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전
동이 트기 바로 직전, 아직은 어두컴컴한 왈롱 강변을 향해 한 필의 기수가 제국군 진영에서 경쾌하게 달려 나왔다.
제국의 상징인 금빛 '쌍두 독수리'가 새겨진 푸른 깃발을 휘날리며 달려온 기수는 이윽고 말에서 내리더니 서부 왕국군 진영이 훤히 보이는 왈롱 강변 가까이에 성큼 다가섰다.
이윽고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낸 기수가 그것을 펼쳐 왈롱 강 너머의 서부 왕국 연합군 진영을 향해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종의 '전쟁 통보'와 다름없었다.
" ... 다시 한번 주지하자면 제국을 주관하고 통치하시는 영명하신 대제 프리드리히 레오폴트 폐하께서 그대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비극적인 상황을 원치 않으신다 말씀하셨다! 그러니 그대들은 아국(我國)의 속주령 알메리아를 침범했던 지난 일에 대해 제대로 해명하고 사과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것은 제국이 그대들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이자, 그대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
하지만 제국군 기수가 서부 왕국군 진영을 향해 목청껏 외친 통보에도 불구하고 서부 왕국 연합군 진영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이런 어두컴컴한 새벽에 강 너머의 기수가 외치는 소리는 들릴 리가 없었고, 더욱이 들었다 해도 이러한 통보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권한 있는 인사도 있을 리 만무했던 것이다. 물론 제국의 기수 역시 서부 왕국군의 반응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그저 꼿꼿이 그 자리를 지키고만 있었다.
잠시 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확인한 제국의 기수가 두루마리를 접으며 다시 한번 더 낭랑한 목소리로 전방을 향해 외쳤다.
" 이 전쟁은 우리가 원치 않는다. 하지만 그대들로 인해 튜튼 제국은 이 원치 않는 전쟁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대들의 해명과 사과가 없는 이상, 이 전쟁의 명분과 정당성은 분명 우리 제국에게 있음을 이 자리에서 통보하는 바이다!"
그렇게 통보를 마친 기수가 다시 말에 올라 제국군 진영으로 돌아가자, 한바탕 전쟁의 시작을 알리던 그 자리엔 이내 강물 흐르는 소리와 강바람 부는 소리로 가득해졌다.
두두두두두두...
수백여 기의 군마들이 질주하며 내는 말발굽 소리가 온 천지를 진동시켰다.
마침 산뜻한 공기로 가득해야 할 이 새벽 아침에 이들이 내달리며 날린 흙먼지들이 뿌옇게 날아올라 사방을 가득 메웠고, 아침에 눈을 뜬 작은 들짐승들마저 땅의 거대한 진동을 느끼며 저마다 몸을 숨기에 분주해졌다.
드디어 제국군 '제2군' 10만여 명이 넘는 대병력이 플람스 지역을 침공하려는 순간, 홀슈타인 기병연대와 남부 연합 기병연대가 본대의 진격이 개시되기도 전에 왈롱 강의 여울목을 건너 플람스 지역으로 일제히 쏟아져 들어갔다. 서부 왕국군의 감시 요새와 주요 성채들을 외면한 채 그저 앞만 보고 내달리던 그들은 대대 단위로 종대 대형을 갖춘 채 일제히 리에주 평원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3대대의 지휘관인 프란츠 에른스트 폰 로트링겐 남작 역시 군마 '지클론'을 타고 3대대 선두에서 달리며 쏜살같이 지나가던 주변 풍경들을 곁눈질로 살짝 훑어보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적군과 마주치거나 충돌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아 첫 시작이 좋다는 생각을 하던 프란츠는 일정한 간격으로 꿈틀거리던 지클론의 튼실한 근육을 느끼며 더욱 몸을 웅크렸다.
