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 2장 - 배우의 침착함, 사기꾼의 능숙함
1막 개시
2장 배우의 침착함, 사기꾼의 능숙함
그러나 그들은 당장 출발하지는 않았다. 허풍이 버릇인 듯, 꼭두새벽도 문제없다던 웨인은 지난 밤 그가 숨었던 카운터에 기댄 채 연신 하품을 하며 여관 주인을 깨워 기어코 주문하고야 만 커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젯밤 베크가 웨인에게 물어 알게 된 여자의 이름은 메이였는데, 그녀 역시 졸린 듯 덜 깬 눈을 비비며 마른세수를 하고 있었다.
“이거 침 뱉은 거 아뇨?”
웨인이 마침내 나온 커피 위에 떠다니는 거품을 가리키며 묻자 여관 주인은 들릴 듯 들리지 않는 볼멘소리를 꿍얼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웨인은 심히 미심쩍어 하며 커피에 코를 들이대 냄새를 맡고는 확신이 선 모양인지 내려놓은 잔을 멀찍이 밀었다. 그런 그를 향해 베크가 층계를 내려오며 인사를 건넸다.
“잘 주무셨습니까?”
“말도 마쇼. 옆방에 병사들이 들이닥쳐서는 대학생들을 잡아갑디다. 그러면서 나한테도 뭐 아는 것 없느냐고 물어대는데 재워줄 것 같지가 않아서 황제 폐하 만세 삼창했수다.”
그가 떠들게 내버려둔 베크는 문간에 놓인 자신의 짐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웨인이 얼른 설명했다.
“짐은 저것 맞지요? 내가 주인 시켜서 미리 찾아놨소. 우리야 단출하게 온 사람들이니 준비는 다 끝난 셈이오.”
그가 칭찬을 기다리는 개처럼 베크를 바라보자 베크는 고개를 약간 까딱여 고마움을 표했다. 어느 틈에 그의 뒤를 따라 내려온 거한이 짐을 번쩍 들어 어깨에 메자 웨인이 또 한 마디 거들었다.
“장사로세, 장사야.”
거한의 귀가 어둡다는 사실을 떠올린 듯 웨인은 휘파람으로 그를 불러 세운 뒤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거한은 별 희한한 양반 다 보겠다는 듯 싱겁게 웃어 보이고는 여관 밖으로 나갔다. 나도 사냥꾼이라며 마물은 다 때려잡을 것 같이 호언장담하던 사람은 어딜 가고 이런 아첨꾼만 남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출발합시다. 두 분 다 말 타고 오셨습니까?”
“이 아가씨가 말 탈 줄은 아는데 내가 말이 한 마리밖에 없어서. 그래도 내 말이 워낙 튼튼하고 이 아가씨가 또 기가 막히게 가벼워서 문제없소.”
그렇게 시작된 웨인의 튼튼한 말 자랑은 일행이 여관을 나서서 안장을 얹고 그가 메이를 말 위에 태울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래서 그 영감 설득하는 데 또 애를 먹었소. 자기는 안 팔겠다는 거지. 내가 무슨 생각까지 했느냐면 이 영감이 사실 말이랑······.”
“갑시다. 서둘러야 하니.”
베크가 말의 배를 차며 마구간 밖으로 나가자 거한과 웨인이 그 뒤를 따랐다. 메이는 웨인의 말 위에 타서 그에게 안긴 모양새였는데 그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다. 웨인이 말을 재촉해 베크의 옆에 나란히 붙었다.
“그러고 보니 저 친구는 이름이 뭐요?”
“얀이라고 지어줬는데 이름보다는 휘파람으로 부르지요.”
웨인은 불리지 않는 이름의 효용에 관해 철학적인 사색에 빠진 모양인지 골똘히 고민하다가 또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참, 어제는 신세를 졌수다. 나는 이 아가씨를 보호해야 하는 입장이라 돕지 못했소.”
“예, 압니다.”
구태여 그의 허세를 들춰 실상과 마주하게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베크는 간단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웨인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집요하게 자신의 행동을 변호했다.
“아시다시피 나는 이 아가씨 신변을 보호해야 하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생판 남이었지만 어쨌건 지금은 내 품 안에 있지 않소? 그러니까, 비유적으로, 그리고 물리적으로 말이오. 아무튼 식탁으로 놈을 막은 건 제법 기발했소. 괜찮은 전략이었단 말이지.”
이제 자신의 행동을 평가하기까지 하는 웨인을 보며 베크는 다만 코끝으로 픽 웃을 뿐이었다. 해가 뜨지 않은 초봄의 새벽은 몹시 추웠고 웨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외투를 벗어 메이의 어깨에 둘렀다. 베크는 문득 사랑하는 남자와 야반도주를 결심했을 만큼 당찬 아가씨가 웨인에게는 지나치게 고분고분한 것이 이상스럽게 느껴졌다.
