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 4장 - 맹인과 성자
1막 개시
4장 맹인과 성자
머리통은 다섯 개였지만 유난히 무거운 하나 덕분에 어떻게든 균형이 맞았다. 그걸 양옆으로 주렁주렁 달고 가는 말이야 어떤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이븐이 보기에는 그렇다는 뜻이었다. 메이윌은 얀의 검은 말에 타고 있었는데, 전 주인이 총 맞아 떨어진 뒤부터 조금 사나워진 탓에 고삐는 이븐이 쥐고 그녀는 말갈기를 붙잡고 있었다. 달아났다가 전투가 끝난 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걸 보면 제법 영특한 놈인 것 같았다. 갈기를 잡고 타는 법은 이븐이 가르쳐주었다.
“승마는 언제 배웠습니까?”
“열두 살 때 아버지한테서 배웠어요. 남동생이 배우는 걸 보고 졸랐는데 흔쾌히 들어주시었어요.”
이븐은 그녀의 가족이 잔베르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끊어진 대화를 재개한 것은 메이윌이었다.
“늑대인간들이었나요?”
“그것보다는 격이 떨어지는 놈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훨씬 교활한 놈들이죠.”
이븐은 말을 아꼈다. 일반인인 그녀가 마물에 관심을 가져봤자 고달파질 일밖에 없다고 여기는 탓이었다. 마물과 그녀의 인연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븐이 대화의 의지를 보이지 않자 메이윌은 여태껏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을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잔베르를 탈환하는 건 교단의 명령이었나요?”
이븐은 그 자신이 잔베르 교구에 소속된 사냥꾼이라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잔베르와 관련된 질문에 답하는 일에는 이골이 나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마음 놓고 유명세를 즐기기에는 꼬리를 물고 따라오는 기억들이 너무 끔찍한 것이었고 그렇다고 겸양을 떨기에는 이미 미친 짓을 저질러버린 뒤였던 것이었다. 잔베르에 대한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일은 대체로 선후관계를 바로잡아주는 데서부터 시작했다.
“그때 저는 사냥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죠.”
이븐이 더 얘기해줄 기색이 아니었으므로, 메이윌은 질문을 멈추었다.
“메이윌 수녀님.”
이븐이 메이윌을 나직이 불렀다. 모르델반트 수녀원의 첨탑과 그 아래 깔린 인가의 지붕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메이윌이 말에 탄 채로 고개를 조금 돌려 이븐을 바라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나를 위선자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누군가 당신을 사냥에 데려가려고 한다면 거절하십시오. 당신을 데려올 때 제가 했던 약속들은 모두 당신을 구슬리기 위해서 되는 대로 주워섬긴 것들일 뿐입니다. 내게는 끝까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빚은 청산되었고, 사실 애초에 그런 건 있지도 않았습니다. 당신은 사냥꾼들에게 빚진 게 없으니 쓸모없는 부채의식으로······.”
“베르자크 씨.”
메이윌은 처음으로 예의 없이 그의 말을 끊었다. 조금 토라진 말투였다.
“내가 당신이었다면 고맙다고 말했을 거여요.”
“감사합니다.”
이븐은 뒤늦게 감사를 표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멋쩍게 덧붙였다.
“이런 말을 하려 했던 게 아닌데, 알던 사람들이 자꾸 죽어나가니까······.”
“불시에 죽는 사람들도 있어요. 울포트 일가처럼 말이어요. 내가 택한 길 위에서 죽는다면 나는 그것을 꼭 불행이라고만은 생각지 않을 거여요.”
그 얘기를 듣는 이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수녀님, 죽기 전까지는 죽음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숭고한 죽음은 없어요. 모든 죽음은 궁극적으로는 개죽음일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븐도, 적어도 메이윌이 보기에는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이 남자는 자신이 죽어보기라도 했다고 말할 셈인가. 메이윌이 그의 말을 이상하게 여기는 동안 이븐은 생뚱맞은 주제를 꺼냈다.