이미 상당한 거리를 달려왔음에도 지클론을 비롯한 예하 기병대의 군마들은 전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역시 보즈쿠르트 초원의 말들이 최고라는 생각이 든 프란츠는 고개를 살짝 돌려 뒤따르고 있던 기병대원들과 군마들을 세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들 중장갑 기병대원들을 태운 군마 역시 안면 갑옷과 마갑을 걸치고 있었는데, 특히 적 보병대와의 충돌시 충격력과 방어력을 높여주는 마갑은 기병대원과 군마 모두에게 두려움 없이 적진에 돌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고마운 존재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렇게 적지 않은 시간에 걸쳐 이동을 하게 된다면 장비를 갖춘 말과 기수 모두 지칠 수밖에 없었지만, 프란츠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리에주 평원에 도달하는 것만이 최우선이라는 생각으로 잡생각을 떨쳐 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앞만 보며 내달리던 프란츠에게 저 멀리 이름 모를 숲 옆 공터에서 작은 움직임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프란츠가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니 일단의 무장 병력이 기병들의 출현을 알아챘는지 저마다 장비를 챙겨 대형을 갖추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수가 대략 백인대 정도 되는 병력이었다.
프란츠는 이곳이 제국이 아닌 벨지크 왕국의 영역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저 앞에 있는 무장 병력 역시 적군이라고 상정할 수밖에 없었다.
적의 병력이 얼마나 되었든 일절 무시하고 앞으로 달려 나간다...
그들의 목표는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우선적으로 리에주 평원의 벨리유 마을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프란츠는 지클론의 옆구리를 채근하며 더욱 속도를 높여갔고, 그 뜻을 공유하기라도 하듯 그 뒤를 따르던 기병대원들 역시 말고삐를 잡고 말의 속도를 더욱 높여갔다.
그렇게 대규모 기병대 병력이 점점 가까워지자, 소속이 불분명한 백인대 병력이 저마다 방패를 들고 원형진을 꾸리며 불안한 눈빛으로 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 소수의 병력으로 대규모 기병대 병력에 맞서려 한다는 사실이 일견 대견해 보일 법도 했지만, 다행히도 기병대원들의 관심은 결코 그들에게 있지 않았다.
곧 수백여 기의 기병대원들이 빠른 속도로 그들을 지나쳐 달려 나가자, 백인대의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황당해하는 모습이 프란츠의 시야에 살짝 들어왔다. 분명 저들도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던 프란츠는 다시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자신들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파악하려 온 힘을 기울였다.
플람스의 남부 지역 뵈르네에 인접한 왈롱 강변에는 작고도 견고한 성채 '르와예'가 우뚝 서 있었다. 마침 벨지크 왕국군 4개의 백인대 병력이 방비하고 있던 이 성채를 4군단 41연대 1대대의 군단병들이 포진하여 에워싼 가운데, 군단 직할 공성(攻城)대대가 각종 공성 병기를 조립해 성채 공략에 나서려 했다.
이윽고 공성대대가 공성 망치와 공성탑을 조립해 완성시키자 1대대 군단병들이 전투 준비에 나서기 시작했다. 트레뷰셋(Trebuchet) 같은 투석기는 이런 작은 성채에 쓰기엔 과한 장비였는지 수레에 부품 채 실려 전방으로 이동했고, 곧이어 공성병들이 공성 병기를 조작하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마침 비다르의 73연대 역시 이곳에 도착해 예비대 병력으로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 무지막지한 공성대대 녀석들... 무척이나 신이 나 보이는군..."
하르바르트 대위와 발타자르 대위가 나란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지금 막 군단병들을 태운 공성탑이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아래에선 마찬가지로 경사진 장갑판으로 상부를 보호한 공성 망치가 성벽에 접근해 성문을 깨부수고 있었다.
" '멧돼지'들이 얼마나 빠른 시간 안에 저 성채를 점령하는지 우리 한번 내기해 볼까?"
4군단의 별칭인 '멧돼지'를 언급하며 느닷없이 내기를 제안한 하르바르트 대위에게 발타자르 대위가 코웃음을 치며 거부의사를 밝혔다.
" 일없다. 너 같은 사기꾼이랑 내기를 하느니 차라리 창을 들고 저 성채로 돌격하는 게 낫지."
" 그 큼지막한 덩치로 성벽에 접근했다간 금세 화살받이가 되고 말 걸?"
그렇게 '사기꾼'과 '오우거'가 서로 티격태격하고 있는 사이,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기병대장 뮐러 중령이 술병을 들고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 그 내기, 내가 한번 해봐도 될까?"
" 오! 뮐러 중령님, 어서 오십시오. 역시 뮐러 중령님께서는 이 오우거보다 운치란 게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하하!"
하르바르트 대위의 넉살에 발타자르 대위가 모래라도 씹은 듯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뮐러 중령이 실실 웃더니 대뜸 술병을 하르바르트 대위에게 건네주었다.
