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막 3장 - 불굴 혹은 불구(1)
3막 폐허
3장 불굴 혹은 불구(*)
“인육에 대한 갈망을 느낀 적이 있나요?”
이븐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바늘을 꽂지 않은 왼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로지아, 늘 하는 얘기지만 이건···”
“예, 아니요. 이븐, 답은 예, 아니요 중에 하나여야 해요.”
실험실과 진료실을 겸하고 있는 그녀의 방에서 로지아는 작은 독재자가 되어 군림했다. 답을 추궁하는 그녀의 눈동자에 단호한 빛이 서렸다. 이븐은 산장의 저녁 식사 장면을 떠올렸다. 어떤 기억들은 그것이 새겨질 때보다 되새김질 할 때 더욱 강렬해지곤 했다.
이제 그의 머릿속에서 재구성된 그날의 식당 한 구석에는 가정에서 소시지를 만들 때 사용되는 기계가 있었다. 반쯤 완성된 내용물이 배출구에 걸린 채로. 로지아의 시선을 피하며 그가 답했다.
“예.”
로지아는 동요 없이 답안을 기재했다.
“빈도를 다음 다섯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표현하자면 무엇인가요? 거의 느끼지 않음, 매우 가끔 느낌, 가끔 느낌, 자주 느낌, 매우 자주 느낌.”
“죄 비슷한 말뿐이잖아. 알았어. 거의 느끼지 않음.”
반가운 대답이 나오자 로지아가 고개를 까딱하며 기대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흠, 그러면 이번에는 사냥감을 입으로 물지 않았겠네요?”
이븐이 대답은 않고 여전히 시선을 피하고 있자 로지아는 펜을 한 손으로 옮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븐의 벗은 팔뚝을 찰싹 때렸다.
“또 그랬군요!”
그 이후에도 ‘못 살아, 정말’ 따위의 말을 연발하던 그녀는 문항은 잠시 미뤄두고 서류에 없던 질문을 즉흥적으로 던졌다.
“대체 총 쓰는 사냥꾼이 뭣 하러 자꾸 몸으로 싸우는 거예요?”
“좋은 소설이 그러하듯 진짜 인생은 의외성의 연속이다. 운명은 자신의 다음 발을 디딜 곳을 결코 들키지 않는다.”
책으로부터 문장을 인용하는 것은, 예고 없이 현학적 기질이 발동하곤 하는 이 괴팍한 사냥꾼의 특기였으므로 로지아는 삼류 악당의 대사를 읊으며 사실상 항복을 선언했다.
“그건 또 어디서 읽었대. 자꾸 그래 봐요. 나도 다 방법이 있으니까.”
로지아의 엄포에 이븐이 실없이 웃었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아 다음 문항을 읽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사람을 해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나요?”
“그건 질문이 잘못된 것 같은데. 난 이유가 없으면 만들어.”
“그런 걸 별다른 이유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대답해요, 어서.”
“예.”
로지아는 이번에는 불만을 담아 고개를 까딱였다. 그녀는 서류의 한 귀퉁이에 무엇인가 필기체로 날려 적었는데 이븐은 그에게로 투여될 약물이 방금 조정되었음을 경험에 비추어 눈치 챘다.
“빈도를 표현하면?”
“종종 느낌.”
“가끔 아니면 자주, 둘 중 하나로 답해줘요.”
“문항과 선택지가 부적절하다고 느끼십니까? 예. 매우 자주 느낌.”
잠시 그의 팔뚝으로부터 호스로 연결된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만이 방을 채웠다. 이븐은 호스를 타고 빠져나갔다가 다시 몸 안으로 주입되는 피의 흐름에 정신을 내맡기고 있다가 유예하고 있던 대답을 내려놓았다.
“가끔 느낌.”
“안 좋아요. 저번보다 나아진 게 거의 없어요.”
“그 말은 수은 복용량이 더 늘어난단 건가?”
이븐의 물음에 로지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아뇨, 수은은 그대로 둘 거예요. 두통 때문에 그러세요?”
