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 1장 - 낯선 사람에게 말 걸지 마라
1막 개시(開始)
사냥꾼들의 생애를 다룰 때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들이 초인적인 능력과 강철 같은 의지로 무장한 불세출의 영웅이 아니라 인간의 나약한 육체, 그리고 깨어지기 쉬운 정신과 같이 다양한 현실적 제약 속에서 악전고투해야만 했던 개인들이라는 사실이다.
- 테니아 브록센, 「교단의 사냥꾼 양성제도에 대한 고찰」
살점과 피가 튀는 전장에서 꺾일 줄 모르는 사냥꾼의 고매한 정신은 단연코 우리 시대의 가장 불가해한 유산이다.
- 리몬 홀스데인, 『엽사 찬가』
1장 낯선 사람에게 말 걸지 마라
뻐꾸기 둥지는 작은 여관이라기에는 제법 규모가 있는 곳이었다.
근처의 양조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장기간 숙식하면서 고정적인 재원이 되어주었던 것은 물론이요, 생산 과정에서 슬쩍한 맥주를 숙박비 대신으로 지불하는, 인부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비법은 이제 양조장 주인에게 탄로나 금지되었건만 여관과 양조장 간의 동맹은 여전히 굳건하였던 덕택에 산지직송의 보다 높은 단계인 옆집 직송이 가져다주는 특혜로 그곳에 머무는 이라면 누구든 신선한 거품이 묻은 입가를 만족스럽게 훔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2층에서는 아내가 삯바느질로 번 돈을 싸들고 경비병의 눈을 피해 밤새 혈안이 되어 판돈을 키우는 도박꾼들이 저마다 시시각각 덮쳐오는 불행의 그림자를 지워 보려고 감당 못할 객기를 부렸고, 그 옆방에서는 오늘 새로이 동지로 소개된 이가 실은 제국수색대의 끄나풀이라는 것을 꿈에도 알지 못한 채 공화주의와 이웃국가 게헤만의 혁명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는 풋내기 학도들이 서로의 지나치게 큰 목소리에 더 큰 목소리로 주의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의 주된 고객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제국의 남과 북을 가로질러 여행하는 이들이었는데, 통금시간에 맞추지 못해 성 밖에서 밤을 보내게 된 상인이 태반이었고 상인을 가장하여 입 밖에 내기 힘들 만큼 고귀하거나 음흉한 일을 꾸미는 이들이 나머지였다.
여관에 맡긴 자신의 짐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별로 관심도 없는 베크 역시 바로 그런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은거울, 향수, 자개로 상감한 빗 따위지요. 혹시 눈이 침침하십니까? 어디 이거 한번 써보십시오······”
“꺼으윽-”
상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그러나 별 열의 없이 팔로 머리를 괸 채 연신 대사를 연습하던 그의 말을 뱃고동에 비견될 만한 트림 소리로 끊은 것은 둥근 테이블에 마주 앉은 거한(巨漢)이었다. 일단 베크의 경호원 역할을 맡기로 된 그 남자는 두 개를 이어 붙여 앉은 의자의 등받이가 만들어낸 굴곡이 영 불편한지 테이블에 양팔을 올린 채 무게를 앞으로 싣고 있었다.
그 때문에 베크의 앞에 놓인 맥주잔은 위태롭게 자꾸만 경사를 따라 미끄러져 이동하고 있었다. 점차 속도가 붙기 시작한 맥주잔을 낚아챈 베크는 마지막 몇 모금을 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마음에 두고 있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여자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임으로써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베크가 주춤거리며 서 있는 동안 여자는 아주 조금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제야 그녀가 좀 전에 입술을 달싹여 한 말이 ‘그러세요.’란 것을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베크는 여자에게 무안을 주지 않기 위해 여관을 가득 메운 소음을 탓하며 자리에 앉았다.
“후- 정신없네요. 또 누가 돈을 잃은 모양이죠.”
그가 한바탕 뒤집어엎는 소리가 들리는 층계 위를 가리키며 말하자 여자는 또 자신 없이 고개를 조금 끄덕여 보였다. 이 대화 아닌 대화를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바꾸어 버린 것은 느닷없이 맥주잔 두 개를 들고 나타난 남자였다.