“탐험가 사이크스 경이 쓴 책에 따르면 열대림에 있는 자이텍 왕국에서는 달이 해를 가릴 때면 산 사람의 심장을 꺼내 제물로 바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제사장은 그가 조금의 겁도 내지 않고 고결하게 죽었노라, 이제 그는 하늘의 별이 되어 우리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노라 그렇게 선포한답니다. 그러면 제기랄, 멋모르는 소년들은 다음 일식을 손꼽아 기다리지요. 제물로 간택되기 위해 제사장 주위를 알짱거리면서요.”
이븐은 데릭의 장례식을 떠올렸다. 그리고 사제가 읊는 추도문을 끝까지 듣지 못한 채 나왔던 일을 떠올렸다. 용감하고 물러설 줄 몰랐던, 유쾌한 농담으로 좌중을 웃길 줄도 알았고 전장에서는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웠던, 영원히 기억될··· 그런 수사들은 그에게 벌레를 꾀어 모으는 식충식물의 아가리처럼 느껴졌다. 곧 마일스아이렌으로 옮겨질, 못 박지 못한 관 뚜껑 아래 놓인 그의 망가진 시신, 끝내 찾지 못한 다리와, 떨어질 듯 위태로웠던 팔을 장의사가 붕대로 동여매 붙여놓은 일, 그런 것들이 죽음의 민낯이었다.
“내가 그 책을 읽었을 때 나는 그들의 미개함을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교단도 결국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고 나니 야만은 어디에나 있고 단지 옷을 바꿔 입을 뿐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메이윌은 이븐이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녀에게는 그녀 나름대로 교단을 변호할 의무가 있었다.
“교단은 희생을 강요하지 않아요. 야만적인 풍습을 옹호하지도 않고요. 오로지 자발적인 헌신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봉사만이 주께 사랑 받을 따름이어요. 네가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며 만약 그렇지 않거든 그가 싫은 낯빛을 하매 후에 칼끝이 반드시 너를 향함이라. 이디나르께서 직접 쓰신 교도전서의 말씀이어요.”
“듣기에 좋은 말이군요. 경전의 아름다운 글귀가 아주 조금만이라도 그대로 실현되었더라면 저는 한가로이 숲에서 사슴을 사냥하며 지냈을 겁니다.”
메이윌의 얼굴과, 또 얼마 전에 다녀간 일이 있는 이븐의 얼굴을 알아본 경비병이 별다른 확인 절차 없이 그들을 성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그들은 길가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피하며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이런 얘기는 들어보셨습니까? 어느 농부가 농기구를 주문했는데 대장장이가 스무 밤이 지나도록 도무지 완성을 해주질 않더랍니다. 농부는 꼬박 열흘을 더 기다리고 나서야 드디어 농기구를 받게 되었는데, 화가 난 농부가 여보쇼, 대장장이 양반, 창조주께서도 세상을 열흘 만에 만드셨다는데 무슨 농기구 하나 만드는 데에 서른 날이 걸린단 말입니까 하고 물었더랍니다. 그러자 대장장이가 말하기를, 이보시오 농부님, 세상을 보십시오. 그리고 제 작품을 보십시오.”(*)
이븐은 그러면서 자못 연극적으로 한 팔을 들어 어느 곳이랄 것도 없이 허공을 가리켜 보였다. 얄궂게도 그의 손끝이 가닿은 곳은 수녀원이었다.
“세상을 보십시오, 수녀님.”
“세상에는 마물들이 가득하죠. 그것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요. 알아요. 제 부모님도, 그리고 제 어린 동생도 그렇게 죽었으니까요. 그런데, 베르자크 씨, 그래도 우리는 굴하지 않고 우리의 신성을 증명해요. 다쳐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오줌을 받아주며 또 그들의 피고름을 닦아내며 우리의 생을 이끌어갈 선한 의지가 아직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노라 믿어요.”
