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전고투
해가 돋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어오는 사막 바람이 싸늘하다. 홍두명은 속으로 엄청난 갈등을 겪고 있다. 우문현성의 말에 따라야 할지 성화인의 권위에 따라야 할지 갈피를 전혀 잡을 수 없었다.
"이건 어디서 난 거냐?"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졌다. 나를 제외하고도 일곱 명이나 목격했다."
곧 일곱이 나와서 성화신의 이름과 자신의 영을 걸고 맹세했다. 만약 거짓이 조금이라도 섞이면 죽어서 성화신의 땅에 이르지 못할 거라는 독한 맹세에 거령신 편에 선 자들은 사기가 하늘을 뚫었고 홍두명 편에 선 자들은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홍두명은 두말하지 않고 양피지를 허공에 던졌다. 높이 올라간 양피지가 빠른 속도로 추락하여 거령신의 발치 앞에 떨어졌다.
"이렇게 떨어졌는가?"
"아니다. 인간이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코를 막고 짐승처럼 살 때, 갑자기 나타나셔서 따뜻한 불과 함께 말과 글과 지혜를 건네주던 것처럼, 우리에 대한 사랑과 가여움을 듬뿍 담고 불꽃처럼 천천히 내 손에 내려앉았다."
거령신은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양피지를 들어 올렸다. 바닥을 뒹굴던 양피지의 모래를 조심스럽게 털어낸 거령신은 양피지를 펼쳐서 모두에게 성화인을 확인시켰다.
"보라. 어둠마저 감싸는 성화신의 자비로움을. 성화인이 아니라면 이렇게 검은 자국을 낼 수 있는 인장이 세상 어디에 또 있다는 말이냐?"
고통스러운 갈등의 시간을 끝낸 홍두명은 결심을 내리고 철괴를 꽉 잡았다. 자비로운 성화신은 홍두명에게 단 한 번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그러나 우문현성은 주정뱅이 아버지에게 맨날 매타작을 당하는 자신을 구원했고 무공을 가르치고 호법으로 만들어줬다. 그리고 일월교 교주 자리도 양보하고 이후 황제가 되면 홍두명을 왕으로 봉할 것을 약속해줬다.
홍두명이 호리병 뚜껑을 열어 술을 마시기 시작하자 거령신 뒤에 선 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일월교의 교주가 성화인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실이 전혀 믿기지 않아 한순간 사고를 멈췄다. 교주라면 가장 신실한 교도여야 하고 성화신을 대신해 교도들을 보호하는 대리자여야 한다. 꿈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자 모두가 당황했다.
"성전이다. 성화신을 위하여!"
거령신이 커다란 화령부(花鈴斧)를 들고 홍두명을 향해 덮쳐갔다. 여성스러운 화령부라는 이름과 달리 무척이나 살벌한 도끼다. 이랑신 역시 쌍첨양인도를 들고 뒤를 바싹 따랐다. 전설 속 이랑신의 삼첨양인도는 세 끝이 가까이 몰려있는데 쌍첨양인도는 두 끝이 바깥으로 벌어져 있다. 그래서 찔리면 출혈이 심해 죽지 않아도 전투력을 빠르게 상실한다.
홍두명의 호리병은 어른 몸통만큼 크다. 쇠로 만들었고 안에는 늘 술이 차 있다. 술이 쇠보다 가볍다지만 결코 만만한 무게가 아니다. 마음을 굳힌 홍두명은 성화신을 떠나보내면서 생긴 상실감을 맞은편의 배은망덕한 자들에게 풀기로 마음먹었다. 호리병 뚜껑을 꼭 닫은 홍두명은 내력을 한껏 실어서 호리병을 앞으로 던졌다.