“아가씨 말은 거의 못 들어본 것 같은데요. 이대로 집에 가는 데 별 미련이 없으십니까?”
“저는···”
“미련이 있다 해도 어쩔 거요. 남자는 나한테 두들겨 맞아 줄행랑을 놨고···”
메이의 말을 끊은 웨인의 말을, 베크가 다시 끊었다.
“아가씨에게 물었는데, 웨인.”
베크의 위압적인 선언에 웨인의 얼굴이 잠깐 노기를 띠었다. 그러나 그것은 베크의 착각인 양 곧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미안하오. 그럼 우리 아가씨 말을 들어보기로 할까.”
“저는 그냥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어요. 이 냄새나는 작자랑 붙어 다니는 건 질렸거든요.”
메이의 말에 베크는 그들과 만난 뒤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그가 탄 크림색 말이 귀를 쫑긋 움직이고는 기분 좋게 푸르르 울었다. 기분이 상한 웨인은 메이가 덮고 있는 자신의 외투 안주머니로 손을 넣어 담뱃갑을 꺼냈다.
“훈증 소독이라고 들어 봤을까 모르겠네.”
“숙녀를 태우고 뒤에서 끽연을 하는 것이 대체 무슨 예의여요?”
그러거나 말거나 웨인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가 메이의 은발 위로 연기를 훅 뿜자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며 싫은 기색을 드러냈다. 담뱃불이 이제 밝아오는 새벽 속에서 깜박였다. 한동안 그들은 말없이 길을 따라갔다.
웨인의 자랑이 무색하지 않게 그의 암갈색 말은 훈련을 잘 받은 모양이었다. 그것은 리듬을 잃지 않고 눈 녹은 진흙 위를 영리하게 피해 걸었다. 아인벤트 요새로 오르는 길목에서 베크가 오른손을 들어 뒤따르던 일행에게 속도를 늦출 것을 주문했다.
“잠시 멈춥시다.”
자신들이 옳은 길로 들어섰는지 확인하려는 듯 베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문득 메이의 작은 체구가 미처 다 가리지 못한 웨인의 허리 언저리에 이채로운 물건이 걸려있는 것이 띄었다.
그건 손잡이가 닳은 권총이었다. 그는 좀 더 자세히 보고자 말을 돌려 웨인 쪽으로 갔다. 양 허리에 한 자루씩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오른쪽 허벅지에도 하나 걸려 있었다.
“무슨 총을 두 개씩이나··· 하나 더 있군요. 세 개씩이나 들고 다니십니까?”
“이 총 말이오? 나쁜 놈들 잡는 데 쓰지.”
“나쁜 놈들이라니요?”
“어제도 당신들이 하나 잡았잖소. 요사이엔 어딜 가나 마물들이 있으니까.”
베크는 이 자칭 사냥꾼의 허세가 도무지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은근히 비꼬았다.
“왜 어제는 쓰지 않으시고.”
“낚시꾼이 아무 때나 줄을 당기면 큰 물고기는 달아나는 법이오.”
“그게 무슨···?”
“아, 선생, 오늘 아침에 보니 선생의 짐 속에 울포트 상단 앞으로 쓴 어음이 들어 있더구려.”
베크의 표정이 굳었다. 어느새 그들은 모두 정지한 채였다. 삽시간에 바뀐 공기를 피부로 느낀 것인지 뒤에서 버티고 있던 얀의 근육이 팽팽해졌다. 베크는 나직하게 그러나 위협적으로 물었다.
“내 짐을 뒤졌습니까?”
웨인은 그건 별 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담긴 내용은 놀라운 것이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오. 내가 울포트 상단을 좀 알거든. 말이 상단이지 실은 아버지와 아들에 아들 부인 이렇게 셋이서 경호원 하나 데리고 다니는 조촐한 구성인데,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선생이 가지고 있는 그 어음은 녹트란에 사는 파블랑 부인이 쓴 거요. 파블랑 부인은 울포트 상단의 마지막 목격자 중 하나인데, 왜인고 하니 울포트 상단은 아인벤트 요새를 넘다가 습격을 받아 다 죽었거든.”
외투를 덮은 메이의 몸이 눈에 보일 정도로 심하게 떨렸다. 베크는 턱에 힘을 넣어 천천히 대꾸했다.
“우리가 상단을 인수했습니다.”
“하, 그만두시지. 인수했다면 도대체 누구한테서 인수했다는 거요? 내장이 파먹힌 울포트 씨한테서? 아니면 너희 개자식들이 죽을 때까지 가지고 놀았던 마리에게서?”
마지막 어구에는 행동이 동반되었다. 웨인은 빠르게 허리에서 권총을 빼내어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뒤를 쏘았다. 갑작스런 총격을 받은 얀이 균형을 잃고 말에서 떨어지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등자에 발이 걸린 탓에 말이 그 위로 넘어지며 다리로 허공을 내저었다.