“두통은 참을 만한데 악몽을 꾸니까. 사냥 중에 환각이라도 보이면 곤란하잖아.”
“환각을 보나요?”
연결된 호스가 완전히 빈 것을 확인하고 이븐이 팔뚝에서 바늘을 뽑았다. 바늘이 들어갔던 자국은 금세 사라졌다.
“아직은. 근데 어디서 듣기로는 계속 복용하면 환각을 보게 된다던데.”
“이븐의 몸은··· 글쎄, 특이하니까. 축적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일부는 배출돼요. 환각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로지아는 답안을 모두 채워 넣은 서류를 품에 안고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
“악몽은··· 어떤 내용이죠?”
“개인적인 질문인가?”
로지아는 기계의 전극에 물려 있던 전선을 제거해 전원을 차단했다.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이븐은 눈을 감고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레베카가 빌려줄 책을 들고 찾아와. 난 침대에 쇠사슬로 묶여 있고 그녀가 다가오지 않기를 바라는데, 레베카는 옆에 앉아서 내 이마를 쓸어. 그러면 나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물어 버리지. 그런 식이야.”
세척이 예정된 의료 기구를 담는 통에 호스를 정리해 넣으며 로지아는 말없이 이븐의 얘기를 들었다.
“어떨 때는 내가 죽였던 마물들이 다시 살아나는 꿈을 꾸지. 내가 미처 손쓰지 못한 탓에 감염되어 버린 이들, 그래서 내가 죽였던 이들이 죽은 모습 그대로 다시 살아나서······.”
로지아가 숨을 들이켜며 황급히 돌아섰으므로 이븐은 말을 끝맺지 않았다.
“로지아.”
그녀는 앰풀에 주삿바늘을 꽂아 넣었다. 이븐이 알지 못하는 누런 액체가 주사기의 몸통에 채워졌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드는데.”
로지아가 다가와 이븐의 팔뚝에서 혈관을 찾았다. 이븐은 그녀의 침묵에 개의치 않고 말을 계속했다.
“변하고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몸이 변하더라도 정신은 그대로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말이야. 막연한 감 같은 게 아냐. 내가 내 팔을 들어 물건을 집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이것도 내가 손만 내뻗으면······.”
“안 돼요.”
주삿바늘을 혈관에 삽입하며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주사기의 몸통 속에서 이븐의 혈액이 잉크처럼 번졌다.
“오늘 새벽에 내가 죽인 마물은 경관으로 행세하던 자였어. 본색을 드러내기 전까지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지. 나만 속은 게 아냐. 다 속아 넘어갔지. 전부 다.”
그렇게 말하면서 이븐은 덧붙인 말이 변명처럼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이성을 유지하고 자신의 책무에 충실하던가요? 이븐, 일단 마물로 변하면 뇌가 달라져요. 그 사람, 아니 그 마물이 이성적인 것처럼 보였어도 결국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에 합리적이었을 뿐일 거예요.”
“그랬을지도 모르지.”
로지아가 주삿바늘을 빼냈다. 혈관을 타고 약물이 몸 안으로 퍼지자 피부 위로 수백 마리의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에 뒷목의 털이 곤두섰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이븐의 목소리는 위협적으로 낮게 깔려 나왔다.
“이 약물들이 뭔가를 자꾸 가려. 내 안에 분명하고 짙은 무엇인가가 도사리고 있는데, 약이 핏줄을 따라 돌면 그게 흐릿해져.”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움켜잡은 그가 말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내 안에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어.”
새 주사기에 또 다른 약물을 담으며 로지아가 말했다.
“갈증이 갈증에 머무는 한 당신은 인간으로 남을 수 있을 거예요.”
*김경주 시인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 대한 강정 시인의 작품해설 「불굴을 향한 마음의 불구, 또는 영혼의 빈 공간」에서 따옴
- 작가의말
제목인 “불굴 혹은 불구”에 대한 출처를 추가했습니다. 18.7.22.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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