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막 1장 - 머리통 흥정(1)
3막 폐허(廢墟)
목표가 요원할수록 그를 추구하는 이는 수단에 골몰하게 된다. 가령 입이 무거운 자를 고문하는 기술자는 처음에는 손가락을 부러뜨리는 일로 시작한다. 그러나 곧 손톱 아래에 바늘을 꽂고 인두를 달구어 살갗을 지지고 정강이뼈를 부수며 점차로 고문에서 유흥거리를 찾는다. 고문당하는 자가 지쳐 듣고자 하는 바를 실토하더라도 기술자는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답을 얻었기 때문이다.
- 임마누엘 호프만, 『인간본성론』
땅이 크게 흔들리고 갈라져 사람과 가축과 집을 삼키매 도시가 놀라고 하늘이 크게 노하였다 이름이라. 이때 도적이 활개를 치매 무너진 집마다 들추어 값나가는 물건을 제 품에 넣으니 그들의 면면이 낯설지 아니하고 눈에 익더라. 사람의 얼굴이 바뀌기가 이와 같으니 정녕 의인은 없고 하나도 없더라.
- 고탄전서 6장 4~6절
1장 머리통 흥정
스테펜 신부는 지난 해 가을부터 자신의 앞으로 떨어진 새 직책과 그 직책에 따른 업무들에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그가 성직자로서 이십 여 년 간 신을 섬기는 이로 종사해온 까닭은 고결한 윤리관이나 이타심과 자비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나 덕성을 갖추었던 때문이 아니라 단지 신학교에 진학한 결정을 되돌리지 못한 우유부단함과 관성 때문이었다.
그의 고향에 있는 교회에 부임한 이래 별 다른 추문 없이 사람들로부터 젊은 신부님에서 우리 신부님의 호칭으로 바뀌어 불리는 식으로 적당한 존경을 받으며 탈 없는 일상을 굴려가는 것도 예의 관성이었다.
주변에 큰 교구가 없고, 인접한 마을의 교회 신부가 나무를 손질하다 사다리에서 떨어져 얻은 부상으로 지난 해 여름 자리를 보전하게 된 연유로 방역관의 직책은 잠시간 공중에 떠 있다가 스테펜 신부를 적임자로 점찍고 결국 그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본디 역병이 돌던 때에 감염자를 격리하고 간호를 지휘하는 책임을 맡는 방역관은 반세기 전 공중위생의 개념이 대두된 후 세간으로부터 잊혔다가 비교적 최근 나이로드 교황에 의해 “옛것을 새로이 칠해 널리 향기롭게 한다”는 알 듯 말 듯한 취지에 힘입어 부활한 직책이었다. 그러나 직무는 크게 바뀌었으니 그것은 곧 마물의 퇴치를 장려하고 이를 성실히 수행한 이에게 소정의 포상을 제공하는 임무였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그의 책상 위로 온갖 흉측한 마물들의 머리가 오른다는 뜻이기도 했다.
“값을 쳐주셔야지, 신부 나리.”
여자는 지저분한 금발을 손가락으로 꼬며 불경스럽게 말했다. 그녀의 귀 뒤로 꽂은 꽃은 의심의 여지없이 교회의 마당에서 허락을 구하지 않고 꺾은 것이었는데, 스테펜 신부는 바로 어제 올해 들어 처음으로 핀 그 꽃에 대고 만물의 섭리를 주관하는 신의 오묘한 조화에 감화되어 기도를 드렸던 터였다.
그 감동이 하루짜리였다는 사실이 촉발한 분노를 안으로 갈무리하며 그는 책상 위의 머리통에 시선을 옮겼다. 그 머리통은 여자의 것이었는데 포진으로 얽은 푸르뎅뎅한 살갗과 뒤집어진 눈 속의 허여멀건 동공을 제하자면 마물의 것인지 인간의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다시 말해 아주 재수 없는 병에 걸려 요절한 여인의 것처럼 보였다.
“보시기에 어떻소이까?”
산 여자에게도, 죽은 여자의 머리통에 대고도 한 말이 아니었다. 그건 신부가 책상으로부터 조금 고개를 돌려 방 안의 제삼자에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그의 존재는 꽤 오래 전부터 불길한 냄새처럼 방을 떠돌던 차였다. 신부의 말을 듣고 남자는, 앉은 의자의 등받이 너머로 머리를 넘기는 기괴한 자세로 뻗어 있다가 팔과 다리는 늘어뜨린 그대로 목만 들어 신부와 여자를 눈동자로 살폈다.