“덮쳐!”
총성에 놀라 날뛰는 말 위에서 베크가 소리쳤다. 그의 명령을 받들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메이뿐이었다. 산비탈에서 세 개의 형체가 미끄러져 내려오며 그들을 덮쳤다.
웨인은 황급히 말을 움직여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는 메이의 떨리는 손에 말고삐를 쥐여 주고 왼발을 뒤로 넘겨 말에서 내렸다. 겁먹은 말의 변칙적인 움직임은 사냥에 적합한 것이 못 되는 탓이었다.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마시오.”
웨인은 그렇게 주의를 준 뒤 그에게로 달려드는 첫 번째 형체를 향해 총을 쏘았다. 무시무시한 반동으로 총구는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다만 탄환은 정확히 날아가 개와 인간의 형상을 함께 띤 마물에게 일격을 가했다.
속도가 붙은 몸체가 균형을 잃으며 땅에 처박혔다. 베크 역시 말에서 뛰어내려 웨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얼굴은 이제 주둥이가 길어지고 송곳니가 튀어나와 동료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세 번째 총격은 빗나갔다. 그러나 베크의 의도 역시 무산되었다. 목을 물어뜯으려던 베크의 공격은 웨인이 민첩하게 몸을 트는 바람에 그의 어깨에 경미한 상처를 남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웨인에게 안도할 틈은 없었다.
뒤에서는 얀이 총격으로부터 회복하며 일어나던 중이었고 베크의 동료는 쏘아 넘어뜨린 한 마리 외에도 두 마리가 더 남아 그야말로 사방이 적이었던 것이다. 웨인은 피로 젖은 자신의 어깨를 살피며 말했다.
“이봐 베크 선생, 우리 좀 문명인답게 싸울 순 없을까?”
그러면서 그는 고꾸라져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던 마물에게 확인 사살을 가했다. 머리에 든 장기가 쏟아져 나오며 꿈틀거림이 멎었다. 웨인의 태도는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던 허풍쟁이의 허물을 벗어던진 듯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신중한 동시에 저돌적인 사냥꾼의 인격이 들어섰다. 대체 뭣 때문에 이 남자를 먹잇감이라고 착각했단 말인가!
웨인은 뒤를 돌아, 위압감을 뿜어내며 다가오는 얀의 가슴팍에 총을 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얀을 저지시킬 수 없었고 그의 몸은 옷을 찢으며 부풀어 올랐다. 인간일 때도 거대했지만 지금 드러낸 본모습은 가히 하늘을 가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좀 전에 확인한 바에 따르면 약실에는 다섯 발이 장전되어 있었을 터, 베크는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했다.
“칵-!”
웨인은 재빨리 돌아서면서 묵직한 총열로 베크의 턱을 올려 갈겼다. 충격으로 중절식의 권총이 접히며 빈 약실을 뱉어냈다. 웨인은 솜씨 좋게 허리띠에서 새 약실을 꺼내 갈았다. 그는 베크의 머리를 겨냥했지만 다른 마물에 의해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웨인은 권총을 든 오른손을 휘둘러 장전을 방해하고자 달려든 마물의 머리를 갈겼다. 마물이 주춤거리자 그는 얼른 고개가 돌아간 마물의 뺨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마물은 기어이 웨인의 오른팔을 물고 늘어졌다. 그는 총을 들지 않은 왼 주먹으로 마물의 머리를 내리쳤다.
으직-
웨인의 소매가 찢어지며 부러진 이빨에 걸린 그의 살가죽이 벗겨졌다. 근육과 뼈가 드러나는 중상이었다.
“앞이··· 안 보여··· 앞이···!”
두개골이 함몰된 마물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그것은 곧 밖으로 튀어나와 덜렁거리는 자신의 두 눈알에 손이 닿자 비명을 질렀다. 이어진 두 발의 총격도 그를 완전히 침묵시키지는 못했다. 그것은 뚫린 목에서 피거품을 뿜어내며 한참을 버르적거렸다.
얀이 두 팔을 벌려 웨인을 감싸 안으려 들었다. 웨인은 그러나 민첩하게 몸을 던져 피했다. 무릎을 굽혀 일어나면서 그는 또 다른 마물에게 총격을 가했다. 부상당한 팔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확한 사격이었다. 머리 반쪽이 날아간 마물은 웨인에게로 넘어지며 그를 피와 뇌수로 흠뻑 적셨다.
셋이 당하고 둘이 남았다. 베크는 턱을 끼워 맞추고 얀과 함께 웨인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천천히 돌았다. 웨인은 시야를 가리는 핏물을 머리를 흔들어 털어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서는 도무지 지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베크는 마침내 인정했다.
“진짜 사냥꾼이군.”
“그래, 너희들은 진짜 개자식들이고 말이지.”
베크와 얀이 웨인을 향해 동시에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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