눈치가 빠른 자들은 바닥에 엎드려서 호리병을 피했지만, 앞 사람에게 시야가 가렸거나 흥분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눈에 뵈는 게 없는 자들은 홍두명의 호리병과 제대로 부딪쳤다. 빙글빙글 도는 호리병은 여럿과 부딪치고도 그 속도가 전혀 줄지 않았다. 허공에서 휙휙 돌던 호리병은 홍두명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홍두명이 보여준 한 수는 바닥을 기던 같은 편 사기를 단숨에 끌어 올렸고 하늘을 찌르던 상대의 사기를 끌어 내렸다. 감산추의 기다란 봉 끝에 둥그런 쇳덩이가 달린 거명추(巨鳴鎚)가 거령신의 도끼와 부딪쳐갔다. 또 다른 호법이 사 척 길이의 장검을 들고 이랑신의 쌍첨양인도에 맞섰다. 홍두명은 두 호법이 반도들의 수괴를 묶어둔 틈을 타서 반대편에 선 교도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철괴를 한 번 휘두르면 두셋이 쓰러졌고 호리병을 한 번 던지면 대여섯이 박살 났다. 적아가 섞여 있어서 주독을 사용하지 못하지만, 수준 낮은 무인들을 상대로 홍두명은 절대의 위력을 보였다. 누구의 공격도 홍두명에게 피해를 주지 못했고 그 누구도 홍두명의 두 번째 공격을 볼 수 없었다.
"소형제, 저 검을 든 자를 처리해주게."
은밀하고도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는 건 유신과 당우형이다. 난잡한 전장에서 암기는 위력이 다소 떨어질 수밖에 없기에 전영득은 유신에게 부탁했다. 심룡척을 손에 잡은 유신은 산책하듯이 천천히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이랑신과 맞상대하는 자의 말소리가 귀에 들렸다.
"내 검이 네 목을 베고 싶어 매일 밤 구슬피 울었다. 오늘 드디어 소원을 이루게 되었으니 이름을 검희(劍喜)로 바꿔야겠구나."
예전에 무예를 겨루다가 이랑신에게 귀 하나 잘린 자는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검읍(劍泣)이라는 별호를 이름으로 사용했다. 새 검법을 익힌 후 계속 도발했지만 이랑신이 모른척했고 검읍도 주변 눈치 때문에 너무 몰아가지 못했다. 그러다 드디어 정정당당하게 이랑신에게 복수할 기회가 생겨 흥분한 나머지 입을 쉬지 않고 놀렸다.
이랑신은 검읍의 주둥이를 빨리 다물게 하고 싶지만, 검읍이 새로 익힌 검법의 위력이 만만치 않고 초식도 생소하여 상대하기 어려웠다. 그뿐만 아니라 뒤에서 교도들의 비명이 연신 울려 퍼져 마음이 급해지고 초식이 조금씩 흔들려 우위를 잡기는커녕 오히려 밀리고 있다.
그때 덩치가 엄청나게 큰 자가 갑자기 나타났다.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았는지 모를 덩치는 정확히 검읍의 검도 닿지 않고 이랑신의 쌍첨양인도도 닿지 않을 곳에 서서 손에 든 검으로 검읍의 목을 향해 천천히 찔렀다. 이상한 건 검읍이 자신의 목을 찔러오는 검을 못 본 사람처럼 이랑신을 향한 공격을 전혀 늦추지 않았다.
느린 검이 목에 거의 다가갔을 때야 겨우 발견한 검읍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목을 움직여 검 끝에 갖다 댔다. 목에서 붉은 핏줄기가 뿜어져 나오자 몸이 뻣뻣해지며 검읍의 눈알이 뒤집혔다. 쓰러지려는 검읍을 발로 힘껏 걷어차서 감산추에게로 보낸 덩치는 땅에 떨어진 검을 주워들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모두와 다르게 흐르던 이랑신의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갑자기 나타나서 검읍을 처리한 자를 찾고 싶지만, 날아온 검읍의 시체 때문에 허둥지둥하는 감산추를 처리할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무위가 비슷한 감산추와 거령신의 싸움에 이랑신이 끼어들자 싸움이 빠르게 기울었다.
