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영지전(2)
47화.
탄환은 얼마든지 있었다. 렘 아저씨에게 맞을지도 모르지만 지켜 본 상태로는 렘 아저씨도 이대로라면 놈에게 당할것이다. 운이 없다면 렘 아저씨에게 총알이 날아 갈것이다.
퉁.
다시 한발이 놈을 향해 날아 갔다. 이번엔 왼쪽 얼굴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겨냥해 발사했다. 이번에도 빗나갔다. 하지만 헥터가 어떤 점을 느꼈는지 렘 아저씨에게서 급히 물러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때를 겨냥해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찬스였다. 움직이지 않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좀전보다 조금 더 놈의 왼쪽 얼굴에서 떨어진 곳으로 조준한 것이다.
"아!"
아까웠다. 놈의 오른쪽 귀가 관통되며 피가 뚝뚝 떨어져 내리는 모습이 스코프에 잡혔다. 헥터는 급히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무슨 말을 하면서 미친듯이 렘 아저씨에게로 짖쳐 들었다. 너무 빠른 움직임에 놈을 겨냥할수가 없어 스코프로 찬스를 엿보고 있을때 렘 아저씨가 한쪽 무릎을 꿇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무언가 큰소릴 지르며 헥터가 그런 렘 아저씨의 머리위를 향해 소드 브레이커를 내려 꽂을 자세를 취했다.
퉁! 퉁!
헥터가 렘 아저씨를 끝장낼 심산으로 잠시 멈춰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좀전보다 조금만 더 먼곳의 놈의 왼쪽 머리통을 겨냥해 탄창에 남아 있는 2발을 모두 쏘았다.
퍽!
마치 슬로 비디오를 보는듯했다. 스코프에 잡힌 헥터는 콧등부분이 관통되어 뒤로 서서히 넘어 지고 있었다. 겨우 저격에 성공한 것이다.
"와아아아아!"
아르타인 영지군쪽에서 큰함성이 뿜어졌다. 전장의 폭군이라는 헥터가 죽은 것이다. 렘 아저씨는 부들거리는 다리로 헥터에게 다가가 목을 잘라 롱소드에 꽂아 들어 올리며 입을 벌려 무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거리가 먼탓으로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헥터는 죽었다'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헥터가 죽어 버리자 체르시 영지군은 급격하게 사기가 떨어져 밀리기 시작했다. 그런 점을 감지했는지 체르시 자작 옆에 있던 2명의 기사가 급히 전장으로 뛰어 들었다. 아르타인 영지에서도 자작을 보호하던 호위 기사가 전장으로 합류하며 양쪽 진영 모두 남아 있는 기사는 없는 상태였다. 이 기사들의 활약 여부에 따라 영지전의 승패가 갈릴것이다.
아르타인 영지의 기사와 체르시 자작 영지의 기사가 일대 일 대결의 치열한 전투에 돌입한 상태지만 체르시 자작 영지의 또다른 기사는 야크모 용병단에 둘러 쌓여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야크모 용병단 단장인 야크모는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실력자였다. 상대편 기사도 같은 엇비슷한 실력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기사는 혼자였다. 야크모 용병단은 합공으로 대응했다. 그러자 기사는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오래 버티지 못할것 같았다.
그렇게 예상하고 있는 가운데 등뒤에서의 어떤 용병의 공격에 몸이 앞쪽으로 쏠려 버리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그런 실수를 놓치지 않고 야크모 용병 단장이 기사의 목을 날려 버리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와아아아!"
엄청난 함성에 부담이 된것인지 일대 일 기사 대결을 벌이고 있던 체르시 영지의 기사가 일그러진 얼굴로 죽어도 상관없다는듯 마구잡이식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냉점함을 잃어 버린것이다. 전쟁터에서는 무엇보다도 우선시되는건 냉정함이다. 평정심을 잃어 버리고 날뛰면 시야가 좁아져 눈먼 칼을 맞을수도 있다.
그런 체르시 영지의 기사에 반해 아르타인 영지의 기사는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느새 아르타인 영지 기사의 롱소드가 체르시 영지 기사의 목을 꿰뚤어 목뒤까지 삐죽 튀어 나와 오른쪽으로 그어 버리듯 빼내자 분수같은 피를 내뿜어며 덜렁거리는 머리통과 함께 몸전체가 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와아!"
또다시 함성이 울려 퍼지며 아르타인 영지군이 체르시 영지군을 더욱 밀어 붙이기 시작했다. 승기는 완전히 아르타인 영지쪽으로 기울어졌다.
뿌우뿌우뿌우뿌우우우.
뿔 나팔 소리가 길게 평원에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체르시 자작이 있는 곳에서 백기가 올라 왔다. 항복의 표시를 한것이다.
"끝났군. 저런식으로 항복 표시를 하냐?"
"그, 그렇습니다."
바짝 얼어 붙었던 같은 표정의 레아드가 말을 더듬었다. 귀찮게 질문을 하는 레아드에게 호통을 친 결과였다. 영지전이 끝남과 동시에 이곳에서의 볼일도 끝났다. 바닥에 있는 물건들을 아공간으로 집어 넣은후 어디로 갈지를 정해야했다.
