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과 약
신발과 바짓단이 불에 타서, 맨발로 약왕곡까지 달려온 유신을 본 전영득은 깜짝 놀랐다. 셋이 가면 아주 가볍게 처리하고 돌아오리라 생각했는데, 유신의 모습이 조금 처참해 보였다. 거기에 남무천이 불에 탄 독전갈을 잘못 주워 먹고 배탈이 나서 얼굴이 핼쑥했다.
"허, 내공 고수가 배탈이 나다니. 참으로 대단하구나."
갑자기 얻은 깨달음을 펼치느라 작은 내상을 입었고, 그 작은 내상 때문에 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생긴 문제다. 내상을 입었을 때는 육식도 금하고 물도 최대한 조심해서 조금씩 마셔야 하는데, 남무천은 식탐을 이기지 못했다.
"약왕 어르신, 가르침을 청합니다."
약왕과 소원했던 당우형이 공손히 읍을 올리며 배움을 청했다. 당문은 오독교를 엄청나게 얕잡아 보았는데, 이번에 모아놓은 수많은 독물을 보고 매우 놀랐다. 독의 질은 당문과 비교하기조차 미안할 정도지만, 그 양은 참으로 어마어마했다. 만약 저 독물들을 전부 전장에 풀어놓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지 모른다.
'당문도 옛날에는 절독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독을 배우려는 자가 무척 적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수십 가지 절독을 보유하고 있고, 대부분은 해독약까지 만들어냈다. 오독교도 언젠가는 저런 독물들을 자유자재로 부리게 될지도 모른다.'
비가 오기 전에 미리 지붕을 수리해야 하고, 가뭄이 오기 전에 저수지에 물을 채워야 한다. 오독교의 장원을 전부 불태웠다고 해서, 오독교의 뿌리까지 뽑은 게 아니다. 오독교의 뿌리는 이곳에 사는 수많은 부족이다. 수많은 독물을 상대로 비싼 독을 쓰는 건 너무 낭비다. 그러니 약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먼저 내 손자에게서 배우게."
당우형은 전영득과 함께 어린 시진에게서 약초를 공부하게 되었다. 독도 다루는 법만 배웠지, 아직 만들고 배합하는 법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시진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데도 꽤 벅찼다.
다시 목왕부로 가기 싫었던 유신은, 부상을 핑계로 목왕부에 서신을 띄웠다. 오독교의 장원을 급습하여 전부 죽이고 독물도 모조리 태워버렸다는 말에, 목왕은 바로 대군을 결집하여 일전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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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죄가 하늘에 닿았구나."
식사를 끝낸 후 버섯을 우린 차를 마시다가, 약왕이 갑자기 눈물을 떨궜다. 오독교가 무너지면서 반란군이 여지없이 밀렸고, 목왕이 본보기로 몇 개 부족을 지워버렸다.
"그게 왜 어르신 잘못입니까."
당우형의 말에 약왕은 전혀 위로받지 못했다.
"내가 우문현성을 구하지만 않았어도,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도탄에 빠지지 않았을 테지. 내가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면서 수십만 명을 죽인 셈이네."
유신은 마음이 갑갑해 왔다. 우문현성이 세상을 자기 입맛에 맞게 바꾸려던 것과 마찬가지로, 약왕의 말 역시 유신에게는 무척 불편했다. 인간의 모든 행위 역시 무위자연에 속한다는 생각을 깨달음의 기저에 깔았는데, 우문현성에 이어 약왕도 유신의 주춧돌을 자꾸 흔들고 있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내 생각이 절대적으로 맞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첨예(尖銳 - 날카로운)한 모순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약왕이 우문현성을 살리지 않았다면, 세상의 흐름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교룡방은 멸문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독고거병은 사부가 가르치는 무공을 그대로 익히다가 폐인이 되었거나, 천운으로 엄청난 고수가 되었을 것이다.
전영득은 우문현성의 뒤를 이어 일월교의 교주가 되었을 것이고, 마교 교주로 엄청난 악명을 쌓았을 수도 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어도 악명이 쌓이는 게 마교 교주의 자리이고, 전영득의 성격이라면 세력을 적극적으로 넓히며 빠른 속도로 위세를 떨쳤을 것이다.
남무천이 천재라지만, 우문현성의 가르침으로 도약한 건 사실이다. 만약 우문현성이 약왕의 구함을 받지 못하고 죽어버렸다면, 남무천은 그저 평범한 고수가 되었을 수도 있다.
'나는 의형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면 초설도 만나지 못했고 귀소도 만나지 못했겠지.'
