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막 4장 - 흉년(1)
3막 폐허
4장 흉년
비가 내렸으나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계획은 강행되었다. 사흘을 연달아 내렸다 그치고 다시 내리기를 반복하는 비였다. 무개마차는 웃돈을 얹어주고서야 겨우 빌릴 수 있었다. 진창길 위를 달려야 했으므로, 그리고 갈 때보다 돌아올 때 더 무거워질 예정이었으므로 마차는 두 마리 말이 끌고 있었다.
앰버는 연신 씹는담배를 입 안에서 굴리며 간혹 길 위에다 침을 뱉었다. 말을 모는 그녀 뒤로 올가의 칼 가는 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왔다.
“거의 다 왔어. 준비해.”
마을로 들어서는 오르막길에서 앰버가 말했다. 역시 뒤에 앉은 오스왈드가 목을 양쪽으로 소리 나게 꺾으며 몸을 풀었다. 올가가 몸을 조금 일으켜 고개를 빼고 마을을 응시했다.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보초 있다.”
“나한테 맡겨.”
오스왈드가 크라바트를 풀어 물기를 짜낸 뒤 다시 목에 감으며 답했다. 마차가 마을 입구를 지나 헛간 앞으로 다가서자 보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는 곤봉이 쥐어져 있었다. 헛간 입구에 걸려 있던 랜턴을 손으로 옮겨 쥔 남자는 앰버의 얼굴을 확인하고 미심쩍은 눈빛이 되었다.
“이렇게 불쑥 찾아뵙게 되어 대단히 죄송합니다.”
오스왈드가 마차에서 내리며 말을 걸었다. 그는 실크해트를 벗고 허리를 숙여 과장되게 인사를 올렸다.
“무슨 일이오?”
한껏 경계하는 남자에게로 오스왈드가 다가갔다. 앰버가 마차에서 철창을 꺼내드는 것을, 오스왈드의 몸이 가렸다.
“긴급한 사안입니다. 또 조용히 처리해야 할 사안이기도 하고요.”
의혹이 더해지는 남자의 표정에 대고 오스왈드가 그에게만 들릴 크기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냥꾼이 냄새를 맡았습니다. 주민들을 옮겨야 합니다.”
남자의 표정은 의혹에서 놀라움으로 바뀌었다가 마지막에는 노골적인 적개심으로 화했다.
“당신들 때문이오?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하지 않았소?”
“이제 와서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우리가 책임지고 처리하지요.”
남자는 돌아서서 랜턴을 있던 자리에 다시 걸었다.
“애초에 당신네들을 들여놓지 말았어야 했어. 사람들에게 알리겠소.”
그렇게 말한 남자는 처마에 걸린 종을 향해 다가갔다. 성난 걸음걸이였다.
“쓸데없는 짓을.”
오스왈드가 허리에 걸려있던 채찍을 빼 들었다. 허공을 한 번 후려친 채찍은, 반동을 타고 남자에게로 쇄도했다. 오스왈드가 남자의 다리를 감은 채찍을 당기자 그가 앞으로 엎어지며 진창에 몸을 처박았다.
앰버가 재빨리 남자의 등에 올라타며 풀어낸 허리띠로 그의 목을 조았다. 놓친 곤봉을 주워든 남자가 팔을 뒤로 꺾으며 휘둘렀다. 올가가 그의 손을 발로 차 곤봉을 멀리 떨쳐냈다. 그녀가 말했다.
“살해 안 된다. 기절이 좋은 방법.”
남자의 몸이 늘어지자 앰버가 허리띠를 회수하며 일어났다. 그런 그녀를 밀치며 기절한 줄 알았던 남자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컥-.”
남자의 몸은, 올가가 칼자루로 뒷목을 내려치자 다시 늘어졌다. 이번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새끼, 머리 굴리기는.”
땅에 꽂아둔 철창을 다시 손에 쥐며 앰버가 욕지거리를 뱉었다. 오스왈드가 쓰러진 남자의 몸을 뒤적였다. 점점 다급해지던 몸짓이 우뚝 멈추더니 그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없는데?”
“뭐? 잘 찾아봐.”
그러나 이미 부츠까지 벗겨 샅샅이 뒤져본 뒤였다. 올가가 고개를 까딱여 물러설 것을 지시했다. 앰버와 오스왈드는 쓰러진 남자의 팔을 하나씩 들어 질질 끌며 옆으로 비켜섰다.
문 앞에 서서 올가는 두 개의 곡도를 번갈아 다른 칼등에 대고 갈았다. 어느 때보다도 예리해진 쌍곡도를 양손에 쥐고 그녀가 자세를 잡았다.
챙-
녹슨 쇠사슬이 끊어지며 자물쇠와 함께 진흙바닥에 떨어졌다. 올가가 다시 칼을 갈았다. 허리까지 직선의 모양을 유지하다 돌연 크게 휘어지는 특이한 형태의 곡도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숫돌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스왈드가 감탄의 의미로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앰버가 한껏 유쾌해져서 말했다.
“어디, 우리 예쁜이들은 잘 있으려나.”
