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막 1장 - 닭장 속 여우(1)
4막 침윤(浸潤)(*)
다소 진부한 표현을 쓰자면, 사냥꾼의 교단에 대한 감정은 애증이라고밖에 달리 이를 방도가 없다. 그들은 교단으로부터 최고의 무기와 아낌없는 금전적 지원을 받았지만 동시에 쉴 틈 없이 최고난도의 임무를 명받는 한편 그들 앞으로는 황폐화된 정신과 닳은 육체만이 거스름돈처럼 남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최악의 경우 그들은 감염되어 다른 사냥꾼들로부터 사냥 당하기도 했다.
- 가이트 뮐러, 『사냥단의 역사 3: 반란과 내전』
현명한 사냥꾼은 사냥감을 남겨둘 줄 아는 이지. 게으르게 일하는 사냥꾼은 오래 살고, 적당히 일하는 사냥꾼은 부상을 얻어 앓다가 죽고, 열심히 일하는 사냥꾼은······ 감염되어 다른 사냥꾼에게 죽지.
- 스타샤 메이츠니르
1장 닭장 속 여우
여자는 검지로 담뱃불을 튕겼다. 서리 맞은 누런 잔디 위에서 담뱃불이 느리게 꺼져갔다. 꽁초마저 화단에 아무렇게나 던진 그녀는 고개를 까딱여 문을 지키고 선 남자들에게 빗장을 치울 것을 명했다. 근처에서 급하게 끌어와 문을 막아두었던 걸상이며 책상 따위를 치운 남자들은 마지막 남은 빗장으로 손을 옮겼다. 그들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빗장을 당기다가 이내 실수를 깨닫고 허둥지둥하며 끌러냈다. 지켜보던 여자가 고소를 머금었다.
“이제 가 봐요.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고.”
전혀 그럴 이유가 없었음에도 여자의 말에는 날이 서있었다. 그녀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붉은 머리칼을 한 갈래로 질끈 묶고는 다가서서 문을 밀었다. 문은 덜컥거렸을 뿐, 열리지 않았다. 미진한 일처리를 매섭게 추궁하는 그녀의 눈빛에 빗장을 치웠던 남자가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기셔야 하는데요.”
“아, 알았으니까 가서 일들 보시라고.”
공연히 성을 낸 여자는 이번에는 확실히 문을 당겼다. 문에 기대고 있던 시체가 하나 넘어져 그녀 쪽으로 덮쳐오자 그녀는 동요 없이 발로 밀어 치웠다. 슬쩍 살펴본 문의 안쪽에는 절망적으로 긁은 손톱자국이 가득했다. 그 자국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으므로, 여자는 또 다시 고소를 금치 못했다. 예배당에 발을 들이밀자 피와 오물의 냄새가 훅 끼쳐왔다. 서늘하고 비렸다.
“누구시오? 아, 사냥꾼!”
난장판이 된 예배당의 강대상 앞에서 비대한 몸집의 남자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다가 여자를 보고 말했다. 남자의 검은 수단은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문질러 닦은 듯 번진 피가 묻은 입가가 실패한 화장처럼 우스꽝스러웠다.
“이게 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소. 문을 닫고 나를 가두다니, 대체 왜? 이 사람들, 이 사람들은 어쩌다 이렇게 다 죽은 것인지······. 마물인 것이오, 사냥꾼? 마물이 여기에 있소?”
부서지고 엎어진 장의자마다 내장을 훤히 드러낸 채 시체들이 걸려 있었다. 여자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남자는 혼잣말로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러니 사냥꾼이 오셨겠지요. 하지만 나를 이렇게 가둔 것은 무엇 때문이오? 주여, 내가 길을 잃었나이다. 당신의 종이 흑암에 갇혀 당신 앞으로 놓인 길을 찾지 못하나이다.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여자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또 다른 시체를 발로 밀어 치우며 허리에 건 길고 휘어진 칼의 자루를 쥐었다. 칼집의, 코등이가 닿는 부분에는 용수철을 포함한 기계가 장치되어 있는바, 지금과 같이 자루를 쥐고 누르는 것은 발도를 위한 예비 동작이었다.
“야.”