무위자연이란, 무언가를 해도 세상의 흐름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걸 무위자연이라고 하지 않는다. 해야 할 소임을 수행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게 무위자연이다.
'무위지경에 이르러 심마와는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고처불승한(高處不勝寒)이라는 말이 있다. 높은 곳에 있으면 추위가 심하다는 말이다. 높은 경지에 이를수록, 더 큰 심마가 찾아온다. 심마가 찾아온 줄도 모르고 그저 지나치는 때도 있고, 지금처럼 무공이나 경지에 영향 주지 않지만, 마음을 괴롭히는 심마도 있다.
"어르신, 약을 과하게 쓰면 사람이 죽고, 독도 적절하게 사용하면 사람을 살립니다. 우문현성을 살린 덕분에 더 큰 환난을 막아냈을지도 모릅니다."
"가정일 뿐이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마음이 죽는 것이다. 몸은 건강하지만, 나이가 먹어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서 약왕은 예전처럼 자책에서 자력으로 벗어나기 힘들어했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면 됩니다."
"나 혼자 힘으로 사람을 얼마나 살리겠나?"
"의서(醫書)를 써서 천하 사람들에게 병을 치료하는 법을 알리면 됩니다. 그 책으로 건강을 찾고 목숨을 부지할 사람이 수백만 수천만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벌떡 일어선 약왕의 눈에는 활기가 넘쳤다. 자신의 잘못은 돌이킬 수 없지만, 그 잘못을 덮을 방법을 당우형이 제시했다. 자기기만뿐일지도 모르지만, 약왕은 자신의 필생 경험을 글로 남기기로 했다.
방제학, 기경팔맥고, 빈호맥학 등 약을 짓는 법과 인체의 경맥에 관한 책들을 밤을 새우며 써 내려갔다. 그 때문에 초현의 치료를 도맡게 된 시진은, 콧구멍을 천으로 틀어막고 초현의 입에 약을 부었다. 자연스럽게 이 사태의 원인이 되는 당우형을 바라보는 눈이 곱지 않게 변했다.
당우형과 전영득은 약초를 배우느라 바쁘게 보내고, 독고거병은 검 두 자루를 들고 칠상팔하검을 참오했다. 남무천 역시 새로 얻은 검의를 더 쉽게 펼치려고 수련에 몰두하고 약왕은 책을 쓰느라 정신이 없다.
유일하게 유신만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어디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매일 수백 수천 번씩 외우던 청죽단풍검도 머리에서 지워버리고, 온종일 멍하니 앉아있거나 여기저기 서성거리기만 했다.
'약왕의 결정에 따라 세상의 흐름이 바뀔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연에 어긋나는 존재인가? 인간은 자연에 속한 일부인가 아니면 자연과 대치하는 위치인가? 인간은 다른 만물과 다르게 특별한 존재인가? 모든 인간은 같은 존재인가? 우문현성은 특별한 존재인가 아니면 모두와 같은 한낱 인간일 뿐인가?'
하나의 화두를 잡고 몰두해도 부족할 판에, 머릿속에는 의문만 끊임없이 솟아났다. 머리와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할수록 점점 더 마음이 갑갑하고 머리가 어지럽다.
'맹자가 그랬던가? 하늘이 사람에게 큰 시련을 내리는 건, 큰일을 시키기 위해서라고.'
억지로 생각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는 시도도 실패로 끝났다. 다른 생각이 길게 이어지지 않고, 저절로 고민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 심마만 이겨내면 호심정에서 보여주었던 위력을 다시 재현할 수 있는 것인가?'
희망적인 생각을 했지만, 마음에 조금의 여유도 보태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큰 고뇌 없이 승승장구해왔던 유신이고, 최악의 심마도 죽절공의 도움으로 부드럽게 넘겨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죽절공도 도움이 되지 않는지, 고민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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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남과 귀주의 반란은 쉽게 제압되었지만, 광서의 민란은 점점 불이 붙어갔다. 단순히 선동에 넘어가 일으킨 민란과 황실에 대한 원한을 바탕으로 일으킨 민란의 차이다. 황실의 명령에 무림맹이 오천 명에 이르는 무인을 광서로 파견했다. 담화궁은 물론 백련교의 고수들도 대거 광서에서 활약하며, 전장에서 암기로 장수를 해치거나 심지어 하독과 암살 등 수단을 통해 군의 중요 인물을 죽이는 걸 서슴지 않았다.
황실이 무림인의 존재를 묵인했던 건, 무인들이 관과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지 않으려는 노력 했기 때문이다. 관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무림인들이 알아서 벌했다. 백련교 역시 천하 백성을 모두 교도로 만들려는 목적이 있기에, 그 선을 아슬아슬하게 지켰다. 그러나 이번에 광서에서는 대놓고 황실과 적대했다.
