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왕
남무천과 당우형 그리고 전영득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깨달음을 얻었다며 다스림에 들어간 유신은, 새벽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그리고 바로 초현을 업고 달리기 시작했는데, 셋이 전력을 다해야 겨우 놓치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쉽시다."
유신이 멈추자 큰 숨을 몰아쉰 당우형이, 초현의 맥을 짚어보고 침을 이리저리 꽂았다. 고수인 당우형이 진짜로 숨이 찬 건 아니지만, 왠지 가슴이 갑갑해서 숨을 크게 쉬었다.
"소형제, 무슨 깨달음을 얻은 거요?"
"백화수에 관해서 의형께서 깨달음을 얻으셨잖습니까. 저도 아까 극을 벌이고 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우행 진인께서 저보고 푸른 대나무를 키워서 단풍을 피우라고 했거든요. 우선 푸른 대나무는 제 죽절공, 즉 구절신공을 말하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단풍을 보면 대부분 손 모양으로 생겼습니다. 잎이 다섯으로 갈라져서 마치 손 같죠. 매화의 꽃잎이 여섯 개라고 하지만, 사실 다섯 개도 있고 여덟 개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단풍도 여섯 개나 일곱 개도 있지만, 보통은 다섯이라 여깁니다."
"그게 깨달음과 대관절 무슨 상관이오?"
"우문현성은 제 무공의 이름이 구절신공이라고 했고, 저는 그 말에서 단서를 얻었습니다. 대나무의 마디는 겨울마다 성장을 멈추며 생기는 거죠. 구절이 되려면 아홉 번 성장을 멈춰야 합니다. 어제까지 저는 단전이 총 여덟 개였습니다. 제가 단전을 다칠 때마다, 새로운 단전이 하나씩 추가되었습니다. 물론, 여덟 번째 단전은 다치지 않고 만들어냈습니다."
"부럽군, 부러워."
"사실 제가 걸어온 길은 마도였습니다. 원래는 세월의 숙성을 통해 자연스럽게 단전을 늘려가야 하는데, 제가 특별한 체질이어서 짧은 시간에 단전이 급격하게 늘었습니다. 원래는 크게 문제가 되어야 하는데, 의형의 배려와 화령초의 열매를 복용함으로써 극복하게 되었습니다."
의형의 배려는 사지 백해를 타통해준 만류분해의 시술과 독왕이 가르쳐 준 토납공을 말한다. 거기에 나한당주가 가르쳐 준 역근경의 서른여섯 동작까지 합쳐져서, 유신은 커다란 위험을 의도치 않게 이겨냈다.
"마디 아홉 개는 아홉 번의 확장, 즉 열 개의 단전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열 개의 단전을 다섯씩 음양으로 나눈 다음, 음과 양을 순서대로 이어서 단풍잎 모양을 만드는 겁니다. 제가 품은 기운이 단전 아홉 개를 채우고도 남는데, 지금까지 몰라서 미뤄두고 있었습니다. 어제 우연히 깨달음을 얻어 단전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이제 단전 하나만 더 만들면, 우행 진인이 말한 경지에 이르는 건가?"
전영득의 질문에 유신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문현성은 구절신공이 무학과 내공이 결합한 심법이라고 했습니다. 하루빨리 내공에 알맞은 초식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럼 구음진경 조금 익힌 우문현성을 쉽게 이기겠군."
"강한 무공을 익힌다고 다 고수가 되는 건 아니죠. 그래도 첫 대면처럼 막막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몸에 불을 두르는 건 어떻게 한 거요? 정말 멋있던데."
남무천이 은근한 말투로 물어오자, 유신은 웃어버렸다. 예전에 남무천과 처음 만났을 때, 삼매진화를 사용하는 남무천을 무척 부러워했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았는데, 남무천이 오히려 유신을 부러워한다.
"손으로 피우는 삼매진화를 온몸으로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는 특별한 무공을 익혀 전신으로 내기를 방출하고 회수하며 내외 순환할 수 있습니다."