“흐, 꽃이 아름답네요.”
제멋대로 자라나 얼굴의 반을 가린 검은 머리칼 사이로 남자가 히죽 웃어 보였다. 신부는 도무지 이 방 안에서 규칙적인 세신을 일과로 삼는 이는 자신밖에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재차 물었다.
“저 머리통 말이오. 사냥꾼께서 보시기에는 어떠시냐고 물었습니다.”
사냥꾼이라는 말에 여자가 일순 긴장했다. 그러나 곧 남자의 행색을 살핀 여자의 얼굴 위로 묘한 호기심과 적개심이 동시에 떠올랐다.
“아, 머리통.”
남자는 그렇게 신부의 말을 되풀이하더니 한동안 말이 없었다. 초점 없는 그의 눈은 방 안을 아무러하게나 휘젓다가 그 자신의, 때가 전 암녹색 코트 위의 얼룩을 발견하고 멈췄다. 남자가 대답할 기색은 없이 손가락으로 얼룩을 문지르자 신부가 재촉할 양으로 입을 열었다.
“이게 마물의 것인지 아닌지 분명히 해야만···”
“마물이네요. 흐, 마물.”
남자의 말에 그것 보라는 듯 여자가 의기양양하게 손뼉을 쳤다. 그녀는 씹는담배를 입 속에서 경박하게 굴렸다. 씩 웃는 그녀의 누런 이빨들 사이로 핏물 같은 침이 고였다. 허리에 차고 있던 수통을 꺼내든 그녀는 입술을 모아 그 속으로 침을 뱉어 넣었다. 역한 냄새는 수통을 닫고도 한참 지속되었다. 신부가 별 수 없이 서랍에 손을 얹으려는 차에 대뜸 남자가 말했다.
“마물이 너무 많습니다, 신부님. 그것들은 계속 새끼를 치는 모양이죠. 왜?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세상이 팽팽 돈다는 사실을 마물들도 안다면······.”
남자는 예고 없이 시작된 의미 불명의 수다를 늘어놓다가 다시 등받이 뒤로 고개를 홱 넘겼다. 그러고도 무어라 한참 중얼거리더니 전과 같이 잠잠해졌다. 그 꼴을 지켜보던 여자가 킥킥 소리를 내어 웃었다. 들어 올린 그녀의 검지가 꽃 근처에서 원을 그리며 돌았다. 신부는 점잖게 못 본 척을 한 뒤 서랍을 열어 서류 한 장을 꺼냈다. 펜 끝에 잉크를 찍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소형이 한 마리니까, 45다렌에 세금을 제하고······”
“잠깐, 잠깐.”
서둘러 말하는 바람에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씹는담배를 다시 혀로 굴려 넣으며 여자가 말했다.
“소형이라니 무슨 섭섭한 말씀을.”
“여자잖소.”
신부가 펜으로 머리통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여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비로 젖은 금발이 그녀 자신의 뺨을 왕복해 때렸다. 신부는 손수건으로 얼굴에 튄 빗물을 닦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신부가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되지. 주께서 여자와 남자를 평등하게 만들었다 하지 않았어요?”
“마물로 변한 남자를 잡는 것보단 품이 덜 들었을 거 아니오? 이것도 식구가 있으니 후하게 쳐주는 거요.”
신부가 고개를 까딱여 창밖에서 기다리는 여자의 일행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자는 이거 참 실망이라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우리 신부님이 왜 이러실까. 교황 송하도 그, 뭐라 그러더라, 그렇지, 얼마나 힘세고 큰 마물을 죽였느냐 하는 것은 보수적인 문제다. 중요한 건 마물을 죽일 만한 용기가 그 사람의 배때기에 들었다는 것이다. 뭐 이런 비슷한 말을 했지 않아요?”
여자는 어려운 단어를 말해야 할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며, 그러나 전혀 자신감은 잃지 않은 채 교황의 신년 연설을 제 나름대로 인용했다. 물론 보수적이라 함은 부수적임을 의도한 것일 터였다.
“군터하임.”
신부는 이번에도 고개를 돌려 남자를 찾았다. 남자는 이제 천장을 올려다보며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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