화령부의 압박에 대응이 늦어져서 쌍첨양인도에 두 번이나 찔린 감산추는 멈추지 않고 흐르는 피에 점점 힘이 빠지다가 거령신의 화령부를 막아내지 못하고 대가리가 쪼개졌다. 홍두명을 제외하고 무공이 가장 강한 둘을 처리한 이랑신과 거령신은 사기 백배하여 홍두명을 덮쳤다. 갑자기 도와준 자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점점 줄어드는 같은 편의 숫자에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갑자기 전세가 바뀌자 중립에 서 있던 자들이 슬금슬금 거령신 편으로 가담하기 시작했다. 아까는 검읍과 감산추가 상대 고수를 잡고 홍두명이 판을 쓸던 광경이었다면, 지금은 거령신과 이랑신이 홍두명을 잡아두고 다른 자들이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홍두명의 편에 선 자들을 하나씩 참살하기 시작했다.
거령신과 이랑신을 제외하고도 긴 병기를 든 자들 십수 명이 홍두명을 공격하며 반격할 틈을 주지 않았다. 호리병을 휘두르며 수비하던 홍두명은 자기편에 선 수하가 하나씩 줄어드는 걸 보고 결단을 내려 철괴를 크게 휘둘렀다. 무공이 약한 자들은 뒤로 성큼 물러났지만 무공이 강한 자들은 철괴를 피한 후 빈틈을 사정없이 찔렀다.
공격을 대충 피하며 홍두명은 호리병의 술을 꿀꺽꿀꺽 삼켰다. 병장기 몇이 홍두명의 몸에 적중했으나 심후한 내공 때문에 치명적인 상처는 입히지 못했다. 그래도 날카로운 병장기에 찔린 곳에서는 피가 배어 나왔다. 그러건 말건 술을 들이켜던 홍두명이 입으로 주독을 뿜어냈다.
"비겁하게 독을 쓰다니."
거령신의 외침에 당우형이 울컥했다. 둘을 도우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는데 오른손에 잡은 비도를 슬그머니 거둬들였다. 홍두명은 멀리서 던져오는 병장기를 가볍게 피하거나 그냥 맞아주면서 계속 술을 들이켰다.
"흡, 하!"
홍두명은 뚜껑도 닫지 않은 호리병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아직 꽤 남은 술이 호리병 주둥이로 튀어나왔다. 그러나 누구도 호리병에서 흘러나온 술의 향기에 취하지 못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이 흔들리며 십 장 안에 있던 자들이 전부 쓰러졌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홍두명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성화인의 권위를 부정하며 마음이 잔뜩 흔들렸는데 무공이 훨씬 강하다고 믿고 있던 검읍과 감산추가 너무 빨리 죽었다. 성화신이 벌을 내리는 게 아니냐는 생각에 겁을 먹은 홍두명은 과도한 내력을 움직여 지금까지 한 번도 성공시키지 못했던 고산종(敲山鐘)의 수법에 처음 성공했다. 바로 한복명이 주먹으로 펼치던 성명 절기 고산종을 호리병으로 펼친 것이다.
"한 씨의 무공을 저놈이 어떻게?"
한복명의 고산종은 주먹으로 펼치고 상대의 몸을 두드리는 무공이다. 홍두명이 비록 호리병으로 바닥을 때려서 펼쳤지만 전영득은 고산종의 수법임을 놓치지 않았다. 조상 몇 대 백련교의 교도였던 남무천과 달리 전영득은 교주 자리를 이어 온 한씨 가문에 대한 경외심이 전혀 없어서 교주라는 호칭을 생략했다.
십 장 범위에 있던 대부분이 즉사했고 내공이 심후한 자들은 입과 코로 피를 쏟아내며 비실거렸다. 이랑신과 거령신도 작지 않은 내상을 입은 듯 입가로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자신의 무위를 초월하는 엄청난 성과를 냈지만 홍두명의 마음은 전혀 흡족하지 않았다.