그건 아마도 메이윌이 이븐과 만난 뒤로 가장 길게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녀 스스로도 벅찬지 마지막 말에는 숨소리가 섞여 들었다.
“내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눈먼 이들이 통곡하며 이르기를 세상은 흑암에 갇혔노라 하더라.”
이븐이 인용한 구절은 아드발이 불신자들을 맹인에 빗대어 꾸짖는 대목이었다. 그건 지옥의 모습을 오싹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아이들이 꾸는 악몽의 연료 역할을 하는 악명 높은 디톤 성서를 출전으로 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오히려 더 불신자들의 비뚤어진 적개심을 자극하는 구절이었다.
“웨인일 때가 더 좋았어요. 그 사람은 무례하긴 해도 비아냥거리진 않잖아요.”
말에서 내리며 메이윌이 말했다.
*
“상처 하나 없습니다.”
그들을 맞으러 나온 수녀원장에게로 이븐이 마치 이삿짐을 부리는 짐꾼인 양 말했다. 어째선지 수녀원은 이븐을 안으로 들여보내주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그와 메이윌은 수녀원의 마당에서 수녀 한 명을 대동한 원장을 맞았다.
“당연히 그래야죠.”
이븐은 마물을 다섯 마리 잡는 동안 전투에 문외한인 사람 하나를 지키는 일의 어려움을 설명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대신에 그는 메이윌이 타고 온 검은 말을 가리키며 말했다.
“말은 제가 수녀원에 기증하는 겁니다. 똑똑한 놈이니 쓸모가 많을 겁니다.”
“마일 신께서 기쁘게 여기실 겁니다. 그렇다면 베르자크, 이제는 용무가 없을 테죠?”
그를 얼른 쫓아내려는 원장의 화법은 여전했다.
“메이윌 수녀님께 작별인사를 하고 싶군요.”
이븐은 메이윌 쪽으로 돌아보며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함께 다닐 때보다 그녀가 더 왜소해 보였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수녀님의 용기 덕분에 당분간은 아인벤트 요새로 향하는 길이 안전할 겁니다. 울포트 일가의 복수도 했고요.”
“사냥꾼님의 노고에 항상 감사드려요. 혹 제가 무례를 범했거든 너그러이 용서해주시어요.”
메이윌도 이븐을 향해 맵시 있게 배꼽에 두 손을 모으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병자를 돌보고 예배를 드리고 채소밭을 가꾸고 또 때로는 장작을 패기도 하는 수녀원의 질서 속으로 그녀는 다시 구겨져 들어갈 것이었다. 수녀원으로 돌아가는 메이윌에게로 원장이 말했다.
“자매님은 원장실에서 기다리세요. 저와 할 얘기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베르자크, 다시는 이런 일로 수녀원을 찾지 마세요.”
“원장님.”
이븐의 부름에 원장은 아직도 더 할 말이 남았느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이븐의 힘준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메이윌 수녀가 제 목숨을 한 번 구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약간의 사이를 두고, 그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말을 내뱉었다.
“그녀가 인간의 신성을 증명했단 말입니다.”
*
“나 여기 있네.”
창을 마주보도록 놓인 긴 테이블의 구석 끝에서 남자가 손을 들어보였다. 이븐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카운터에서 음료를 하나 주문해 들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냐, 아니네. 어제 새벽에 도착했지.”
이븐은 남자의 옆에 놓인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했다.
“다섯 놈이더군요. 제법 인간 흉내를 잘 내는 두 놈이 여행자들을 꼬드겨 나머지 세 놈이 기다리는 곳으로 유인해 간 거였습니다.”
남자는 맥주를 홀짝인 뒤 덥수룩한 콧수염에 묻은 거품을 소매로 문질렀다.
“고생 많았겠구먼. 내 알기로 인간에 가까울수록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이라는데 정말 그런가?”
