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극1. 전초전(1)
막간극1. 전초전
나이로드의 뻗은 손의 반지에 입을 맞춘 남자가 뒤로 물러나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댄 채 한쪽 발을 앞으로 내미는 자세로 앉아있는 나이로드가 쾌활하게 말했다.
“몸을 일으키십시오, 리카드.”
“하오나 제가 어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오랜 기간의 교육으로 말미암은 기계적인 말씨였다. 그의 말에서 감추지 못한 장난기가 느껴졌으므로, 나이로드 역시 짓궂게 말했다.
“그렇담 내가 그대의 앞으로 가 무릎을 꿇겠소. 정녕 그리해야 속이 시원하겠습니까?”
앉은 의자의 양 팔걸이를 손으로 쥐는 그의 모양새가 정말로 실천에 옮길 기색이어서 리카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물 초입인 그의 얼굴은 아직 소년다운 데가 있었다. 승마와 사격을 즐긴다고 알려진 리카드의 피부는 건강하게 그을려 있었고 크지 않은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는 날쌘 사슴을 연상시켰다.
“사실 무릎 꿇고 앉아 있는 것이 더 편하긴 합니다.”
그의 말에 나이로드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만큼 어리지는 않았어도 나이로드 역시 젊기는 마찬가지였다. 주교로서 추기경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교황에 선출된 이는 나이로드가 역사상 세 번째였다. 그는 땋아 늘어뜨린 은발을 연신 손으로 매만지며 답했다.
“그렇다면 어서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소만, 그래도 환영사는 해야 하니까.”
나이로드가 그와 조금 떨어져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로덴치오 추기경의 표정을 살피며 목을 골랐다.
“그대가 이렇게 나를 찾아와주니 기쁘기 한량없소. 오늘 함께, 그대와 내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는 세간의 오해를 불식시켜보도록 합시다.”
정확히 ‘못 잡아먹어 안달’의 구절에서 추기경이 아랫입술을 말아 넣으며 못마땅한 심기를 내비쳤다. 나이로드는 그런 추기경 쪽으로 슬쩍 눈길을 돌렸다가 예상했던 반응에 즐거워져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리카드가 예의 바르게 상체를 숙이면서도 고개는 들어 나이로드를 향한 시선을 유지한 채 답했다.
“물론입니다, 교황 성하.”
*
일단 화려하고 거추장스럽기만 하면 허례허식이라 명명하기를 서슴지 않는 나이로드 교황의 검약이랄지 괴벽이랄지 여하간 아랫사람들을 괴롭게 만드는 성정 탓에 식사는 일국의 황제가 함께 한 자리로는 유례없이 간소하게 차려졌다. 리카드는 자기 몫으로 덜어진 고기의 양이 성에 차지 않는지 연신 식탁의 중앙에 놓인 칠면조를 향해 눈을 빛냈다.
“이 은촛대 말이오.”
나이로드가 어깨에 두르고 있던 영대(領帶)를 끌러 의자 등받이에 걸어놓고 말했다.
“이 은촛대를 녹여서 마물들의 머리에 박아 넣는 탄환으로 쓴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아름다운 광물의 진정한 가치를 실현하는 것 아니겠소?”
“이 자리를 빛내는 데에 사용하는 것 또한 가치 있는 일이라 사료됩니다.”
파일로드 대주교 시니안 살리오든의 말이었다. 그녀는 교황의 왼편에 앉아 나무랄 데 없는 예법으로 전아한 기품을 뿜어내며 종종 재치 있게 교황의 말을 받아 대화가 끊어지지 않는 데 기여했다.
“아, 물론이오. 나는 단지 이 가치 있고 귀한 광물이 기이한 우연의 일치로 마물에게 치명적이란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오. 놈들의 목숨을 끊는 데 강철로 충분하다면 얼마나 좋겠소?”
“그러나 하필 은인 것은 불행이지만 또 금이 아닌 것은 얼마나 다행이며, 이 치명적인 독을 둥글게 펴 백성들의 주머니에 넣어줄 수 있었다니 또한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리카드의 말에 시니안이 입을 가려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옅은 갈색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귀걸이가 가볍게 짤랑거렸다.
“정말 그렇겠네요. 은화 한 줌 뿌리고 달아나면 아깝겠지마는 목숨 값으로 치자면 터무니없이 남는 장사겠어요.”
나이로드는 예상치 못한 대화의 전개에 한껏 즐거워져 우편으로 고개를 돌려 추기경 옆에 앉은 남자에게 물었다.
“정말 그러한가, 케넌? 은화가 마물을 쫓을 수 있나?”
케넌이라 불린 남자는 입 안의 것을 삼키고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더니 굵고 차분한 음성으로 답했다.
“위급한 경우라면 무엇이 무기가 되지 않겠습니까만, 은화로 마물을 해치웠단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케넌이 그답게 엄숙한 말투로 말하자 유쾌한 분위기는 사그라지는 듯했다. 케넌은 접시를 향한 시선을 유지한 채 차분히 덧붙였다.
“하지만 은촛대라면 확실히 날카롭겠군요.”
리카드가 파안대소하며 나이프 쥔 손으로 식탁을 두드렸다. 로덴치오 추기경이 헛기침을 하며 이 종잡을 수 없는 젊은이들의 대화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내비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카드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바로 그겁니다. 교황 성하, 오늘은 마물 걱정일랑 마십시오. 어느 놈이든 감히 침범커든 제가 은촛대로 배를 쑤셔 무찌르겠습니다.”
