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막 2장 - 비 새는 개집(1)
3막 폐허
2장 비 새는 개집
이븐은 외투를 젖혀 권총의 손잡이에 오른손을 올렸다. 좀처럼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제국 북부의 태양은 낮게 깔린 구름 뒤에서 유폐된 왕처럼 지상에 음울한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한바탕 비가 쏟아지고 난 뒤의 도로 사정은 여간 불쾌한 것이 아니었고, 그의 말은 유독 깊은 물웅덩이를 밟아야 할 때마다 고개를 쳐들었다. 그런 길의 한편에 주저앉은 여자가 있었다. 이븐은 고삐를 늦추고 고삐 쥔 손으로 말의 목을 가볍게 두드렸다.
“주여 당신의 어린 생명을 비탄의 그림자 강에 던지지 아니 하시옵고······ 부디 긍휼히 여겨 나병 환자를 씻기신 당신의 권능으로······.”
여자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서, 이븐은 말에서 내려 고삐를 말머리 위로 던졌다. 그는 여전히 오른손은 권총에 올려둔 채 다가가 그를 등지고 앉은 여자의 위로 희미한 그림자를 덧씌웠다.
“내가 전능한 주를 믿사옵고 그 섭리를 명명하신 이디나르의 말씀을 되뇔 때 나의 죄와 또한 나의 의무를 진실로 알겠나이다.”
여자는 치성을 드리는 듯, 혹은 무엇인가를 어르고 달래는 듯 앉은 몸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여행길에 종종 마주치곤 하는 광인의 행색이었으나 이븐이 긴장을 늦추지 않는 건 두 팔을 앞으로 모으고 있는 그녀의 몸 양 옆으로 머리칼과 다리가 비어져 나와 있던 탓이었다. 이븐은 그녀가 안고 있는 것이 어린아이의 시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권총을 빼 들었다.
“이쪽을 보고 천천히 돌아앉으십시오.”
이븐은 그런 자신의 주문이 퍽 우습다고 생각했다. 보통 때였다면 천천히 돌아서라고 말했을 테지만 이 기묘한 대치 상황을 통사 구조에 대입, 급조한 결과 그 같은 문장이 나왔던 것이다. 여자가 예고도 없이 상체만 휙 돌리자 이븐은 당황해서 한 발 물러섰다. 풀어 헤친 머리가 움푹 팬 뺨에 붙어 굶주린 짐승 같은 인상을 주었다.
“나리, 아니어요. 우리 아들은 몹쓸 병에 걸린 것뿐이어요.”
이븐의 권총을 본 그녀가 몸을 웅크려 시체를 감싸 안았다. 웽- 하고 파리 두어 마리가 달아났다가 다시 아이의 푸르게 변색된 발 위를 재게 돌아다니며 쉬 슬 곳을 찾았다.
“이쪽으로······”
“아니어요, 나리. 아니어요. 참말 아니어요. 놀라지 말어라, 놀라지 말어, 우리 아들. 가신단다. 이제 가신다잖니.”
여자가 완강하게 고개를 좌우로 도리질했다. 그러면서 웅크린 자세로 하체를 움직여 앞으로 기어갔다. 이븐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는 권총을 집어넣고 큰 보폭으로 여자를 앞질러 갔다. 여자는 이븐이 앞에 서자 몸을 돌려 또 그를 등졌다. 이븐은 참지 못하고 여자의 어깨를 그악스럽게 쥐고 당겼다.
뒤로 나동그라진 그녀의 말라붙은 몸피 위에 얹힌 것은 대여섯 살짜리로 보이는 남자 아이의 시체였다. 좁쌀 같은 수포가 몸의 곳곳을 뒤덮고 있었고 핏기 가신 시퍼런 살갗은 그러나, 부패가 심하지는 않았다. 여자는 또 다시 몸을 말아 고집스런 은폐를 시도했다. 이제 그녀는 발악 같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놔라, 놔, 이 악마야! 독사와 거미의 자식아!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그렇게 하나를 앗아가고도······!”
여자의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저주가 어느 순간 그쳤다. 이븐은 전보다 빠르게 권총을 꺼냈다. 가래가 끓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시체라고 생각했던 아이의 가녀린 목에서 새어나왔다. 이븐은 엄지로 권총의 해머를 젖혔다.
“그걸 내려놓고 물러서십시오.”
이븐이 엄중히 경고했다. 고집을 부리면 힘으로라도 떼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는 여자의 목깃을 왼손으로 쥔 채 손아귀에 힘을 넣었다.
