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 1장 - 양들의 목장(1)
2막 배덕(背德)
산 사람의 배에 산란관을 찍어 넣고 알을 까는 내잠충, 골을 파먹고 그 타액으로는 광증을 유발하는 포식귀······. 그러나 가장 두려운 것은 아직 언급되지 않았으니 결코 외양만으로는 평범한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 기만의 술수를 익힌 마물들이 바로 그것이다.
- 알렉쟝드르 다르나브, 『양(羊)의 탈: 사냥꾼을 속인 마물들』
일단 머리를 쏜 뒤 그것이 혹 사람이거든 내게 와서 이르게. 문제없도록 조처해줄 터이니.
- 이케돈 나이로드, 베르자크의 사냥꾼 서임식에서
1장 양들의 목장
“아시겠습니까? 제국치안청은 자력으로도 이 사건을 충분히 수사해 나갈 수 있지만 당신을 부른 건 수사에서 아주 적은 가능성이라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당신이 뤼스베르크에 있는 동안 자신의 위치를 명심하신다면······.”
“불필요한 충돌은 없을 것이다. 잘 알겠습니다, 경관.”
그건 진심이었다. 이븐은 정말이지 불필요한 충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필요한 충돌도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모르델반트에서 고작 하루를 쉬고 말을 달려 여기까지 온 그를 향해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경관을 보고 있자니 어떤 충돌은 겪을 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잘 알겠으니 이제 내가 멈춰 있는 이 문 앞이 서장실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일 것이라는 나의 판단에 확신을 좀 심어 주시겠소?”
확신은 문 뒤에서 주어졌다.
“들어오십시오.”
경관은 노크하려고 쥐었던 주먹을 펴며 문을 당겼다. 그 틈으로 이븐이 잽싸게 들어갔고 그런 그의 기대와는 달리 경관도 뒤따라 들어왔다. 서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븐에게로 다가오며 악수를 청했다.
“어서 오십시오. 베르자크 엽사(獵師)님. 파브르 드뷔레입니다.”
“예, 반갑습니다. 호칭은 편하게 베르자크라고만 부르십시오. 이븐으로 부르셔도 되고요.”
그건 사냥꾼을 높여 부르는 호칭이자 교단의 문건에 공식적으로 기록되는 단어이기도 했다. 사냥꾼들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냥을 위해 택하는 과격한 방법들, 그리고 오랜 기간 마물과의 전투에 노출되어 피폐해진 정신 탓에 가히 세간으로부터 고운 시선을 받지 못하는 와중에 이런 예의 바른 환대를 받는 건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여기, 에네스바우어 경사와도 인사를 나누십시오.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경관이자 우리 서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입니다.”
서장의 소개에 경사가 일어나 이븐에게 손을 내밀었다.
“과찬이십니다, 서장님. 파울라 에네스바우어입니다. 파울라라고 부르십시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베르자크. 소문으로만 들었을 때는 신화 속 인물처럼 느껴졌는데요.”
“그웬돌라드 지역에 사냥꾼이라고 해봐야 저랑 다 죽어가는 늙은이 하나 포함해서 셋뿐이니 사냥꾼을 부른 시점에서 이미 확률은 삼분지 일이었죠.”
“저런, 바쁘시겠습니다.”
파울라는 빈틈없어 보이는 삼십대 중반의 여자였다. 쪽 지은 갈색 머리와 짙은 눈썹이 고집 센 느낌을 주면서도 항상 얼굴에 걸치고 있는 미소 때문에 활달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서장의 말은 과찬이 아닌 듯싶었는데 이븐의 손을 잡고 흔드는 팔에는 날렵하게 근육이 발달되어 있어 그녀가 단순한 책상물림만은 아님을 보여주었다.
“앉으십시오. 자스민차는 좋아하십니까?”
“서장님, 위르겐을 시키십시오.”
“아냐, 파울라. 내가 하지. 위르겐 자네도 앉게.”
서장의 말에 이븐을 안내했던 경관이 파울라의 옆에 가 앉았다. 이븐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들과 마주 앉으며 이렇게 보니 꼭 어머니와 철없는 아들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서장은 램프에 불을 붙여 주전자의 물을 끓이면서 이븐에게 말했다.
“오시는 길에 위르겐한테서 설명은 들으셨습니까?”
“예, 잘 들었습니다. 사냥꾼으로서의 제 위치를 항상 명심할 것, 함부로 수사에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 말 것. 혹시 제가 사건에 대해 이것 말고 더 알아야 할 게 있습니까?”
이븐의 말에 위르겐의 인상이 구겨졌다. 파울라는 소리 내어 웃으며 위르겐의 옆구리를 악의 없이 주먹으로 찔렀다. 그러나 제법 힘이 실렸는지 위르겐은 상체를 곧게 펴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파울라가 위르겐의 무례를 사과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위르겐 경관은 치안청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서 말이지요. 그래도 열정적으로 수사에 임하는 친구이니 함께 일하는 데에는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저는 수사 지휘권이 우리에게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 했던 것입니다.”
서장은 솔선수범하는 양으로 찻잔에 따뜻한 물을 따르며 자못 엄숙한 투로 말했다.