"이 산을 이쪽으로 내려 가면 어느 영지냐?"
"더스틴 남작령입니다."
"어떤 영지인지 대충 설명해 봐라."
"더스틴 남작령은 코스모 왕국에서 가장 작은 영지로 죽음의 숲에 걸치고 있는 관계로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침범하는 몬스터 영지로 유명하며 용병들이 유독 많은 영지이기도 합니다. 영주인 더스틴 남작은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며 귀족 영애치고는 특이하게도 장녀인 엘리사 영애는 소드 익스포트 중급 경지로 괄괄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작 영지의 군사들은 물론 영지민들도 늘 몬스터의 위협에 시달린 결과 용병못지 않는 실력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인간은 흔히 적응의 동물이라고 한다. 어떤 환경에 맞추어 적응하는 능력은 타 동물들을 훨씬 능가한다. 그런 이유로 인간이 번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스틴 남작령의 영지민들도 환경에 적응한 결과 강해질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
25미터 정도의 높은 목책으로 둘러 쌓인 더스틴 영지의 한마을로 들어 섰다. 용병패를 보여 주자 쉽게 통과시켜 주었다. 그만큼 용병들의 출입이 잦은 마을이었다. 마을 규모는 제법 컸다. 아르타인 영지의 퉁가 마을과는 비교할수도 없을 정도였다.
레아드와 스모키는 몰래 숨어서 뒤를 따른다고 하면서 신호를 하면 언제든지 달려 온다고 했다. 목책을 통과하자마자 열대여섯명의 아이들이 바닥에 앉은채로 일제히 켄을 바라 보며 궁시렁대었다.
"에이, 거지잖아."
"눈만 버렸어."
많아봐야 일곱, 여덟살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애들 입이 시궁창이었다.
'확 그냥 애새끼들을 족쳐 버려?'
그런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애들하고 푸닥거리고 싶진 않았다. 그냥 무시하고 천천히 걸어가자 작은 꼬마 여자애가 쪼르르 달려와 말을 걸었다.
"아, 아자씨! 이 마을엔 첨이에요?"
"그렇단다."
"고롬, 울 집으로 가지 않을래요? 엄마가 요릴 쩡말 잘해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하자 조금 당황했다.
"너희집?"
"여관이에요."
"아! 삐끼구나. 그래 가자."
꼬마를 따라 갈려고 하자 또다시 다른 애새끼들이 중얼거렸다.
"킥킥, 거지가 거지를 델고 가네."
"거지 눈깔에는 거지밖에 않보이잖아."
"이익!"
꼬마 여자애가 분한지 주먹을 꽉 쥐고는 다른 애들을 노려 보았다.
"저런 애들 말은 무시하고 가자. 옷을 파는곳을 알면 그곳으로 먼저 가자."
"예."
"근데 네 이름은 뭐냐?"
"베키에요."
"난 켄이다."
작은 다리를 열심히 놀려 제법 큰 잡화점으로 안내한 베키는 잡화점안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는지 문밖에 쪼그려 앉았다.
"같이 들어 가자."
"않되요. 혼나요."
"괜찮아."
잡화점 문을 열고 들어 갔다.
딸랑.
"오서 옵쇼. 응? 뭐야? 거지 새끼잖아. 나가. 이 새끼들아."
똥배가 툭 튀어 나온 대머리 놈이 험악한 인상을 하며 화를 냈다. 그런 대머리 놈의 말에 겁을 먹었는지 베키는 켄의 뒤로 숨었다.
"뭐? 거지 새끼라고? 이 새끼가."
오늘 벌써 두번이나 거지라는 말을 들었다. 안그래도 기분이 꿀꿀한데 여기서 또다시 거지라는 말을 듣자 화가 폭발했다.
"뱀파이어릭 마나 터치!"
조용히 마법 주문을 외치며 대머리 몸을 살짝 건드렸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물론 모든 사물에는 마나가 존재한다. 만약 인간이 몸속에 가지고 있는 마나가 부족하게 되면 온갖 병에 시달리며 수명도 짧아진다. 손님 대접을 개판으로 하는 이런 놈은 장사할 가치도 없는 놈이다.
"뭐야? 이 거지 새끼가 어디에 손을 대는거냐?"
대머리 놈이 손을 올려 얼굴을 후려쳤지만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마나를 살짝 뿜어냈다.
"응? 갑자기 왜 이리 으슬으슬하지? 몸에 힘도 들어가지 않고?"
"베키! 나가자. 다른 곳으로 안내해."
대머리가 운영하는 잡화점보다는 조금 작은 잡화점이었지만 이번의 주인은 켄의 허름한 복장에도 아무렇지도 않는듯 친절하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다.
"이 옷은 어떤지요? 그렇게 거칠지도 않습니다. 한번 만져 보시죠."
실제로는 거칠었지만 지금 입고 있는 옷에 비하면 조금 나을 정도였다.
"더 부드러운 옷은 없습니까?"