" 적의 성채가 함락되는 것을 지켜보며 술과 내기를 즐긴다라... 역시 비다르 대령의 부하들답군! 정말 악당들다워, 하하!"
그것을 칭찬으로 들은 모양인지 하르바르트 대위 역시 미소를 지으며 술병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렇게 별종은 별종을 알아보는 법인지라, 하르바르트 대위와 뮐러 중령은 서로 죽이 잘 맞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전직 사기꾼과 폭력단원, 그리고 술주정뱅이가 나른한 표정으로 성채 르와예 전투를 감상하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곧 성벽 가까이에 공성탑이 바싹 다가서자 탑 끄트머리의 들다리가 성벽 위로 털썩 내려앉았다. 마침 공성탑에서 대기 중이던 군단병들이 들다리를 통해 우르르 성벽으로 건너가 전투를 치르게 되면서 본격적인 공성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군단병들 전원이 좁은 장소에서 휘두르기 좋은 한손검과 방패를 들고서 성벽 위에 있던 벨지크 왕국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르는 것과 동시에, 성채의 성문이 공성 망치에 의해 부서지게 되면서 양쪽을 통해 제국의 군단병들이 우르르 성채 안으로 몰려들어 갈 수 있었다. 물론 벨지크 왕국군과의 격렬한 전투를 치러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미 성채를 겹겹이 에워싸고 있던 제국군으로 인해 사기가 저하되어 있던 왕국군 병사들은 전투를 치를 의욕을 상실한 상태였다. 백인대장과 십인장들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며 전투를 독려하고 나섰지만 병사들을 움직이게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마침 그 광경을 비다르와 세 명의 대대장, 그리고 고멜 라시드 대위가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 실제로 보니 그리 크지는 않은 성채로군요. 어째서 트레뷰셋이 서둘러 전방으로 떠났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습니다."
비대한 몸집의 2대대장 틸로 슈만 중령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리자 고멜 라시드 대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 4군단이 오늘 점령해야 할 적군의 성채가 제법 적지 않습니다. 트레뷰셋을 움직이는 인원과 나머지 공성대대 병력도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있기에 이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이겠지요..."
" 저런 코딱지만한 성채를 점령한다 해도 군부의 전공록(戰功錄)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할 수 있겠군... 저런 성채라면 이곳 플람스에는 무진장 널려 있으니 말이야..."
1대대장 게델 카리우스 중령이 그 특유의 뱀눈을 굴리며 함락 직전의 성채를 지켜봤다. 전투를 치르는 병사들에겐 오늘 하루가 제법 길게 느껴지겠지만, 이를 지켜보던 후방의 장교들은 그런 모습 하나하나가 거대한 작전의 극히 일부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이윽고 르와예 성채에 4군단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며 게양되자, 성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공성병들과 73연대 군단병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비교적 어렵지 않게 전투가 마무리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비다르가 옆에 있던 대대장들과 라시드 대위에게 명령을 내렸다.
" 41연대 병력이 마무리를 짓는 대로 3대대와 함께 성채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1대대와 2대대는 서쪽 공터에 자리를 잡고 혹시라도 있을 적의 잔존 병력을 경계하길 바란다. 라시드 대위는 지금 당장 41연대 1대대 지휘관에게 가서 성채를 인수한다는 문서에 서명을 받아오도록."
그렇게 비다르의 명을 받들던 라시드 대위는 연대장의 싸늘한 눈초리에서 한줄기 아쉬운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그의 짐작이 맞다면 이 검은 머리 대령 역시 첫 전투를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는 사실에 상당히 아쉬워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라시드 대위는 격렬한 전투를 치를 일이 곧 여러 차례 생길 거라고 확신했다. 이렇게 팔팔한 전력을 갖춘 연대 병력을 그저 예비대로 놔두기에는 2군 사령부의 병력 운용이 무척이나 빠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잠시 후, 한스 만스펠더 중령이 지휘하는 3대대 병력이 비다르와 함께 르와예 성채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끝으로 전쟁의 첫날이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비록 직접 성을 공략해 점령한 것은 아니었지만, 후대의 역사에는 기묘하게도 비다르가 직접 점령시킨 두 번째 성채로 이 르와예를 기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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