을 준비하던 하급장교들을 바라봤다.
마침 참모총장의 전속부관들이 제국의 대표적인 전통주이자 과실주인 슈냅스를 여기 모인 모든 이들에게 각각 따라주고 있었다. 과거 제국의 기틀을 완성한 오토 콘라트 3세가 출정식을 가질 때마다 휘하의 장군들과 함께 슈냅스를 마신 것을 시작으로 오늘날까지 이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어왔는데, 지금 이 순간 역시 그 전통이 재현되려는 찰나였다.
이윽고 마켄젠 자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들어 보이자 그 자리에 있던 장성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따라 들었다.
" 오늘을 위해 제국의 전 장병이 적지 않은 노고를 치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는 우리 모두가 정의로운 창칼을 바로 세워 영광스러운 승리를 노래하게 될 것이오! 후대의 역사가 우리의 용맹과 인내를, 숭고한 희생을 찬양하게 될 것이오!"
마켄젠 자작이 비장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며 휘하의 장성들을 매서운 눈빛으로 훑어봤다.
" 우리 제국군의 승리를 위해, 제국의 번영을 위해, 존엄하신 황제 폐하의 영원무궁한 영광을 위해!"
마켄젠 자작이 잔을 높이 치켜들며 있는 힘껏 소리쳤다.
" 황제 폐하 만세!"
" 황제 폐하 만세!"
군단 본부로부터 전령이 도착하자 비다르를 비롯한 73연대의 상급장교들 전원이 잠에서 깨어나 지휘 막사 안으로 모여들었다.
이윽고 전령이 전해준 봉투를 비다르가 개봉하자, 그 모습을 휘하의 대대장들과 시구르드손, 구스타프슨 등이 긴장 가득한 눈빛으로 지켜봤다.
" 군단 본부로부터 명령이 하달되었다! 내일 동이 트는 시각을 기점으로 드디어 작전이 개시될 것이다! 우리 73연대는 4군단의 후미에 따라붙어 플람스의 뵈르네 지역으로 돌입, 적의 전초기지 중 하나인 성채도시 '르와예'에 주둔하게 될 것이다!"
드디어 개전을 알리는 명령이 하달되자 모두들 얼굴이 크게 상기된 가운데, 2대대장 틸로 슈만 중령이 뭔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비다르에게 질문을 건넸다.
" 죄송합니다만 대대장님... 방금 점령이 아니라 '주둔'이라 하셨습니까...?"
살집이 두둑한 슈만 중령의 얼굴을 바라보며 비다르가 고개를 끄떡였다.
" 그렇다. 르와예의 점령은 4군단 예하 41연대 1대대와 공성대대가 담당하게 될 것이다."
" 그것은 즉... 우리에겐 '뒤처리'나 하라는 말과 다름없는 이야기로군요..."
1대대장 게델 카리우스 중령이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자 슈만 중령 역시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어 말했다.
" 그야 당연히 첫 전투의 영예는 자신들이 차지하겠다는 것이겠지. 뭐, 어쩌겠나! 우리는 저들이 빌려온 병력인 것을!"
카리우스 중령과 슈만 중령은 여전히 전공에 대한 욕심을 저버리지 않은 듯했다. 그렇게 뭔가 알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3대대장 한스 만스펠더 중령이 잠시 손을 들어 비다르에게 질문을 청했다.
" 그럼 르와예에 주둔하고 난 뒤의 계획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연대장님?"
" 후속 부대에 르와예를 인계한 뒤, 4군단과 6군단의 진격을 도와 포위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물론 플람스 서쪽 끝에 있는 몽스를 점령하고 나서는 적의 반격을 차단하고 포위망의 빈틈을 메꾸는 것이 우리의 주요 임무가 될 것이다."
" 에이, 난 또 뭐라고... 지금 당장 전투에 나서는 것도 아니구만!"
기병대장 뮐러 폰 다르케멘 중령이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습으로 툴툴거리자, 그런 뮐러 중령을 외면한 비다르가 구스타프슨에게 넌지시 질문을 건넸다.
" 붉은 수염 용병대도 준비가 끝난 상태인가, 구스타프슨?"
" 물론입니다, 비다르 경. 제가 탄크레디 그 녀석을 어렸을 적부터 봐왔는데 준비성 하나는 무척이나 철저한 친구이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
여기 있는 이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티롤 용병들로 구성된 붉은 수염 용병대는 최근 들어 이름을 떨치고 있던 신진 용병 세력 중 하나라 할 수 있었다. 특히 그 수장인 탄크레디는 용병업계에 떠오르는 신성과도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었는데, 그런 탄크레디가 사실은 구스타프슨이 통솔하던 용병대에서 용병 생활을 시작했었다는 사실은 비밀 아닌 비밀이라 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런 용병대를 유르겐이 비다르에게 보내준 것은 말 그대로 유르겐이 비다르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비다르는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200여 명의 용병들을 보내준 유르겐에게 내심 감사하며 구스타프슨에게 따로이 지시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 그 탄크레디라는 용병대장 옆에 붙어 내 명령을 전해주었으면 한다. 어쨌든 활용할 수 있는 병력이 많아진다면 선택의 폭도 넓어지는 것이 아니겠나."