'제길, 내 마음인데도 모르겠구나.'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자들을 죽이는 데도 전혀 통쾌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뭔가를 해준 적이 없는 성화신인데, 분명 우문현성이 보여준 모습이 더 신 같았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갑갑하고 허전한지 알 길이 없다.
'다 죽인다. 다 죽이고 성화신마저 죽여버리겠다.'
"홍두명이 미쳤다. 다들 도망쳐라."
하나만 남은 눈이 흰자위가 보이지 않았다. 검은자위는 그대로인데 흰자위는 피에 담갔다 꺼낸 듯 빨갛게 물들었고 하나뿐인 작은 눈으로 세상을 삼킬듯한 무시무시한 광기를 쏟아냈다. 이랑신이 먼저 몸을 돌려 혁선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그러나 달리던 자들은 멀리 가지 못하고 쓰러졌다. 홍두명이 자기 주변에 접근하지 못하게 주독을 퍼뜨린 줄 알았는데, 사실 그 뒤로도 은밀하게 넓은 범위에 주독을 보냈다. 평소라면 불가능했겠지만, 지금의 홍두명은 절대고수라는 말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수라고 반드시 독에 저항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주 간단한 예로 은무성이나 남무천은 독에 대응하는 능력이 매우 약하다. 십 년 전의 약관도 되지 않은 당우형에게 견줘도 부족함이 많다. 거령신이나 이랑신 역시 마찬가지다. 가르치는 대로 배웠고 무공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지 않았기에 몸에 들어온 적대적인 기운에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보았느냐? 성화신도 나를 어찌할 수 없다. 내게 신은 단 한 명뿐이다."
승리의 기쁨에 발을 담그기도 전에 화공당과 금갑당의 얼마 남지 않은 무인은 홍두명의 철괴와 호리병을 맞이해야 했다. 홍두명의 반대편에 섰던 자들과 달리 이들은 무방비 상태로 당해서 더욱 처참했다. 홍두명은 광기를 줄줄 흘리며 눈에 보이는 족족 철괴나 호리병으로 부수고 으깨고 박살 냈다.
직접 쳐죽인 사람이 이백 명이 되고 독으로 중독시켜 죽인 사람은 이백이 넘는다. 자기들끼리 싸우다 죽은 자가 수십이고 중립이랍시고 멀찍이 구경하다 봉변을 당한 자가 스물은 된다. 살아있는 사람을 다 쳐죽인 홍두명은 조금도 풀리지 않은 속에 애꿎은 술만 꿀꺽꿀꺽 삼켰다. 그러다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다 죽였는데 여전히 서 있는 자들이 눈에 띄었다.
"다 죽여버린다."
홍두명은 비틀거리며 그자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묵묵히 서 있던 자들이 얼굴을 감싼 천을 벗었다. 한때 함께 교를 위해 싸웠던 전영득과 남무천이 얼굴을 드러내고 교주가 기회가 되면 생포하라던 당우형이 보였다. 자기 눈알 하나 앗아간 애송이가 보였고 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애송이 하나도 있다.
그리고 은무성과 무척 닮은 중년 사내도 있었다.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지 눈을 끔뻑였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문득 진실을 깨달은 홍두명이 전영득을 향해 삿대질했다.
"이 개자식. 다 네놈 음모였구나. 너 나한테 왜 그래? 나한테 왜 그랬냐고!"
주판으로 호리병을 막은 전영득은 뒤로 열 걸음이나 물러섰다. 내공의 양은 분명히 전영득이 더 많은데 밀린 것도 전영득이다. 전영득을 물리친 홍두명은 철괴로 유신을 후려쳤다.
"내 눈알 돌려내!"
유신 역시 심룡척으로 수비했지만 몇 걸음 밀려났다. 홍두명은 이번에 남무천을 보고 소리쳤다.
"넌 왜 그리 잘났어!"