“그새 또 친구를 만들었네. 하여간에 사교성 좋은 아가씨라니까.”
사내가 여자의 옆에 놓인 의자를 발로 당겨 앉자 베크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모양새를 취했다.
“아, 일행이 있으셨군요. 실례했습니다.”
“앉아 계쇼. 안 잡아먹으니까.”
잔 하나는 여자 앞에 놓을 것이라는 베크의 예상과는 달리 그 남자는 두 개의 잔을 모두 자기 앞에 내려놓았는데, 두 잔을 주문한 건 단지 그에게 팔이 두 개 달려있기 때문인 듯했다. 베크는 남자가 들고 온 잔을 곁눈질로 슬쩍 확인하고는 말했다.
“여기는 맥주가 좋아요.”
“또 그 소리. 주인 여편네도 그러더니만. 난 누가 뭐라 그래도 내가 마시고 싶은 걸 마실 거요.”
스스로의 선언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보여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남자는 잔 하나를 들어 조심성 없이 들이켰다. 턱수염을 따라 흘러내린 술이 셔츠의 앞섶을 적셨다. 그는 요란스럽게 잔을 내려놓고는 말했다.
“같이 다니던 양반 중에 술에 환장한 영감이 하나 있었는데 덕분에 나도 맥주가 싱거워졌지 뭐요. 그래,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
남자가 악수를 청하자 베크는 그의 핏줄이 튀어나온 묵직한 손을 잡고 흔들었다.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그의 손은 짐승의 앞발처럼 느껴졌다.
“베크입니다.”
“웨인이라고 부르쇼.”
웨인은 다시 잔을 들이켰는데 꿀떡꿀떡 시원스럽게 마시는 폼이 남더러 술에 환장했다고 말할 처지는 아닌 것 같았다.
“어디로 가십니까?”
“물에서 와서 거름으로 가지요.”
베크의 물음에 웨인은 문학과는 꽤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온 것 같은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뢰테의 시를 인용해 답했다.
“‘흙으로 가지요’일 겁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거 양반 재미없기는.”
고상한 시를 퍽 잡스럽게 바꿔놓은 주제에 웨인은 베크의 유머 감각을 탓하더니 이제는 그의 의도를 의심했다.
“참, 이 아가씨를 어떻게 해보려는 수작이라면 관둬야 할 거요. 양갓집 규수거든. 방금도 껄떡대는 놈 하나 두들겨 패주고 오는 길이오.”
“그런 거라면 안심하십시오. 호기심이 생겨서 이러는 것뿐이니까.”
“사내 놈들의 호기심이란 건 언제나 위험한 법이지.”
그러나 그는 곧 자기가 과했다고 느꼈는지 공기 중에 놓인 자신의 말을 흩어 놓으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사과했다.
“내가 과민했다면 사과드리지. 이 아가씨는 내 돈줄인데, 또 눈 맞아 달아나면 내가 곤란해져서 그러는 거요.”
웨인은 좀 전부터 함께 앉은 여자가 마치 귀머거리인 양 행동했는데 베크는 그런 태도에 동참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가 인정했다시피 호기심을 이길 수는 없었다.
“달아나다니요?”
“내가 사냥꾼이오.”
웨인은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거들먹거리며 말했고 베크는 한쪽 눈썹을 올려 보이는 것으로 관심을 표했다. 그들은 모두 사냥꾼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크게 변한 시대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 사냥꾼 말이지. 지붕 수리공이나 대장장이 조수 같은 놈들하고 눈 맞아 부모 가슴 찢어놓고 야반도주한 철없는 아가씨들 잡아다 원래 자리에 돌려놓습디다. 그러면 부모들은 아이고 우리 엽사 선생을 찬양하리로다 하고 돈을 갖다 바치지요.”
베크는 싱긋 웃으며 이제는 별 놈들이 다 사냥꾼을 자칭하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아가씨는 어느 쪽이었습니까?”
“어느 쪽이라니? 아, 남자 말이군. 푸줏간 아들내미인데 폭력은 진정한 사랑을 이길 수 없다나. 아무튼 폭력은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다는 건 증명됐지요.”