탄압받던 원나라 시절과 다르게 명나라 치하에서 무림은 그 덩치를 무럭무럭 부풀렸다. 북원이 주적인 상황에서 지방의 치안은 무관이나 세가들이 맡아오면서 그 세를 크게 키웠던 것이다.
주체가 황제가 된 후, 북원의 세력이 크게 쇠락하여 평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강호 역시 백련교와 일월교의 거듭된 쇠락으로 평화의 시기가 도래한 듯했다. 그러나 외환(外患)을 처리한 후 손대야 할 것은 당연히 내우(內憂)이고, 내우는 마교뿐 아니라 세력이 과한 무림맹 역시 포함되었다.
황실의 수작을 걱정해야 하는 미묘한 시기에 백련교가 일으킨 반란은, 무림맹의 구미에 딱 들어맞았다. 그러나 너무 많은 무인을 보내 반란을 조기 종결하는 건, 무림맹도 원치 않는 결과다. 무림맹의 세를 과시해 좋을 건 없고 반란이 일찍 끝나면 황실과 힘겨루기를 해야 하니, 생각 같아서는 반란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세상의 흐름은 약왕곡을 비켜 나갔다. 목왕의 거듭된 요청도 부상을 핑계로 거절한 일행은, 심맥이 회복된 초현과 함께 약왕에게 작별을 고했다.
"살려주신 은혜, 잊지 않고 대대손손 보답하겠습니다."
"내 업을 내가 지운 것이라, 고마워할 필요는 없네. 다만 이후 억울한 사람 많이 돕고 살생을 경계하시게. 그러면 내 죽어서도 구천에서 자네에게 고마워할 걸세."
약왕은 마음에 마가 단단히 끼었다. 유신은 자신의 심마도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약왕처럼 평생 괴롭힘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문으로 가서 초설과 귀소를 만난다는 생각에도 마음 놓고 기뻐할 수 없었다.
광서에서부터 기절하다시피 했던 초현은, 당우형과 남무천 그리고 유신의 달라진 무위에 매우 놀랐다. 전영득과 함께 뒤에서 세 사람의 경공 경합을 지켜보며, 돌아가는 대로 무공 수련에 몰두해야겠다고 암암리에 다짐했다.
불과 사흘 만에 성도에 도착하고, 남무천과 전영득은 성도의 객잔에 짐을 풀었다. 유신과 당우형도 우문현성의 비밀을 파헤치고 훼방 놓는 일에 참여하기로 했다. 독고거병은 약왕의 거처에 남아 무공수련에 몰두하기로 했고, 초현은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고 역시 수련에 몰두할 생각이다.
가문의 어른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드리고 가족들과 즐거운 식사도 한 유신은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초설은 여전히 곤하게 자고 있었다. 옷을 차려입고 밖에 나가니, 벌써 잠에서 깬 귀소가 호가박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몸통과 비교하여 무척 큰 머리를 빙빙 돌리며 글을 외우는 둘의 모습이 무척 재밌어서, 유신은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처음에 글을 배울 때와는 달리, 이미 많은 글자를 배워낸 호가박은 글자의 모양과 뜻을 빠르게 외워갔다.
'수작에 당한 아이들은 하나같이 총명하고 무재가 뛰어나고 글도 빨리 익혔다네. 외모도 출중하고 심계가 깊고 야심이 컸네.'
유신은 급하게 방으로 돌아가서 훈을 찾았다. 두 아이 모두 약왕이 말했던 조건에 완벽히 부합한다. 그러나 훈을 손에 잡은 유신은, 차마 입을 대고 불기가 겁났다.
'약왕도 치료에 모두 실패했다고 했다.'
확인하지 않고 그저 놔두는 것 역시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머리로 아는 데 차마 행동으로 옮기기가 너무 힘들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고, 온갖 심마들이 유신의 마음에서 날뛰었다.
'무위자연이라. 여기에서는 부는 게 맞는 거다.'
마음을 굳게 먹은 유신은 입을 훈에 대고 힘껏 불었다. 털썩 아이가 쓰러지자, 유신은 황급히 달려갔다.
- 작가의말
여기에서 끊는 게 옳다고 배웠습니다.
글이 마감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몇 편으로 끝나버린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젠 떡밥들 회수하고 의문점들을 풀어야 하는 시기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본편을 다 끝내면, 외전이 몇 편 있습니다. 글의 내용과 관련 있지만, 조금 색다르게 풀어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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