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극1. 전초전(2)
리카드가 자신의 잔에 포도주를 채웠다. 이미 여러 잔을 비웠음에도 그에게는 취한 기색이 없었다. 잔을 들어 올리며 리카드가 말했다.
“더 미룰 수 없겠습니다. 오늘 모임의 진짜 목적을 향해 달려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교황 성하. 게헤만의 반란 세력······”
“잠깐, 우리 이렇게 합시다.”
나이로드가 리카드의 말을 끊고 말했다.
“우리에게 시간은 아껴 써도 부족한 것이란 사실에는 동의하실 테지요. 그러니 격식 차린 호칭은 옆으로 치워두고 우리끼리 있을 때만이라도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도록 합시다. 교황 성하니, 황제 폐하니 하는 표현은 물리도록 들었소.”
“제게 그토록 자비로운 특권을 허하셔도 될는지······.”
나이로드는 집어치우란 듯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그만, 그만. 됐으니 나이로드라고 부르십시오. 예의의 겉치레를 걷어치우고 알맹이만 논합시다.”
“그리 하겠습니다, 나이로드.”
나이로드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다리를 꼬았다.
“좋소, 리카드. 진즉에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내가 아니라 내 직함을 부르면 그렇잖아도 항상 되새기고 있는 의무와 책임의 중압감이 다시 한 번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오. 거기에 덧붙여 체통까지. 이것에 대해서는 리카드 당신도 그리 다르지 않을 거라 봅니다.”
“물론입니다.”
“자, 다시 본 궤도로 돌아옵시다. 여기서 제가 또 다른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논증은 일반적으로 주장과 근거가 쌍이 되어 움직입니다. 그런데 근거라는 것은 들여다보면 결국 주장에 의해 달리 해석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컨대 지난 2월, 게헤만 의회 —혁명세력은 인민의회로 부른다지요— 에서 일어난 일련의 숙청을 두고도 당신은 공화정이 태생적으로 품을 수밖에 없는 혼란이라고 명명하는 반면 나는 그것을 과도기의 홍역 내지는 기틀 다지기라고 말할 테지요. 그러니 우리, 근거는 우리가 이미 치워둔 격식과 마찬가지로 잠시 미뤄둡시다. 대신에 각자의 주장을 아주 짧은 문장 몇 개로 나타내고 그 차이를 먼저 확인해보는 기회를 갖자는 것이 나의 제안입니다.”
일단 그를 지켜보는 눈동자들이 사라지자, 나이로드는 하소, 하오, 하는 식으로 위엄 갖춘 말끝을 현저히 줄이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달변가일 뿐 아니라 열정적인 웅변가이기도 했다.
“좋습니다. 나이로드 당신부터 시작하시겠습니까?”
“그러죠. 첫째, 혼란은 종식되어야 한다. 둘째, 이미 들어선 의회를 다시 뒤엎을 수는 없다. 셋째, 전쟁은 없어야 한다. 전쟁터는 마물들이 활개 치기에 가장 좋은 곳이란 사실을 당신도 아실 테지요.”
“근거는 천천히 논하자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미안하오. 우리 이건 시행착오로 칩시다. 몇 번째까지 했었죠? 아니,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니 넘어갑시다. 지금부터의 내 주장은 앞의 주장들에 따라붙는 것들이오. 게헤만 의회는 안정되어야 한다. 무역 통제령은 철폐되어야 한다. 이 정도로 해두고 이제 당신의 주장을 들어봅시다.”
리카드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 잠시 손으로 몇 가지를 꼽아보더니 이윽고 말을 시작했다.
“나이로드 당신의 첫 번째 주장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니 시작은 동일합니다. 혼란은 종식되어야 한다. 왕정은 공화정보다 결집력이 높다. 따라서 왕정은 마물에 대항하는 데에 보다 유리한 체제이다. 이런, 저도 근거와 주장을 함께 말해버렸군요. 그러나 역시 한 번은 서로 용서하도록 합시다.”
나이로드는 싱긋 웃음으로써 동의를 표했다.
”반역의 불길은 대륙 곳곳으로 번질 것이다. 교당에 불을 지른 것도 모자라 수사들을 참수하고 수녀들을 겁탈하여 신을 욕보이고 그 이름을 더럽힌 폭도들을 처단해야 한다.”
“나는 아주 짧은 문장으로 나타내자고 제안했는데, 방금 그건 성직자를 죽인 폭도들을 처단해야 한다, 정도로 줄입시다.”
나이로드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리카드가 목소리를 높이며 열을 올렸다.