중년의 잡화점 주인이 켄을 힐끗보며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면서 안쪽으로 들어 가더니 다른 옷을 가지고 왔다.
"이게 가장 부러드럽습니다."
옷을 만져 보자 부드럽기는 했지만 켄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이 옷이 이곳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음, 어쩔수없군요. 그럼 이런 옷을 세벌 주시고 이 애가 입을만한 옷도 보여 주시죠."
베키가 입고있는 옷은 켄이 입고 있는 옷보다 더 심했다. 군데군데 덕지덕지 뗌방을 했지만 굉장히 낡았다.
"이 옷은 어떻습니까?"
벽에 걸려 있던 하얀 원피스였다.
"베키! 이 옷을 입을래?"
"쩌, 쩡말 이 옷을 입어도 되요?"
"그래! 네가 마음에 든다면 사 주마."
"엄마한테 혼날텐데...."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옷을 받았다고 하면 어느 부모나 수상하게 생각할것이다.
"어차피 네 집으로 갈텐데 네 엄마에게 내가 설명해 줄께."
"그래도..."
"주인장! 이것보다 더 좋은 옷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잠시만요."
급히 안쪽으로 들어가 다른 옷을 한벌 가지고 왔다. 이번에 들고 온 옷은 화사하게 보였다. 재질도 벽에 걸려 있던 원피스보다 더 좋아 보였다.
"이 애가 입어 봐도 되겠습니까?"
"음...확실히 구입한다면 입어 봐도 좋습니다."
그렇게 깨끗하게 보이지 않는 베키가 옷을 더럽힐까봐 걱정하는것 같았다.
"클린!"
"응? 뭐, 뭐죠?"
베키를 마법으로 깨끗하게 씻겨 주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리둥절해 했다.
"베키! 저 옷들을 입어 봐라. 혼자서 입을수 있겠니?"
"하, 할수 있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아직 혼자서 옷을 입기에는 서투른것 같았다.
"주인장! 가게에 이 애의 옷을 갈아 입혀줄 여자는 없습니까?"
"잠시만요."
가게 안쪽으로 들어간 주인장은 큰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푸짐한 몸집의 아줌마 한명이 주인장과 같이 나와 베키를 안쪽으로 데리고 갔다. 잠시후 화사한 차림의 베키는 전혀 딴사람같았다. 역시 옷이 날개였다. 너무 귀여웠다.
"잘 어울리네."
"쩡말요?"
"그래. 너도 기분좋지?"
"히히, 예."
너무 귀여워서 베키의 머릴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이 옷과 같은 걸로 두벌 더 주시고 벽에 걸려 있던 저 옷도 두벌 주십시요. 모두 얼마입니까?"
켄은 가장 부드러운 재질의 옷을 세벌 구입하고 베키에게는 한벌은 부드럽고 화사한 옷으로 두벌은 주인장이 처음 보여준 벽에 걸려 있던 원피스 두벌을 구입하기로 했다.
"여섯벌 모두 합쳐 46실버입니다만 45실버만 받겠습니다."
옷 가격이 굉장히 비쌌다. 45실버면 4인 가족의 가난한 평민이 하루에 딱딱한 빵한개만 먹으면 3년 까까이 생활할수 있는 돈이다.
"이거면 되겠습니까?"
옷값으로 1골드 금화를 한개 건네 주었다.
"감사합니다. 잠시만요. 거스름돈을 준비하겠습니다."
주인장에게 55실버를 받고 그 잡화점에서 옷을 갈아 입고 가게를 나왔다. 베키는 화사한 옷 그대로였다.
"이제 너희집으로 가자."
베키가 안내한 집은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허름한 2층짜리 식당겸 여관이었다. 1층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지만 손님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 손님 델고 왔써!"
베키가 큰소리로 엄마를 부르며 식당안으로 쪼르르 뛰어 들어 갔다.
"베, 베키! 그 옷은 어떻게 된거니?"
"저 아자씨가 사 쭸어."
"뭐라고?"
식당안으로 들어 서자 30대정도로 보이는 금발의 여인이 수상쩍은 눈으로 켄을 다그쳤다.
"어떻게 된거죠?"
"아! 제 옷을 사는김에 베키 옷도 사 주었습니다."
"왜요?"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사 주고 싶었거든요."
빈의자에 엉덩이를 털썩 걸치며 대답해 주었다.
"식사가 되면 아무것이나 주십시요."
잠시후 거무튀튀한 빵한개와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수프를 들고온 베키 엄마가 탁자에 내려 놓으며 입을 열었다.
"식사값은 받지 않을께요. 감사합니다."
"한동안 이곳에서 지낼려고 합니다. 방은 있습니까?"
"2층에 마음에 드는 방을 고르세요. 방값도 받지 않을께요."
"그럴수는 없습니다. 방값은 계산할겁니다."
베키에게 옷을 사준것이 부담이 되는지 뭐든지 공짜로 줄것같아 거절했다. 보아하니 식당도 잘 되지 않는것 같았다. 탁자와 의자는 낡긴했지만 자주 청소를 하는지 깨끗했다.
- 작가의말
즐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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