“경관, 그 문제는 아마도 내가 논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아 보이네만. 자네가 내 대변인을 자처하는 건 기쁜 일이지만 손님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일만큼 중요한 것도 또 없네.”
위르겐이 서장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서장님.”
“자, 차가 왔어요. 따뜻한 차가 왔습니다. 그리고 위르겐, 괘념치 말게. 만회할 기회는 많으니까.”
이븐은 저들끼리 일을 벌였다가 또 저들끼리 정리하는 양을 보고 조금 어이가 없어져서 피식 웃었다. 서장이 일인용 소파에 앉으면서 단란한 가정이 완성되었다. 이븐은 물론 사실이긴 하지만, 갑자기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파울라가 말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셨다는 건 어떤 사건인지는 대강 들으셨단 뜻이겠죠.”
이븐은 알렉으로부터 전해 받은 서류를 품속에서 꺼냈다. 그는 서류의 뭉개진 귀퉁이를 눌러 펴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시체 없는 살인이라고요. 그것도 네 건씩이나.”
“거기에 추가할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다섯 건입니다. 교단에 공문을 발송한 이래로 같은 사건이 한 번 더 발생했습니다. 사흘 전, 성(聖) 율렌의 날입니다.”
이븐은 서장이 건네준 펜으로 서류에 적힌 내용을 수정했다.
“최초 사건 발생일로부터 두 달. 템포가 상당히 빠른데요.”
“더 빨라지고 있습니다. 첫 사건으로부터 두 번째 사건까지는 약 이십 일간의 공백이 있었는데 가장 최근의 사건과 네 번째 사건 간의 간격은 겨우 엿새에 불과합니다.”
파울라의 설명에 서장은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침울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끔찍한 일입니다, 베르자크. 두 번째 사건 이후 성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로는 성 밖의 사람들이 피해자가 되고 있어요. 대부분 성 안에 있는 집을 마련할 여유가 없는 이들이죠. 부끄러운 일입니다. 정말이지 가장 낮은 곳에 임하시는 주님을 뵐 면목이 없어요.”
성호를 긋는 그를 보며 이븐은 조금 전부터 자신을 부담스럽게 만들었던 과도한 친절의 정체를 밝혀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건 독실한 신앙심이었다.
“두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시체가 없는데도 살인이라 단정 짓는 이유는 무엇이며, 마물이 관계되었다고 판단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건 모두 전달 받으셨을 텐데요. 그 서류를 ‘제대로’ 살펴보시면······.”
위르겐이 주제넘게 참견하자 파울라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이븐은 파울라만을 대화상대로 인정한다는 듯이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차분히 대꾸했다.
“좀 더 자세한 내막을 듣고 싶군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출혈량입니다. 첫 번째 사건과 두 번째 사건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지요. 그 외에도 피해자가 강하게 저항한 흔적이 남아 있는 점, 그리고 이 흔적이 어느 순간 사라진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을 데려간 시점에서 이미 사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현장에 남겨진 흔적은 피의자가 대단한 완력의 소유자임을 보여줍니다. 게다가 우리는 시체를 가져간 것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습니다. 마물이라고 판단한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 사건 현장은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따 저희와 함께 가보시죠.”
파울라가 열정적으로 말하자 서장이 이븐의 입장을 배려하며 끼어들었다.
“이보게 파울라, 시급한 일인 건 알지만 베르자크 씨도 쉬셔야 하지 않겠나.”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우리 모두 휴식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니까요. 그보다도 파울라, ‘마지막’ 사건 아닙니까?”
“네?”
“다섯 번째 사건이라고 하셨지요.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이븐의 질문에 파울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위르겐이나 서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파울라가 답했다.
“일, 이, 삼, 사, 오. 다섯 번째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베르자크. 혹시 이걸 물어보신 거라면.”
“제 말은, 여섯 번째나 일곱 번째가 없는 한은 가장 최근의 사건이나 마지막 사건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했을 거란 얘깁니다. 제게 말하지 않은 다른 사건이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이 사건이 마지막이 되지 않으리라는 어떤 확신이라도 가지고 계십니까?”
위르겐이 발끈해서 뭔가 말하려 하자 파울라가 또 다시 제지했다. 그녀는 손으로 깍지를 낀 채 몸을 앞으로 숙였다.
“용어의 혼돈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번호를 붙입니다. 나흘 전만 해도 네 번째 사건이 마지막 사건이었죠. 그러나 베르자크,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마지막이 되도록 해야겠지요.”
이것 봐라? 이븐은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모로 숙였다. 의심은 그의 버릇이었다. 그는 자신의 편집증적인 의심을 더 밀고 가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이 있습니까?”
“네 번째 사건까지만 해도 여섯이었는데 이젠 다섯으로 줄었습니다. 마지막 사건에 대한 용의자 한 명의 알리바이가 확보된 참이거든요.”
“정리해두신 서류가 있다면 제가 한 번 확인해보겠습니다.”
“네, 역시 이따가 건네 드리죠.”
서장이 손목을 이용해 찻잔을 천천히 돌리며 이븐에게 물었다.
“엽사 선생께서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마물이 시체를 가져갈 이유가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시체귀나 그 변종의 소행인 것 같군요. 시체를 가져간 건 먹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건 방금 떠오른 가능성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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