“그러나 교황 성하, 아니 나이로드, 바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당신이 분노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당신이 마물들을 상대로 불태우는 그 진노를 이 폭도들에게도 똑같이 불태워야 마땅합니다. 아니, 그 폭도들은 이미 마물입니다. 당신도 앙헬 수녀원장의 얘기를 들어보셨을 것 아닙니까? 앙헬은 누구보다도 신심 깊은···”
“그 얘기라면 이번이 꼭 여덟 번째로···”
“그렇다면 한 번 더 들으십시오. 성하께서 이 사안에 대해 아직도 충분히, 그리고 진지하게···”
나이로드가 손바닥으로 식탁을 내리치며 그의 말을 끊었다. 촛불이 흔들려 나이로드의 그림자가 춤을 추었고, 식기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며 파르르 떨었다.
“그만!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도입부까지 하나같이 똑같단 말이오? 새로운 판본이 나오거들랑 그때야 들어보리다. 그 전까지는, 내가 그 얘기를 열 번 들으면 그 열 명의 혀를 모조리 잡아 뽑겠노라고 맹세한 적이 있습니다. 홧김에 한 말이지만 제기랄, 어쨌든 맹세는 맹세요. 나는 황제의 혀를 뽑은 교황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소.”
“분노의 방향이 틀렸습니다, 나이로드. 분노의 방향이.”
리카드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힘주어 말했다. 교황의 입이 걸다는 것은 리카드도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마시오. 나는 내가 마땅히 분노해야 할 것에 분노하고 있으니까.”
“나이로드, 당신이나 나나 이 혼란을 매듭짓고 싶은 것은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더하여 제국의 안녕 역시 고민해야 합니다. 역도들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어요. 이 전염병에는 국경이 무용합니다. 공화국이라는 허깨비가 불러일으키는 기이한 열병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단 말입니다. 치세를 압제라 부르고 독실하고 경건한 것들이 광신적인 것인 양 치부되어 내팽개쳐지고 있어요.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분부를 받들지 않고 뒤집어엎을 생각에만 골몰하고 있고요. 당신이 고민해야 할 국가는 저 하늘 위의 국가인 반면에 나의 국가는 이 땅 위에 있다는 겁니다.”
“나를 하늘 위에 매달아두지 마시오. 신의 의지는 당신의 말마따나 이 땅 위에, 그리고 모든 곳에 깃들어 있고 나는 그분의 신실한 집사로서 그것들을 살핍니다. 내가 보기에 우리는 모두 제국의 안녕을 걱정하고 있소. 아니, 내 말 끊지 마시오. 내가 비록 성직에 몸담고 있다 하나 나는 살바도스 제국에서 태어나 한때는 당신의 조부께서 통치하던 시대에 자란 사람이오. 그에게 흙이 가볍기를. 요는 무엇이 제국의 안녕을 위협하느냐 하는 것에 대한 입장 차이요. 내게는 그것이 마물이오. 당신은, 당신에게는 그것이 혁명일 테지.”
여전히 구겨진 인상으로 나이로드를 노려보며, 리카드가 으르렁거리는 듯이 답했다.
“반역입니다, 나이로드. 질서의 부정입니다. 모든 온당한 것들의 온당하지 못한 것들, 나아가 부정한 것들에 의한 대체입니다.”
“뭐라 부르든 간에, 그렇게 되었다면 그렇게 되어야만 했던 것일 뿐이오. 나는 오래 전부터 게헤만 성직자들의 부정과 부패를 경고해왔소. 테레도르 왕의 우둔함과 그 왕비의 끝 간 데 없는 사치를 날선 목소리로 꾸짖어 왔소. 그러나 그들은 뉘우치는 기색조차 없었지. 아시오, 리카드? 반성하는 척도 안 했단 말입니다. 지금 감옥의 차가운 벽돌과 그 틈새로 불어오는 찬바람이 그들에게 깨우침을 가져다주기를 바랄 뿐이오.”
“운명론은 내가 불행의 당사자가 되지 않았을 때만 의미를 갖는 법입니다, 나이로드. 뢰헤에서 학살이 자행될 때, 그날 교당의 문을 두드린 것은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피를 보고 싶은 야성에 몸을 내맡긴 온갖 무지렁이, 잡배 들이었습니다. 장대에 목이 내걸린 성직자들에게 물어보십시오. 당신들이 잘못한 일이 무언지 이제는 알겠느냐고. 그렇다면 그들은 대답할 것입니다. 아, 수두에 걸렸던 날 나는 예배에 참석하기를 게을리 했나이다, 방에서 홀로 드린 예배는 셈에 넣지 않음을 내가 정녕 몰랐나이다, 하고 말입니다. 저들이 모두 죄인이라면 도무지 죄인 아닌 이가 누구란 말입니까?”
나이로드가 헛소리를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과장되게 좌우로 흔들고 말했다.
“제기랄, 내숭 떨지 마시오. 당신도 게헤만의 망할 수사 놈들이 죽은 자들에게까지 세금을 물린단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소? 다시 논점으로 돌아갑시다. 우리의 견해차를 좁힐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생각해보았는데, 그러니까 내 말은 방금 생각났다는 거요, 일단 인민의회가 안정되면 교당을 더럽힌 자들을 잡아다가 처벌하는 조사단을 꾸려 게헤만에 보내겠소. 내 직속으로 말이지. 그리고 젠장, 나는 마음에 안 들지만 테레도르 왕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든가 하여간 그 비슷한 직위를 주는 방향으로 의회를 설득해봅시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왕이라는 것도 있지 않소?”