"제길, 거시기 빼고 소형제한테 전부 밀려버렸어."
"제가 평소에는 겸손한 편입니다."
### 快劍神龍 龍遊迅 ###
사천 당문과 운남 약왕곡 중 어디로 갈지 아주 잠깐 고민했었다. 당우형은 당문에 가봤자 침술이 자신을 능가할 사람이 없고, 독왕보다는 약왕이 치료하는 능력이 더 낫지 않겠냐는 이유로 약왕을 추천했다. 물론 거리도 약왕이 있는 대리가 더 가깝다.
약왕이 사는 곳은 전영득이 잘 알고 있다. 남궁용현을 쫓아 약왕을 한 번 찾아간 것이 얼마 전이었고, 대리의 지형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다. 오히려 광서에서 당문까지 가는 길에 산이 즐비하여 길을 잘못 들어설 가능성이 크다.
잠을 자지 않은 덕분에 광서에서 약왕의 거처까지 사흘이 걸렸다. 물론 중간중간 초현의 심맥을 안정시키느라 멈춰서 휴식을 취했다. 당우형의 천재적인 침술 덕분에, 초현은 광서에서 출발할 때보다 조금 나아졌다.
"치료할 수 없네."
초현의 맥을 잠깐 짚어 본 약왕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좋은 보약을 먹었는지 머리와 수염이 무척 검고, 얼굴도 탱탱하다. 거기에 얼굴뿐 아니라 몸의 피부도 붉은빛이 감돌아 건강해 보였다.
"아니. 저도 석 달 정도 넉넉하게 시간 들이면 완치는 어려워도 목숨은 붙여놓을 수 있습니다. 약왕이라 불리는 분이 치료할 수 없다뇨?"
"죽을 상처를 입었으면 죽어야지. 왜 그걸 굳이 치료해서 살린다는 말이오?"
"아니, 사람 목숨 살리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당우형이 언성을 높이자, 유신이 슬며시 말렸다. 유신의 속도에 맞춰 사흘 달려야 했고, 중간에 쉬는 시간에도 당우형만은 휴식하지 못하고 초현을 돌봐야 했다. 그래서 현재 정서가 조금 불안하다.
"옛날에 저 산에 호랑이가 살았네."
약왕은 당우형의 불경을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이 그 호랑이를 잡았지. 쩍하면 산에서 내려와 가축을 물어갔거든. 목돈을 주고 전문 사냥꾼들을 불러서 호랑이를 잡았어. 호랑이가 죽으니 토끼를 비롯한 풀 뜯는 짐승들이 번성하기 시작했네. 그 짐승들을 잡으려고 사냥꾼이 몰려왔고, 사냥꾼들이 잡은 짐승의 가죽을 사려고 장사꾼이 몰려왔네."
느긋한 약왕의 말투에 당우형은 부아가 치밀었지만, 유신이 만류로 화를 참았다.
"그런데 사냥꾼들은 돈이 되는 짐승만 잡았네. 돈이 안 되는 짐승들이 크게 번성하여 산의 풀과 나무를 다 먹어버렸지. 먹을 게 적어지자 짐승들이 굶어 죽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갔네. 사냥감이 적어지자 사냥꾼이 떠났고, 덩달아 장사꾼도 떠났네. 결국, 마을 사람들도 다 떠났고 나만 남게 되었다네."
"그게 어르신이 환자를 구하지 않는 거랑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유신의 듣기 좋은 목소리에 약왕이 미소 지었다.
"죽이지 말아야 할 것을 죽여서도 안 되고, 죽어 마땅할 것을 살려서도 안 되네.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야. 나무 한 그루 잘못 베어 수십 명의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네. 인과 관계는 너무 오묘해서 한낱 인간이 이해할 바가 아니네. 괜히 내 잘못된 선택으로 무고한 사람이 해를 당하면 안 되지 않은가?"