남무천은 유신이 주워다 준 검읍이 쓰던 검으로 홍두명의 호리병을 막았다. 전영득이나 유신과는 달리 남무천은 스스로 물러섰다. 남무천의 검이 산산조각이 나며 파편이 강한 힘을 담고 사방으로 퍼졌다.
당우형이 스쳐 지나가는 검편을 잡은 후 백화수를 펼쳤다. 은밀하고 빠르게 날아간 검편이 하나뿐인 눈과 눈썹 사이에 박혔다. 홍두명은 피가 눈 앞을 가리자 비명을 지르며 호리병으로 바닥을 미친 듯이 내리쳤다.
바닥을 통해 밀고 당기며 상하로 흔들고 좌우로 요동치는 거력이 전해왔다. 은무성은 급히 계성을 들어서 목말을 태웠다. 바닥으로부터 전해지는 힘에 저항하다가 은무성은 뻘건 피 한 모금 뱉어냈다. 열 살에 화령초를 먹고 내공을 얻은 후 처음으로 내상을 입었다.
당우형의 몸은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꽃과 같았다. 다급한 나머지 온몸으로 백화수를 펼친 것이다. 연습은커녕 상상한 적도 없어서 자세가 어설프고 동작이 어색하다. 당우형 역시 심후한 내공에도 불구하고 내상을 입고 피를 연신 토해냈다.
남무천은 바닥을 연신 굴렀다. 이 천재적인 무인은 바닥에서 전해지는 힘을 전혀 거스르지 않고 비루한 나귀처럼 열심히 굴렀다. 그러나 역시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피를 토했다. 그러나 내공이 훨씬 많은 앞선 둘에 비교해 내상이 가벼웠다.
전영득은 주판을 앞에 놓고 알이 튕겨 오르는 모습을 확인하며 내공을 움직였다. 주판을 꽉 채운 알들이 어떤 힘이 전해져 오는지 전영득에게 자세히 알려줬다. 전영득은 주판이 알려주는 대로 내공을 움직여 바닥에서 올라오는 힘을 흘리거나 상쇄했다. 그러다 주판이 박살 나면서 전영득도 쓰러졌다. 이 모든 건 동시에 그리고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해가 솟은 지 한참이 되는데 유신의 마음은 여전히 달빛이 가득 찼다. 밀고 당기고 흔들고 하지만, 결국 핵심은 밀고 당기는 것이다. 흔드는 힘 역시 밀고 당기는 힘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흔들리는 땅을 평지처럼 밟고 유신이 사뿐사뿐 움직였다. 가벼운 듯 보이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사실 천근 거력을 담았다. 미는 힘은 당기고 당기는 힘은 밀면서 유신은 피눈물을 흘리며 미친 듯이 바닥을 내려치는 홍두명에게 접근했다.
달빛이 스며들 듯, 모래가 흐르듯, 눈이 내리듯, 서리가 끼듯, 파도가 밀려오듯, 계절이 바뀌듯. 아주 당연하게 유신의 검이 홍두명의 목을 뚫었다. 흔들림이 멈추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멸망한 왕국의 옛터에 오직 유신만이 땅을 밟고 서 있었다.
- 작가의말
제가 비축분의 소제목을 잘못 달아서, 이번 편이 사라진 줄 알고 엄청나게 놀랐습니다. 15쪽이나 되는 분량이고 무척 열심히 썼거든요.
종교나 신앙에 대해 논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종교는 신을 의인화하여 인간의 인지 범위로 끌어내렸습니다. 합리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간 사회의 구조는 이런 종교 덕분에 유지할 수 있었고 인류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모든 사물이 그렇듯이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어 긍정적인 역할만 있을 수는 없죠. 어차피 종교를 만든 것도 유지하는 것도 ‘인간’이니까요.
홍두명을 통해 의심을 불허하는 신앙과 스스로 선택한 신념 혹은 이득이 충돌하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걸 통해 딱히 표현하고자 하는 종교관이나 사상은 없습니다. 제 출중한 필력에 과몰입하여 댓글로 꾸짖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Comment '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