흐느끼는 남자를, 여자가 불손하게 불렀다.
“집어치우고 덤벼.”
자신에게로 조금의 여과도 없이 적개심을 쏟아내는 여자를, 남자가 고개를 들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 가운데 눈알만이 숫제 튀어나오려는 듯 둥글어졌다.
“스타샤 메이츠니르! 기억났소. 그런 이름 아니었소? 이든벨 교구의 사냥꾼! 시체귀 소탕 건으로 언젠가 이곳에 왔던 적이 있었지요. 헌데 나를 향해 무기를 드는 것은 당최 무엇 때문이오?”
“그만 좀 쫑알거려, 이 미친놈아!”
참을 수 없다는 듯, 스타샤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남자는 더더욱 영문 모를 표정이 되어 잠시간 그녀의 붉은 머리를 쳐다보더니 속삭이듯 시작한 말을 점차로 키워 가 종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예배당을 흔들었다.
“······붉은 여우. 여우! 그러면 여긴 닭장이고 내가 수탉이란 말이오? 수탉! 이히히히······.”
실성한 것처럼 웃어대는 남자를 향해, 스타샤가 성큼성큼 다가섰다. 그녀는 칼자루를 잡고 돌리는 동작으로 칼을 묶어두고 있던 칼집의 고정 장치를 조작해 풀었다. 손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칼집에 마련된 손잡이를 쥔 왼손에 힘이 들어갔다. 칼은 언제라도 튀어나올 준비가 된 모양으로, 그것을 억누르고 있는 그녀의 오른손 안에서 파르르 떨었다.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며, 그녀는 오른손의 힘을 풀었다.
쉬익-
용수철의 마디마다 깃들어 있던 힘이 한순간 방출되며 빠른 속도로 칼이 튀어나갔다. 칼의 속도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그러나 동시에 멋대로 튀어나가려는 칼을 의도한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상충되는 두 목표가 그녀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스타샤는 그것을 모두 능숙하게 해냈다.
“무슌 지싀오?”
비만한 몸집이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 튀어 올라 강대상 뒤에 안착했다. 스타샤의 공격이 전혀 무효하지는 않았던 까닭에 남자는 가슴으로부터 턱을 올려치는 칼의 획에 입이 갈라져 검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는 곧 아물어, 드러난 주홍빛 속살을 덮었다.
“무슨 짓이긴, 사냥이다. 개자식아.”
용케 새는 발음을 알아들은 스타샤가 강대상을 발로 차 넘어뜨리며 다가가, 어느 틈에 납도 한 칼을, 이번에는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위로부터 아래로 내리쳤다. 새된 비명과 함께 잘려나간 남자의 팔이 땅에서 뒹굴었다. 스타샤는 칼끝으로 그것을 찍어 멀리 던져버렸다. 어깨의 절단면에서 주황색 살점이 뻗어 나와 몸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팔을 형성했다. 칼집을 가로로 잡은 스타샤는 이번에는 목을 노렸다.
“으아아아-!”
남자가 괴성을 내지르며 멀쩡한 오른팔을 휘둘렀다. 그 갑작스러운 공격은 스타샤가 칼을 뽑아드는 속도에 비견될 만했으므로, 그녀는 공격의 예비 동작을 거두고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녀가 쌓은 업보가 즉각적으로 되돌아와 그녀의 발목을 잡았으므로, 다시 말해 발로 차 넘어뜨린 강대상의 위치를 잊고 있었던 그녀는 그것에 걸려 자빠지며 바닥에서 한 바퀴 몸을 굴렀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세를 바로잡은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몸을 부풀리고 있는 남자였다. 먼저 검은 수단을 찢고, 이윽고 드러난 늘어진 살갗 역시 갈라지며 지표면을 뚫은 용암과 같은 색의 속살이 잎맥처럼 드러났다. 이 모습에 어떤 위압감도 느끼지 않은 스타샤는 다만 역겨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목을 긁어 바닥에 침을 뱉었을 뿐이었다.
*수분이 스며들어 젖음. 사상이나 분위기 따위가 사람들에게 번져 나감. 염증이나 악성 종양 따위가 번지어 인접한 조직이나 세포에 침입하는 일.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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