"그럼 아무도 치료해주지 않고 어찌 약왕이 되셨습니까?"
"치료하지 않아도 살 사람이라면, 당연히 치료해서 제대로 살게 해야지. 마찬가지로 죽을병이라면, 그대로 죽게 놔둬야 하네. 생로병사는 세상의 법도이니, 한낱 인간인 내가 당연히 법도에 따라야 하지 않겠소?"
"내가 목숨을 붙여 놓으면, 완치시키실 겁니까?"
당우형이 도발하자, 약왕이 허허 웃었다.
"자네가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왜 굳이 나를 찾아왔는가?"
"내가 치료하면 목숨만 붙여놓고 사람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약왕 어르신을 찾아온 겁니다."
"다친 게 심맥뿐이지 않은가? 목숨만 붙여놓으면 사람 구실 넉넉하게 할 수 있을 것이오."
"제가 치료하면 무공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무공을 안 쓰면 먹고살기 힘든 사람인가? 천하에 무공을 모르는 사람들 다 잘살고 있지 않은가?"
"내가 목숨만 붙여놓으면, 심맥을 완치시켜주시겠습니까?"
당우형은 약왕과 말을 섞는 게 힘들었다.
"무공을 안 펼친다고 사는 데 지장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명백한 거절 의사에 당우형은 화가 났지만, 유신이 말리자 참았다. 일행 중에서 초현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유신이니, 화가 나도 유신이 더 났을 것이다.
"약왕 어르신. 만약 제가 어르신을 찾아온 환자에게 치료하면 살 수 있고,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상처를 입힌다면, 약왕 어르신은 환자를 살리시겠습니까 그대로 방관하시겠습니까?"
약왕은 침묵했다. 세상에 완벽한 진리가 없듯이, 허점이 없는 원칙도 없다. 유신이 말한 대로 행동하면, 약왕에게 치료받으러 오는 사람은 전부 죽는다. 약왕의 원칙을 알기에 죽을병에 걸린 자들은 잘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원래 살 수 있는 자들이 치료받으러 왔다가 목숨을 잃게 되는 셈이다.
"여기 제 처남도 고수와 겨루다가 심맥을 다친 겁니다. 이건 높은 곳에서 실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을병이 아니라 사고를 당한 게 아닙니까? 그것도 본인이 실수해서 실족한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이 밀어버린 거나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저 정도 고수를 심맥만 다치게 하다니. 천하에 그런 사람이 있단 말이오?"
유신은 일행과 눈을 맞추고 난 뒤, 솔직하게 말했다.
"검왕 우문현성입니다."
약왕이 몸을 비틀거렸다. 넘어질 정도로 심하게 휘청인 건 아니라서, 굳이 부축할 필요는 없었다.
"치료하겠네. 시진아, 약재를 준비하거라."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에게 일행은 들어본 적도 없는 약초 이름과 그 양을 말해주었다. 맨날 약초를 만져서인지 손이 누런 아이는, 적지도 않고 그저 듣기만 했다. 수십 가지 약초 명과 그 양을 다 기억했는지, 고개를 빙빙 돌리며 창고로 보이는 허름한 건물로 걸어갔다.
"구명지은에 꼭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혹시 필요한 일 있으시면 마음껏 분부 내리십시오."
약왕의 마음이 변할까 봐 걱정된 유신이 쐐기를 박았다. 하늘의 별을 따오라고 해도 무조건 고개부터 끄덕이고 볼 일이다. 그러나 약왕은 머리를 저으며 보답을 거절했다.
"예전에 죽을 상처를 입은 자를 구해준 적이 있소. 그런데 그자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소. 그래서 인간의 생사에 함부로 개입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는데, 그때 구해준 자가 바로 우문현성이오. 이 청년은 우문현성에게 해를 입은 것이니, 마땅히 내 책임이오."