"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비다르 경. 계약 하나는 철통같이 지키는 친구들이니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 전원 승마!"
홀슈타인 기병연대 3대대 2중대장 발터 그라프 경의 외침에 기병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말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곧 에리히 폰 슈베린 준남작의 3중대와 하인츠 폰 아데마이트 남작의 4중대 기병대원들 역시 말에 올라타 이동 준비를 하던 가운데, 3대대장 프란츠와 라예르베크가 1중대 기병대원들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이제 곧 적지로 침투하게 될 예정이라 프란츠를 비롯한 홀슈타인 기병대원들 전원이 무장을 충실히 갖추고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흉갑을 기본으로 견갑과 완갑에 투구까지 갖춘 완전무장한 중기병들이 위압적인 기병창을 들고 군마에 오르니 일당백의 전사들로 보이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마침 라예르베크가 건넨 붉은 깃털이 꽂힌 황금 투구를 눌러쓰며 프란츠가 군마 '지클론' 위에 올라탔다.
" 항상 네 옆에 붙어있을 테니 등 뒤는 걱정하지 말라구, 프란츠!"
라예르베크가 한쪽 눈을 찡긋한 뒤, 자신 역시 투구를 눌러쓰며 군마 위에 올랐다.
" 휴우... "
깊숙이 눌러쓴 투구로 인해 시야가 극히 제한되었지만 프란츠는 자신의 이런 표정을 부하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곧 다가올 전투로 인해 거듭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동안 훈련을 충실히 해오기는 했지만 아직 실전 경험이 없던 프란츠로서는 앞으로 치를 전투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잠시 후, 홀슈타인 기병연대장 헬무트 폰 자이들리츠 자작의 전령이 말을 타고 3대대 앞으로 달려왔다. 곧 프란츠를 발견한 전령이 그 앞에 말을 세우며 프란츠에게 큰소리로 명령을 전하기에 이르렀다.
" 자이들리츠 자작님의 명입니다! 적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즉시 쉴 새 없이 앞만 보고 전진하라고 하셨습니다! 벨리유 마을에 도착하기 전까진 적을 발견한다 해도 회피기동을 통해..."
" 알고 있다! 적군은 일절 무시한 채 벨리유 마을까지 전속력으로 전진하겠다 전해드리도록!"
이윽고 3대대 전병력이 대형을 갖추고 명령을 기다리자 프란츠가 지클론을 몰아 그 앞으로 다가섰다.
" 제군들! 이제 곧 동이 트면 다들 숙지하고 있는 대로 작전이 개시될 것이다!"
프란츠가 있는 힘껏 고함을 지르며 기병대원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모두들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가운데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프란츠를 바라보고 있었다.
" 우리 목표는 벨리유 마을, 바로 그곳이다! 제군들..."
곧 적지 깊숙이 들어가 고립당한 채 격렬한 전투를 치러야 할 이들을 바라보며 프란츠의 마음이 한순간 먹먹해졌다.
과연 이 전쟁이 저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 살아서 만나자...! 반드시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자...!"
곧 프란츠의 연설을 마지막으로 3대대 기병대원들이 일제히 대형을 갖추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곧 동이 트기 시작하자 주홍빛 햇살이 지면 위로 떠오르며 이들을 따스하게 비추어 주었다.
아직 때 이른 새벽, 황궁 쇤부른에 위치한 황제의 집무실이 갑자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곧 근위 기사단의 부단장 할버슈타트 백작의 호위를 받으며 집무실로 들어선 황제가 이미 집무실 안에 대기하고 있던 군부대신 비요크 백작과 하이드리히 남작을 발견하고선 그들을 자리에 앉게 했다.
" 이제 곧 시작이겠군. 군부에서는 모든 준비를 확실히 끝마쳤겠지...?"
" 물론입니다, 폐하! 참모총장 마켄젠 자작의 통제 하에 술라 남작이 이끄는 제2군의 모든 부대가 곧 플람스 지역으로 진입하게 될 것입니다."
군부대신 비요크 백작의 대답에 황제가 초조한 듯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하이드리히 남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플람스 지역을 평정하고 벨지크의 국왕과 왕족을 사로잡으면, 그 다음의 제반사항은 하이드리히 남작 그대가 확실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야."
"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이미 보안청과 중앙정보국에서 플람스 지역 안정화 계획을 수립해 이를 시행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알메리아에서 벌어졌던 일은 결코 플람스에서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황제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내다봤다. 마침 따스한 기운을 품은 햇살이 새벽녘의 하늘을 빛무리로 장식하며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그렇게 적지 않은 이들이 이 시간에 깨어나 분주한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나 그랬듯 밝은 햇살이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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