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막 2장 - 비 새는 개집(2)
*
“기다리십시오.”
이븐이 셔츠의 목에 머리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침대 위에 개켜져 놓였던 셔츠에서는 잘 마른 빨래의 냄새가 났다. 이제 막 목욕을 끝낸 그는 다른 쪽 팔을 소매에 꿰며 문을 열었다.
“이븐!”
볼을 맞대는 남부식 인사를 위해 머리를 들이대는 로지아에게로 이븐이 허리를 굽혔다. 언젠가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탓에 민망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던 인사법이었으나 로지아는 그 후로도 개의치 않고 이를 고집했고 이븐은 그럴 때마다 뻣뻣하게 서서 어색한 순간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녀 역시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모양인지 몸에서 옅은 향내가 났다.
“온다는 얘기도 않고.”
“우편보다 내가 빠를 것 같아서.”
이븐이 한 편으로 물러나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했다. 그녀는 책상 앞의 의자를 당겨 앉았다.
“다르나브 씨한테서 얘기 들었어요. 뤼스베르크에 갔었다고요. 일은 잘 해결됐나요?”
“필요 이상으로 잘 풀렸지.”
“다행이네요. 얘기 듣고 걱정······ 아 이븐, 또 그러시네요.”
이븐의 대답이 진심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로지아가 입을 비죽 내밀며 말했다. 이븐은 로지아와 마주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죽였지. 보통 그런 걸 초과달성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번 진료에서야말로 그 성격을 손보고 말겠어요.”
해를 더할수록 비뚤어진 유머 감각이 격해지는 이븐에게로, 그의 주치의인 로지아가 자못 진지한 투로 말했다. 그런 것이 가능할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이븐은 마음대로 하시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마침 잘 오셨어요. 정기 진료를 조금 앞당기죠. 경과도 지켜볼 겸 휴식도 취하시고. 참, 그리고 크라우제 씨가 보여줄 게 있다던데 공방에 들리시는 거 잊지 마세요. 은탄환도 전에 말씀하신 대로 구비해뒀어요. 예산이 부족해서 교황청에 알렸는데 나이로드 교황 성하의 친필 서장과 함께 온 것 있죠!”
로지아가 열기에 들떠 수다를 늘어놓는 일은 종종 있는 것이었으므로 이븐은 그녀가 마지막 말에 손뼉까지 가미하는 양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뭐라고 적혀 있었냐면, 제가 열어본 건 아니에요. 저는 이븐을 기다리자고 했는데, 음, 아무튼 그렇게 됐어요. 그러니까 뭐라고 적혀 있었냐면, 성경을 인용하셨는데······.”
로지아는 인상을 쓰고 양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이마를 가린 검은 앞머리가 짙은 눈썹의 사이를 이어 일자눈썹의, 바보 같은 인상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저 순진무구한 듯 보이는 작은 머릿속에 수석 연구원의 빛나는 지성이 깃들어있음을, 이븐도 모르지 않았다.
“말씀을 칼로 삼고 칼을 법으로 삼으니 마땅히 부정한 자들이 네 앞에 무릎 꿇음이라. 그리고 그 뒤는 응원하시는 말씀 두어 마디였어요. 은이 부족하면 언제든 말하게. 촛대 좀 녹인다고 내게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단, 추기경은 제외.”
이븐은 그 특유의 피식 하는 웃음을 흘렸다. 추기경이라면 자문위원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동시에, 나이로드를 교황의 자리에 앉히는 데 일조했던 로덴치오를 이르는 말일 터였다. 언젠가 교황과 함께 한 식사에서 그가 이븐에게 귀엣말로 로덴치오에 대한 불평을 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븐에게 그토록 격의 없는 행동을 한 데에는 나이로드 교황의 파격적인 성미가 한몫했다.
“뷔센이 와 있다던데.”
이븐이 마구간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네, 맞아요. 지금은 주무시고 계실 거예요. 이따 깨시면 말씀 나눠 보세요.”
“다른 말은 안 하고?”
남을 욕할 줄 모르는 로지아가 난처한 표정만으로 심경을 전했다. 이븐과 마찬가지로 그웬돌라드 지역을 담당하는 사냥꾼 중 하나인 뷔센은 이븐이 알기로 십 년 이상을 교단의 사냥꾼으로 복무해왔다. 그런 그가 언제부터 정신을 놓았는지 이븐은 알지 못했는데, 실상 그뿐 아니라 그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는 신빙성 없는 풍문에 의존할 밖에 없었다.