넷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언의 합의를 이룬 후, 유신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남궁용현이라는 자가 혹시 찾아온 적이 있습니까? 전대에 검왕이라 불리던 백리철과 동행했을 겁니다."
"안 왔네. 최명판관은 어찌 되었소?"
"최명판관은 백련교 무인들에게 죽었습니다."
"내 어깨에 목숨 하나가 또 얹어졌구나."
눈을 감고 탄식하던 약왕이 한참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백리철과 최명판관에게 남궁용현의 일을 알려준 사람이 바로 나요. 예전에 중원에 가서 이상한 환자를 치료해준 적이 있소. 그때 알게 된 사실인데, 누군가가 어린아이에게 수작을 부려 이상하게 만들었소. 그때 나는 완치했다고 자신했는데, 후에 그 아이가 광증이 도져 자결했소. 그래서 비슷한 증상의 아이를 찾아다닌 적이 있었고, 남궁용현도 그 덕분에 발견했소."
일행은 숨조차 죽이고 약왕의 말을 경청했다.
"수작을 당한 아이는 하나같이 머리가 총명하고 야심이 크며 심계도 깊소. 무공에 자질이 뛰어나고 글공부에도 재능을 보이며 외모도 무척 뛰어나오. 그리고 내가 치료하던 아이 중 하나가, 자결하기 전에 내게 섬찟한 말을 해줬소."
약왕은 말하는 것조차 두렵다는 듯, 손을 약하게 떨었다.
"자기는 그저 껍데기라고 했소. 이 껍데기를 차지할 주인을 위해, 껍데기를 훌륭하게 키우는 역할이라고 말했소.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누군가가 찾아와서 자신을 내쫓는다고 했소. 그자가 대신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자기 행세를 할 거라고, 자신은 두 번 죽는 거라고 울면서 말했소."
유신이 팔을 만지니, 소름이 오돌토돌 돋았다. 일류 이상의 고수는 심력도 일반인보다 강하기에, 웬만해서 소름이 돋지 않는다. 그러나 약왕이 한 말은 너무나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데 남궁용현은 전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성공작'과 '실패작'의 차이지. 남궁용현은 성공작이오. 실패작들은 미쳐버리거나 자결하거나, 예외 없이 둘 중 하나였소."
"그럼 모용부영도 성공작입니까?"
"나도 다 아는 건 아니오. 성공작 중에서는 유일하게 남궁용현만 알고 있소. 최명판관의 부탁으로 남궁가에 찾아가 남궁용현을 치료해준 적이 있소. 그때 발견한 거요."
유신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그런데 어찌 누군가가 남궁용현을 노릴 것을 알았습니까?"
"서신을 받았네. 누가 보냈는지 모르지만, 남궁용현의 껍데기를 누군가 노리고 있다는 내용을 적은 서신이 도착했네."
"약왕 어르신, 지난번에 저희가 왔을 때는 왜 이런 것들을 얘기해주지 않으셨습니까?"
"자네들이 잘 숨겼다고 생각했겠지만, 난 살기를 감지했네. 최명판관은 내 친우인데, 친우의 외손이 해를 입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럼 남궁용현이 여기에 왔었다는 말입니까?"
"오지 않았네. 난 알고 있는 사실을 자네들에게 알려주지 않았을 뿐,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네."
"백리철은 믿을만한 사람입니까?"
"백리철은 가족이 모두 백련교 무인에게 살해당했네. 껍데기의 주인은 대법왕이라고 했네. 아무래도 백리철 역시 남궁용현을 미끼로 복수를 노리는 듯하네."
- 작가의말
유신의 반격 : 평소에는 과하게 겸손할 뿐이다.
약왕의 손자 이름이 익숙하실 겁니다. 다만, 연도를 따져보면 당사자가 아닙니다. 할아버지는 시진, 아들은 공진, 손자는 시진, 손자의 아들은 공진, 이런 식으로 두 개의 이름을 번갈아 사용한다는 설정입니다. 즉 약왕의 이름도 시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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