콰직-
살을 씹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이븐은 얼른 여자를 뒤로 당겨 넘어뜨렸다. 옷깃이 뜯길 정도로 갑작스런 힘이 가해졌으나 여자는 여전히 아이를 놓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벌러덩 뒤집어진 채 아이가 자신의 배를 씹도록 두고 있었다. 모체의 고통만큼 아이의 생이 분명해지는 아이러니 속에서 감격과 환희로 여자는 몸을 떨었다.
“배가 고팠구나··· 배가 고팠어······.”
이븐은 이게 아주 질 나쁜 장난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리지 않을 수도 있었던 이들이 그의 앞에서는 속절없이 물려 나갔다. 그가 지켜보고 있는 동안 그들은 변했고, 그의 탄환으로 말미암아 끝이 났다.
이븐은 욕설을 뱉으며 힘을 실어 아이의 몸을 발로 찼다. 뱃가죽이 뜯겨나가자 여자가 예정에 없던 출산의 고통으로 비명을 질렀다. 멀찍이 곤두박질쳤다가 일어나 다가오는 그 조그만 마물을 향해 이븐이 총을 갈겼다.
“내 아들, 내 아들!”
엉망이 된 아이의 시체와 아이를 쏘고도 동요 없이 서있는 남자의 사이에서 어디로 먼저 달려가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배를 감싸 쥔 여자가 악을 썼다. 달달 떨리는 다리로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다시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그녀의 피부 아래서 액체가 끓어오르듯 물집이 차오르고 터졌다.
터진 물집의 체액이 주변의 피부에 닿아 다시 물집을 일으키는 식으로 그것은 온몸으로 번져갔다. 여자는 고통으로 사지를 뒤틀었다. 눈이 뒤집히고 입에서 거품이 흘러나왔다. 이븐은 여자의 머리를 겨냥했다. 이제 여자의 눈동자는 백태가 끼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븐이 조문처럼 낮게 읊조렸다.
“먼저 가서 기다리십시오.”
방아쇠는 쉽게 당겨졌다.
*
“아, 베르자크 씨.”
마구간 앞에 앉아있던 소년이 반색을 하며 일어났다. 개도 덩달아 일어나며 그 앞에서 불안한 걸음걸이로 얼쩡댔다.
“저건 나만 보면 저러네.”
이븐이 말에서 내리며 개를 향해 불평했다. 소년은 개에게 앉을 것을 지시하고는 이븐이 건네준 고삐를 넘겨받았다.
“겁이 많아서 그래요. 언제쯤이면 덩칫값을 할까.”
잔베르에서 함께 살아남은 소년과 개의 우정은 각별한 것이었으므로 이븐은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말을 이끌고 마구간으로 들어가는 소년을 따르며 이븐이 물었다.
“후스 씨는?”
“예배드리고 계세요. 복원절이잖아요?”
어쩌면 그걸 잊을 수 있느냐는 듯 반문하는 소년의 말에는 악의가 담겨있지 않았다. 그것은 다만 무심한 이븐의 태도를 멋대로 겸손으로 바꿔 읽은 데서 기인한 경외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복원절은 잔베르가 늑대인간들로부터 해방되고 처음으로 다시 모여 예배를 올리게 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였으므로 이븐의 존재에 크게 기대고 있는 기간이었다. 의도치 않게 공교로운 날짜를 택해 잔베르에 오게 된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좀 숨어 다녀야겠는걸.”
“걱정 마세요. 베르자크 씨 봤다고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게요.”
어떤 위대한 음모의 공모자가 된 것처럼 소년이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사춘기 소년의 정신적 아버지 역할은 그가 결코 기꺼워하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이븐은 별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소년이 안장에서 짐을 내리는 일을 건성으로 거들던 그의 눈에 낯익은 말이 들어왔다.
말을 살펴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 그가 갑작스럽게 짐을 놓은 탓에 소년이 약간 휘청거렸다. 검은 바탕에 콧잔등과 발이 흰 말이었다. 그 옆에 놓인 복잡한 기계 장치가 달린 안장에 이르러서 이븐은 말의 주인에 대한 어렴풋한 짐작을 확신할 수 있었다.
“어제 오셨어요.”
소년이 낌새를 눈치 채고 어렵게 입을 뗐다. 말을 쓰다듬어주던 이븐이 물었다.
“날 보러 온 건가?”
“그런 것 같아요. 사냥개가 어쩌고 하시던데요. 다른 말씀은 영 알아듣기 힘들어서······.”
소년은 자신의 말이 혹 이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지 노심초사 하며 말했다. 이븐은 주머니를 뒤져 동전 몇 개를 소년에게 건네주고 성당의 부속 건물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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