“어느 정도는 사실이고, 역시 모든 소문이 그렇듯 어느 정도는 부정확합니다. 인간에 가깝다고 해서 다 고등한 놈들은 아니거든요. 개중에는 열등한 신체의 보완책으로 지능과 외양을 활용하는 놈들이 있기도 합니다.”
“이번 경우엔?”
“한 놈은 진짜 거물이더군요. 여관에서 그놈들 장단에 맞춰 주고 있는데 갑자기 시체귀가 들어왔거든요. 근데 이놈이 시체귀를 맨손으로 찢어 버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덕분에 제 일이 하나 줄었죠.”
남자는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천하의 늑대사냥개가 마물 도움을 다 받네그려.”
“알렉, 강아지 취급은 이제 그만.”
알렉은 맥주로 또 한 번 목을 축인 뒤 자신의 불룩한 배를 만족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자넨 자네 별명을 좀 명예롭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 자네 가문의 이름 뜻을 나야 알지마는 요새 사람들이 어디 고어(古語)를 아는가 이 말일세. 잔베르의 베르자크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려도 내가 그 늑대사냥개요, 하면 다들 무릎을 치지 않는가.”
이븐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마구간에 안장과 함께 내려놓은 머리통에 생각이 미친 그가 말했다.
“아무튼, 이번에도 머리통을 들고 왔습니다. 지금 보시렵니까?”
“그러지. 귀찮은 일일랑 얼른 얼른 해치워버리는 게 상책 아닌가.”
알렉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부터 자신이 맡겼던 나무 궤짝을 찾아 들고 이븐의 뒤를 따랐다. 이븐의 말은 한 편에 놓인 축축한 가죽 주머니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땅을 긁으며 옆으로 비켜나 있었다. 알렉이 궤짝을 열자 싯누렇고 알갱이가 굵은 가루들이 드러났다.
“이번에 연구원에서 방부제를 좀 바꿨다는데 그냥 봐서는 모르겠구먼.”
“날씨가 이래서 잔베르까지 가는 길에 상할 일은 없을 겁니다.”
이븐의 말에 알렉은 그제야 저녁의 추위를 느낀 사람처럼 한 차례 몸을 떨었다. 이븐은 궤짝에 들어 있는 나무됫박을 꺼낸 뒤 가죽주머니를 흔들어 궤짝 속으로 머리통을 떨어뜨렸다. 머리 한쪽이 날아가 이븐에게로 쓰러져 뇌수를 흘리던 마물의 것이었다.
“뇌가 망가졌다고 한 소리 듣겠는걸.”
“그 따위 이유로 한 소리 하거든 망가진 뇌를 가진 건 이놈만은 아닌 것 같다고 해주십시오.”
“그거 괜찮은데. 기억해두지.”
이븐이 건네준 빈 가죽주머니에 알렉이 됫박으로 방부제를 퍼 담았다. 이븐이 가죽장화 신은 발로 궤짝 속 머리의 위치를 조정했다. 공간이 충분해지자 그는 나머지 머리통들을 같은 방식으로 굴려 넣었다. 제일 묵직한 머리통이 방부제 속으로 안착했을 때 알렉이 한 마디 했다.
“이놈이 그놈인가 보네그려. 허, 그놈 참 잘생겼다.”
그러나 그것은 잘생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특별히 묵직한 머리통은 경직되어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 그대로였다.
“근데 이놈은 콧구멍이 왜 이 모양인가? 부지깽이 같은 걸로 쑤셨다고 해도 믿겠는데.”
“묻지 마십시오. 밥맛 떨어지니까.”
알렉은 가죽주머니에 담았던 방부제를 머리통들 위로 쏟아 부으며 요령 있게 위를 평평히 골랐다. 그는 궤짝의 뚜껑을 닫고 죔쇠를 채운 뒤, 이 모든 궂은일에 전혀 굴하지 않은 태도로 이븐을 향해 말했다.
“저녁은 먹었나? 난 슬슬 배가 고파 오는걸.”