앰버가 쇠사슬을 마저 끌러내며 문을 당겼다. 비 젖어 퀴퀴한 헛간의 냄새가 썩은 살의 고약한 냄새와 섞여 그들에게로 끼쳐왔다. 그들은 준비해온 복면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오스왈드가 랜턴을 들고 따라 들어갔다.
들창을 모두 닫아건 헛간 안은 몹시 어두웠다. 오스왈드가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다가가 나무기둥에 랜턴을 걸자 헛간 안에 들어찬 사람들의 형체가 드러났다. 제각기 머리와 팔을 아래로 향하게 하며 죽은 듯 고요히 서있는, 기괴한 풍경이었다.
“앰버가 입구를 막고······. 올가, 괜찮겠지?”
“이들이 공격은 한다. 그러나 매우 위협적이지 않다. 세 명, 열하나, 충분할 것. 오지, 창 열 수 있나?”
오스왈드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음 채찍을 뻗어 좌우의 들창을 강타했다. 호쾌한 소리와 함께 채찍의 위력으로 창이 뜯겨져 나갔다. 비 내리는 새벽하늘에서 끌어온 빛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는지 올가가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스왈드 역시 칼날이 박힌 면을 안쪽으로 향하게 채찍을 고쳐 잡으며 그녀의 뒤에 버티고 섰다.
“자, 그럼 시작해보자고.”
앰버의 말을 신호로, 올가가 춤추듯 곡도를 휘두르며 마물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 위로 머리통 두 개가 굴러 떨어졌다. 검무의 끝에서 교차된 곡도를 양쪽으로 가르며 펼치자 또 하나의 머리통이 떨어졌다.
“그르르륵-.”
습격을 감지하고 깨어난 마물의 목에 오스왈드의 채찍이 감겼다. 채찍을 당기자 칼날에 걸린 살점이 뜯겨져 나오며 목뼈만이 남았다. 오스왈드의 앞에 거꾸러진 그것의 목을, 앰버가 철창으로 후려쳐 부쉈다. 두어 차례 더 내려치자 완전히 끊어진 머리통은 충격의 여파를 간직한 채 발치에서 굴렀다.
“진즉에 이랬어야 했어. 거래는 얼어 죽을 놈의 거래.”
앰버가 다가드는 마물의 이마에 철창을 밖아 옆으로 휘두르자 목뼈 끊어지는 소리가 헛간의 구석까지 뻗쳤다. 오스왈드가 채찍을 휘둘러 마물의 접근을 막았다. 휘두른 채찍으로부터 살점이 후드득 떨어졌다.
여섯, 하고 그가 나직이 읊조리며 남은 수를 셌다. 올가는 헛간의 한 가운데서 다시 검무 같은 공격을 펼쳐 보였다. 이제 헛간의 모든 마물은 깨어나 뒷걸음질 치며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올가의 공격이 매섭게 따라붙으며 또 한 마리의 목을 찢었다.
고통으로 울부짖으려는 마물은, 그러나 성대가 절단되어 피 끓는 소리만을 냈을 뿐이었다.
“잠깐.”
올가가 호흡을 고르며 멈춰 섰다. 움직임을 멈춘 그녀에게로 접근하는 마물을 오스왈드의 채찍이 잡아다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올가는 여전히 곡도를 바깥을 향하게 들고 선 채로 바닥의 울림에 주의를 기울였다.
“뭔가 온다.”
“무슨······?”
앰버가 무엇인가 말하려 입을 떼는 순간 그들이 마주보고 선 헛간의 벽이 무너지며 거대한 형체가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앰버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철창을 무너진 벽에 겨눴다. 어둠 속에서, 랜턴 불빛의 미약한 도움을 받아 그것은 점차로 형체를 드러냈다.
비 맞아 번들거리는 새까만 가죽은 양서류처럼 보였기에, 무지막지하게 큰 덩치와 인간의 치아를 연상시키는 불쾌한 이빨을 제하자면 그건 마치 도롱뇽 같았다. 그것이 틈을 비집고 다리를 밀어 넣으며 그들에게로 천천히 접근하자 올가가 눈을 떼지 않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 마물은, 상황을 파악하는 것처럼 잠시간 멈춰 있더니 이윽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덩치가 헛간의 지붕에 닿을 만치 거대했다. 앰버는 승산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마물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작은 목소리로 올가를 불렀다.
기이한 것은 그들이 잡아 죽이던 마물들의 행동이었다. 그 거대하고 시꺼먼 도롱뇽이 나타나자 이 마물들은 마치 신을 영접한 신도인 양 제자리에서 그것을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로 와, 올가."
“앰버, 나가서 마차 돌려. 오스왈드와 나, 천천히 따라 나간다.”
“저게 대체 뭐야?”
앰버는 경악을 담아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이 번쩍였다. 이윽고 그들을 덮친 것은 귀가 먹먹해질 만큼 폭발적인 음파였다.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한 앰버가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며 오스왈드의 목깃을 잡고 끌어당겼다.
거대한 마물을 따라 감염된 인간들이 울부짖었다. 이 마물들은 돌연 포악해져서 입가에 침을 흘리며 도약을 준비했다. 올가가 뒤를 돌아 달음질치며 앰버와 오스왈드를 서둘러 바깥으로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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