그러면서 웨인은 주먹을 쥐어 보였다. 과연 진정한 사랑을 종식시킬 만한 힘이 담긴 주먹이었다. 여자가 말없이 침울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웨인은 주먹을 펼쳐 베크를 가리키며 물었다.
“선생은 뭐 하시는 분이오?”
“보따리 상인입니다. 돌아다니면서 귀부인들이 쓸 만한 물건들을 팔지요.”
“혼자서?”
“아뇨, 저기 있는 저 친구 보이십니까?”
베크가 가리킨 곳에는 예의 거한이 대머리를 긁적이며 종업원을 붙잡고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일이 잘 안 풀리는지 빈 맥주잔으로 테이블을 탕탕 치는 모습을 보더니 웨인은 간단한 감상을 남겼다.
“경호원이오? 든든하시겠구먼.”
베크는 입에 검지와 엄지를 넣어 휘파람을 불어 보였다. 그러자 거한은 이쪽을 쳐다보았는데 시무룩한 표정이 마치 종업원에게 대신 설명 좀 해달라는 듯이 보였다. 베크는 천진하게 손을 흔들어 보인 다음 웨인에게 말했다.
“약간 귀가 먹은 친군데, 높은 소리는 들리는 모양이에요.”
“아, 그런 친구를 나도 하나 알지. 포병이었는데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가 포격 소리였답디다. 귀에서 피 한 바가지를 쏟고 나서는 제 말이 안 들릴까 봐서 만나는 사람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요. 그 친구에게 햇볕이 오늘도 따스하기를. 아니, 지금은 밤이니까 별빛이 밝기를.”
그는 두 번째 잔을 허공에 들어 가상의 잔들과 부딪쳐 건배를 올린 뒤 그 안에 담긴 것을 들이마셨다.
“그래서 이 아가씨를 집에 데려다 주시는 길이라는 거군요. 그럼 어디, 이든벨 쪽으로 가십니까?”
베크는 여자가 북부인 특유의 유난히 하얀 피부를 지닌 것을 보고 북방의 가장 유력한 도시 가운데 하나를 짚었다. 그의 말에 웨인은 검지를 흔들어 보였다.
“좋은 추리였소. 하지만 틀렸수다. 교황령으로 가오. 선생은 상인이시라니까 루단에 들리겠구려.”
“아뇨, 9월 통제령 때문에 도시 안에서 게헤만 물건들은 통 팔 수가 없게 됐어요. 아시다시피 향수나 은세공품은 게헤만 것을 최고로 치는데 말이죠. 황제가 의회를 말려 죽이려는 모양인데 우리 상인들이 먼저 죽게 생겼습니다. 그래도 우리야 늘 길을 찾지요.”
“아, 그 길이란 건 십중팔구 교황령으로 향하겠군. 우리 자비 많으신 나이로드 교황 성하께선 전쟁에 반대하시니까. 어째 우리 목적지가 같습디다?”
사내와 대화를 나눈 지 한참이 되어서야 소득이 생긴 베크는 은밀히 웃었다.
“아인벤트 요새로 가는 길에 마물들이 나온다던데, 대책은 있으십니까?”
베크의 말에 웨인은 호기롭게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뭐 인간 사냥꾼이긴 해도 따지고 보면 나도 사냥꾼이란 말이지. 까짓 마물 놈들 못 잡을 건 뭐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마물을 직접 보면 까무러친다고들 하는데 내가 보기엔 말짱 헛소리요. 거 자식들 못생겼으면 못생긴 거지 까무러칠 건 또 뭐란 말이오?”
“동행을 제안하려고 했습니다.”
베크의 제안에 웨인은 목을 빼 거한을 슬쩍 보고 근육덩어리의 유용성을 가늠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나쁜 생각은 아닌데 낯선 사람이랑 같이 길을 떠난다는 게 난 영 껄끄러워서. 뭐 하룻밤 술친구로는 어떨지 몰라도 말이지.”
갑작스런 정적이 찾아온 것은 그때였다. 뻐꾸기 둥지에서 문이 여닫히는 소리는 이목을 끌만한 것이 전혀 아니었지만 그 뒤를 이은 좌중의 침묵은 무척 이례적인 것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문을 향한 가운데 넋이 나간 표정의 사내가 비척비척 홀을 향해 걸어 들어왔다.