*
“글쎄, 이 집에서는 이걸 먹어봐야 한다니까 그러네. 살이 이렇게 통통히 차 있는걸.”
“그 게들이 뭘 먹고 그렇게 살이 찼는지 아시면 식욕이 가실 겁니다.”
알렉이 민물게의 다리를 들고 살을 발라내며 말하자 이븐이 핀잔을 주었다. 알렉은 그의 말에 시무룩해져서 게다리를 내려놓고는 말했다.
“웨인이 식사 예절은 가르치지 않았던 모양이구먼.”
“그 양반한테서 배운 거야 술 마시는 재주밖에 더 있겠습니까.”
이븐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 앞에 놓인 훈제한 양고기를 썰었다. 알렉으로부터 전달받은 교단의 지원금 덕분에 당분간은 이런 사치를 부릴 수 있었다.
“참, 그리고 웨인을 만날 일이 있거든 제가 이름 잘 빌려 썼다고 전해주십시오.”
“자네가 그러는 거 웨인이 별로 안 좋아하던데. 저번에도 스승을 욕되게 한다고 노발대발이었어.”
이븐은 알렉의 말에 그 꼬장꼬장한 노인이 지팡이칼로 바닥을 땅땅 두드리며 화내는 모습을 연상하고는 실없이 웃었다. 여하간 놀려먹기에는 이만한 영감도 없다 싶었다.
“그런데 왜 하필 모르델반트인가? 루단에서 만나는 게 더 편하지 않나?”
“여기서 수녀를 한 명 빌렸거든요. 돌려보내고 오는 길입니다.”
“그 원장이 여간 깐깐하게 굴지 않았을 텐데. 자네도 알다시피 데릭이··· 그랬잖은가.”
“그게 또 얘기하자면 깁니다. 아무튼 그 수녀 덕분에 일이 수월해졌습니다. 교단에서 표창이라도 해줘야 할 겁니다.”
이븐은 말을 달려 마물에게로 뛰어들던 메이윌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가녀린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담력이 나왔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자네가 괜찮다면 내가 말을 전하지.”
“아뇨, 나중에 제가 케넌한테 직접 얘기하겠습니다.”
그게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며 이븐은 썰어낸 양고기를 빵에 싸서 입에 넣었다. 훈제한 고기는 그의 취향이 아니었지만 대뜸 피가 흐르는 양갈비를 그대로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입에 든 것을 삼킨 뒤 잊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아, 그리고.”
조금은 식욕이 떨어진 채로, 그러나 별 수 없이 게살을 우물거리고 있던 알렉이 고개를 들어 이븐을 쳐다보았다.
“항마연구원에서 해부 재료로 쓴다는 마물 사체에 대해 좀 알아봐주실 수 있으십니까?”
“연구원이라면 레니스 양한테 얘기하는 게 빠르지 않겠나?”
“로지아는 원칙주의자라서요. 공감해주는 척하면서 결국은 안 들어줄 겁니다.”
예의와 겸양, 그리고 이해심의 결정체인 그녀를 떠올리며 이븐은 조금 불편해졌다. 그녀의 흠잡을 데 없는 예의범절은 도리어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데가 있었다.
“그건 나더러 원칙을 좀 어겨달라는 뜻으로 들리는데.”
“부탁 좀 하겠습니다. 아델라란 이름일 겁니다.”
그 아델라를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뜻으로 알렉이 이븐을 향해 양손을 펼쳐보였다. 이븐은 턱에 힘을 주어 또렷하게 단어를 하나하나 발음했다. 나이프를 쥔 그의 오른손 위로 핏줄이 솟았다.
“그 사체를 당장 교회 묘지에다 묻지 않으면 제가 찾아갈 거라고 전해주십시오.”
“마물 사체를 교회 묘지에······. 일단 알았네. 확실하게 전하지.”
1막 마침.
*사무엘 베케트 作 『엔드게임』의 일부를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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