“문제는, 나이로드, 의회가 안정되면 왕정을 지지하는 이들의 목이 이미 죄 날아간 뒤라는 겁니다. 2월 숙청에서 자산가들을 대변하는 비교적 온건한 의원들이 다 죽어나갔어요. 물론 그들도 시정잡배이자 무뢰배들이지만 그래도 말이 통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지금 왕정파가 남아 있는 것은 단지 그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의회를 그대로 두면, 두고 보십시오, 그대로 둔다면 걸리적거리는 것은 다 치워버리고 도스피앙, 그 백정이 하는 말에 따르는 얼간이 무리들, 거수기로 전락할 겁니다.”
리카드의 말에는 숨길 수 없는 경멸이 묻어났다.
“그렇다면 왕정과 다를 게 없지 않소? 백정이 왕이 되는 게 싫다는 겁니까? 그보다도 내가 알기로 도스피앙은 변호사였는데.”
“그 자의 별명이 백정입니다. 사람들 목을 쳐 날린다고 해서 인간백정이지요.”
“여하간 내가 하려던 말은, 공화정도 왕정만큼의 결집력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 아니냔 겁니다. 알고 있소. 내가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또 혁명의 위험에 대해 얘기하겠지. 그러나 게헤만의 공화혁명은, 폭정이라고 한다면 부당한 처사겠지만 나태라고 하면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오, 아무튼 바로 그런 테레도르 왕의 태만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상기시켜드리고 싶군요. 내가 아는 한 당신은 제국에서 제일가는 일꾼이오, 리카드. 그러니 일어나지 않았고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에 대해 두려워 맙시다. 그건 문지방에 발을 찧을까 두려워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이의 우매함에 비견될 만한 일이오.”
그의 치세 동안 곡물 가격이 안정되고 법무장관 데케르를 필두로 한 사법 개혁이 성과를 거둔 데다, 생트바이룬의 분리주의자들 역시 일소되었으므로 제국민들 사이에서 리카드의 인기는 높은 편이었다. 리카드는 접시 위에 놓인 푸성귀를 나이프로 괴롭히던 일을 그만두고 말했다.
“반란과 봉기의 위험을 차치하고서라도 여전히 미천한 자가 나라를 좌우하는 문제는 남습니다. 나는 평민들이 그저 우매하기만 할 뿐이라고 믿지도 않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나라를 이끌 식견이 있다고도 믿지 않습니다. 혹자는 이르기를 투표와 선출이 최악을 피하는 데에 기여하는 반면 승계는 그러한 위험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다고 합니다만 내가 볼 때 이것은 정확히 반대입니다. 군중은 지성이 뛰어난 인물도 덕성이 남다른 인물에게도 매료되지 않습니다. 다만 누구의 목소리가 가장 크고 아름답게 울리는가 하는, 다시 말해 연극배우에게나 요구될 법한 덕목을 눈에 불을 켜고 찾을 뿐이죠.”
“평민들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소. 그러나 지금 의회를 구성하고 있는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악을 쓰고 소리를 질러대기만 좋아하는 인간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거요. 그들은 대체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이들입니다.”
대화가 조금도 진전될 기색을 보이지 않자 리카드는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더니 이윽고 한숨과 함께 말했다.
“의회에 대해서는 나와 당신의 견해차가 조금도 좁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주제는 전쟁입니다. 게헤만 의회에서 주전론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아실 테지요, 나이로드?”
“주제는 더 있소. 마물이지. 내가 의회와의 전쟁보다 마물과의 전쟁에 더 무게를 싣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시오, 리카드.”
“하지만 저들이 먼저 침범한다면 맞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일단 맞서기로 했다면 거기서 그칠 것이 아니라 나아가 원인을 제거해야 할 겁니다. 이건 불가피한 수순입니다.”
나이로드는 물고 늘어질 구석을 찾았다는 듯,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똑똑한 발음으로 천천히 말했다.
“먼저 침범한다면. 그 말을 잊지 마시오, 리카드. 당신이 한 말이니 지킬 것이라 기대해도 되겠지요. 의회는 내가 설득해보리다. 그러니 그들을 구태여 자극하지 마십시오.”
리카드는 더 할 말이 남은 듯 개운하지 못한 표정이었으나 의견의 차이만을 재확인할 뿐이었으므로 이내 입을 다물었다.
*
1275년 3월 16일, 리카드 8세가 각료를 소집하여 전쟁 용병들의 고용을 논의하다.
3월 21일, 게헤만 인민의회가 교황 특사의 예방을 거절하다.
3월 27일, 황제에 의해 고용된 베소니아 용병들이 동부 국경으로 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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