베크가 있는 쪽으로 사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 섞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떤 비극의 목격자인지 혹은 당사자인지 그의 몸은 피 칠갑을 하고 있었다.
“도···도와··· 물리고··· 머리가 가렵···”
그러나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만 거꾸러진 그의 머리는 뒤쪽이 날아가 뇌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러나 이 혼란을 갈무리할 틈도 없이 사내가 밀고 들어오며 미처 닫지 못한 문에서 끔찍한 형상이 뛰어 들어왔다.
방금 그 사내의 뒤통수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은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웅변하듯 그것의 주둥이에서는 피가 덩이져 흘러내렸고 연분홍색 피부는 부풀고 물러 두더지를 보는 듯했다. 그야말로 까무러칠 만한 모양새였다. 베크는 그것이 시체귀(*)라는 것을 알았다.
태엽을 놓은 오르골처럼 멈춰 있던 여관의 시간이 한꺼번에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소란스럽게 시체귀의 반경에서 벗어나려 벽으로 붙었고 돌아가는 상황을 확인하고자 나왔던 층계 위의 사람들은 얼른 문을 닫아걸었다.
행동에 나선 것은 베크의 일행인 거한이었다. 그는 조용히 앉아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가 시체귀가 사람들에게로 달려드는 순간 의자에서 몸을 퉁겨 온몸으로 그것을 들이박았다.
볼썽사납게 나동그라진 시체귀는 바닥을 박차고 이제는 베크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재빨리 그들 앞에 놓인 테이블을 발로 차 엄폐물을 세웠다. 베크가 한 발을 들어 테이블을 버티고 선 까닭에 시체귀는 무용한 박치기를 한 뒤 충격을 떨쳐버리려는 듯 생선을 연상시키는 못생긴 대가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피가 튀자 종업원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는 사이 웨인은 황급히 여자를 어깨에 둘러메고 그가 내보였던 호기가 무색하게 카운터를 넘어가 그 뒤로 숨었다. 베크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거한은 이 상황이 유쾌하다는 듯이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시체귀는 거한이 접근하자 찢어지는 울음소리를 내며 위협했다. 아랑곳없이 다가오는 그를 향해 시체귀가 달려들자 거한은 방금 보여줬던 순발력을 다시 발휘하여 시체귀의 벌린 아가리에 자신의 양손을 집어넣었다.
그 다음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아래턱을 잡은 거한의 오른손이 시체귀의 가슴에 이르기까지 내려오며 그 주둥이를 잡아 찢었던 것이다. 가죽을 잡아 벗기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드러난 시체귀의 펄떡거리는 심장이 이윽고 거한의 손에 의해 뽑혀 나오자 여관은 다시 한 번 소름 끼치는 정적을 맞았다.
상황이 종료된 것을 확인한 웨인이 카운터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그의 머리와 부딪힌 선반 위의 술병들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웨인은 자신이 부렸던 추태가 민망한지 목을 가다듬고 자신 없이 물었다.
“같이 가자는 제안 아직도 유효한 거요?”
베크는 발치에 놓인 시체귀의 꿈틀거리는 사체를 향해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조금은 비굴해 보이는 미소를 걸치고 있는 허풍쟁이를 보고는 말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할 텐데 괜찮겠습니까?”
“아유, 지금 당장이라도 가자면 가지요.”
*시체귓과에 속하는 마물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마물. 대륙 전체에 걸쳐 고르게 서식한다. 시체를 먹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흉포하여 살아있는 생물을 공격하는 일도 잦다. 신장은 대체로 성인 남성의 가슴 높이에 미치지 못하며 눈이 몹시 나빠 먹잇감의 움직임을 보고 공격한다
- 작가의말
본래는 두 문장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첫 문단을 수정하면서 여러 문장으로 나누었습니다. - 18.7.25.3:34
도입부를 다시 수정하여 여러 문장, 문단으로 나누었습니다. - 18.11.13.23:04
수정하였던 도입부를 되돌렸습니다. - 23.9.1.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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