역시 그웬돌라드의 사냥꾼이자 이븐의 스승이기도 한 웨인에게 그에 대해 물었을 때 말을 가려 하는 법이 없던 그 노인은 단지 목적을 잊은 고문 기술자에 대한 우화를 들려주곤 애매한 감상을 덧붙였을 뿐이었다.
‘뷔센은 답을 찾았어. 그 답이 지저분한 고통으로 가득 차있단 건 우라질,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지.’
“하긴, 다른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꼭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니지. 세상이 노란색이라는 견해에는 변함이 없는지 궁금하긴 하네.”
“글쎄요. 이번엔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던데요.”
로지아는 경망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가 얼른 헛기침으로 무마했다.
“장족의 발전이군. 적어도 그건 과학적인 사실이니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제가 군터하임 씨를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제 전공이 아니라서······.”
“그래, 일단 뷔센도 아직은 인간이니까.”
농담처럼 던진 말의 함의를 깨닫고 로지아가 침묵했다. 이븐이 담배를 꺼내들고 창을 열기 위해 일어났다. 열린 창문으로 불어온 바람에 젖은 흙냄새가 섞여 있었다.
*
“사냥꾼이 있더라니까. 뭐라더라? 군트바하?”
“군터하임.”
앰버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여자가 수정해줬다. 앰버는 그런 걸 어떻게 아느냔 듯 여자를 쳐다봤다. 그녀의 입에서 더 상세한 정보가 튀어나왔다.
“팔 인의 사냥꾼 중 하나다. 죽인 마물 수가 세 자리에 이른단 자다.”
“팔 휜 사냥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실크해트를 매만지며 오스왈드가 앰버의 말을 고쳐줬다.
“팔 인의 사냥꾼. 교단에서 사냥꾼 길드를 창설하고 나서 당시 우리같이 돈 받고 마물 잡아주던 이들을 불러 모았는데 그때 딱 여덟 명이 교황 앞에 집결했지. 그게 십 년도 더 된 일이니까, 그렇게 불러주는 건 경로 우대 차원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듣기론 죽었거나 불구가 됐거나 해서 남은 건 중늙은이뿐이라더군. 근데 올가, 그자가 팔 인의 사냥꾼 중 하나라고?”
복잡한 얘기가 나오자 앰버는 쉽게 흥미를 잃고 손을 들어 맥주를 더 주문했다.
“미쳤다고 들었다. 그 다음은 모른다.”
올가는 허락을 구하지 않고 여급이 앰버 앞에 내려놓은 맥주잔을 들어 자신의 맥주잔에 절반을 옮겨 담았다. 취(取)할 수 있으면 취하라는 것이 이들 무리의 신조였으므로 앰버도 말리지 않았다. 그녀는 문틈으로 엿들었던 스테펜 신부의 말을 떠올리고 불안감을 공유했다.
“그 좀팽이 신부가 우릴 의심하고 있는 것 같던데.”
“아무렴 어때. 우리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니고.”
오스왈드가 별 위기감 없이 말하자 올가가 고개를 저었다.
“문제 생길 수 있다. 사냥꾼이 농장 찾으면 서리할 거다.”
그건 그들 사이에서 미리 약속된 단어들이었으므로 앰버와 오스왈드는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앰버가 손짓으로 무리를 불러 모았다. 테이블의 중앙에 셋의 머리가 모이자 앰버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이건 내 생각인데······.”
유독 먼 곳에 앉았던 탓에 자세가 불편해진 오스왈드가 표정으로 앰버를 재촉했다.
“이참에 그냥 다 수확해버리는 게 어때? 갖고 있다가 돌아다니며 파는 거지.”
“그 많은 걸?”
“수레를 빌리자.”
오스왈드의 질문에 앰버가 답했다. 서로의 표정 교환으로 합의가 도출되었음을 깨달은 그들은 본래의 자세로 돌아왔다. 앰버는 자신이 이 대담한 계획의 입안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뿌듯한 모양인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오스왈드가 잔을 들었다.
“그럼, 풍년을 위해 건배!”
- 작가의말
다음 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4/23~4/26) 하루에 하나의 글(3000~4000자 분량)만이 연재됩니다. 4월 27일 금요일부터 정상 연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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