“들었는가, 케넌? 자네는 오늘 쉬도록 하게. 황제가 나를 지켜준다는데 도무지 무서울 게 뭐란 말인가?”
한 차례 가벼운 웃음이 식탁을 훑고 지나갔다. 시니안이 마침 잘되었다는 듯 기회를 포착하고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케넌을 향해 말했다.
“그 사냥꾼요, 안드로스 단장. 뤼스베르크에서 또 기이한 모험을 했다지요? 저는 다시 한 번 듣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케넌은 접시를 향해 시선을 내리깐 채 그에게로 모인 좌중의 주의와 침묵이 아니었다면 놓쳤을 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가 곧 나이로드의 재촉을 받았다.
“이 자리에 어울릴 만한 얘기는 아닙니다만······.”
“허, 이 친구 또 점잖은 척 내빼는군. 자네가 주교 머리통을 날려버린 위인이란 걸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으니 잔말 말고 계속하게.”
달아나려는 주교를 쏘아 죽이고 시민들을 규합해 마물을 상대로 농성을 벌였던 과감함으로 데트로스 교황의 눈에 들어 사냥단장이 된 케넌을, 나이로드 역시 높이 평가하여 전보다 더욱 가까이 두었다. 나이로드는 바로 그런 점에서 폐위된 전 교황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데트로스가 지지 세력을 교단의 밖에서 찾았고 그것이 그의 패인이 되었다면, 나이로드는 로덴치오와 살리오든을 위시한 자신만의 세력을 교단 안에서 구축했다. 그리고 그들은 나이로드의 파격적 행보를 뒷받침해주는 든든한 우군이 되었다.
불혹을 넘긴 케넌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하얗게 센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고는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잔베르에서 올려 보낸 보고서의 내용을 기억하는 대로 읊었다. 경관이 아귀로 변하는 대목에서 시니안이 숨을 들이켰다. 케넌의 말이 끝나자 리카드가 박수를 쳤다.
“베르자크라는 사냥꾼의 활약이 대단한 모양입니다. 제게는 더없이 불길한 이름이지만 말입니다.”
늑대를 가문의 문장으로 삼는 로베르한 황실은 고어로 늑대의 아들이라는 뜻인 반면 베르자크는 늑대를 뜻하는 베르에 사냥꾼의 자크가 합쳐져 전형적인 직업으로부터 유래한 이름인바, 늑대사냥꾼이란 뜻이었던 것이다. 리카드의 말에 나이로드는 용맹한 황실의 늑대와 간악한 늑대인간의 차이에 대해 몇 가지 첨언을 했다. 더 장황하게 이어질 수도 있었던 그의 말을 추기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끊었다. 노인의 키는 앉았을 때와 섰을 때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괜찮으시다면 이 늙은이에게 몇 마디 말을 허락해주시렵니까.”
“추기경의 말씀은 언제나 내게 기쁨이지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표정으로 나이로드가 말했다. 교황을 향해 고개를 꾸벅인 추기경은 한 차례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의 이 같은 방문은 실로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주의 가장 신실한 종으로 봉사해온 하늘의 왕국과 땅의 왕국의 두 주관자가 마주한 오늘의 일은 만세토록 보전되어 후의 귀감이 될 터입니다. 두 분 사이에 반목이 없었다면 거짓을 고하는 것이겠지요. 허나 이렇게 화합의 자리가 성사된 와중에 진실로 이해가 싹트고 이내 깃들 것을 믿습니다. 주여, 찬미 받으소서.”
그러나 지금의 자리가 마련된 데에는 황제의 측근과 교황의 측근에 모두 선이 닿는 로덴치오 추기경의 분주한 물밑작업이 주요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신(臣)이 감히 제언 드리고자 하는 바는, 존귀하신 두 분께서 일절 방해 받으심 없도록 자리를 피해드리자는 것입니다. 실상 저부터 혬(*)이 짧아 교황 성하의 심중을 이루 다 헤아리지 못하고 말끝마다 모자란 소견을 성가시게 덧붙여 헤살을 놓는바, 가장 먼저 이 방에서 나가야 할 것은 이 늙은이일 것입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추기경 예하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 자리가 있고, 또 애초에 어찌 케드가······.”
방금 자신이 이케돈 나이로드의 애칭을 공석에서 입에 담는 실수를 저질렀단 사실을 깨달은 시니안이 황급히 말을 멈췄다. 너무 가까운 거리가 그녀를 안심시켰던 탓이었다. 그러나 나이로드는 싱긋 웃을 뿐이었다. 시니안이 수습코자 말을 이었다.
“여하간 우린 이만 일어나는 게 좋겠네요.”
시니안을 시작으로,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던 추기경이 그 뒤를 따르며 밖으로 나가자 방 안에는 긴 식탁을 사이에 두고 나이로드와 리카드만이 남아 마주 보게 되었다. 나이로드는 턱에 솜털이 나있는 리카드의 얼굴을 보며 일전에 들었던 그의 나이를 다시 떠올리려 노력하다 두 달 전 황후가 아이를 낳았다는 생각에 미쳐 말문을 열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황녀의 탄생을 다시 한 번 경하 드리오, 리카드.”
“황송합니다. 황후를 꼭 닮았지요.”
* '생각, 헤아림'의 옛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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