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막 2장 - 몰이사냥(1)
4막 침윤
2장 몰이사냥
“제가 뭐 불평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이건 사냥꾼의 품위 유지 문제와 직결되지 않나 하는 그런 생각······.”
장화 바닥에 달라붙은 오물을 연석에 긁어 떨쳐내며 이븐이 중얼거렸다. 앞서 가던 노인이 성마르게 그의 말을 끊었다. 그의 목소리가 하수도의 둥근 벽을 타고 울렸다.
“불평 좀 그만하게. 내가 자네 같은 불평꾼 하나 더 만들자고 여기까지 부른 줄 아나?”
“불평꾼이라니요. 저만큼 고분고분한 사냥꾼이 교단에 또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이븐의 말에 자신이 아는 사냥꾼들의 면면을 떠올려 본 노인은 이내 수긍한 기색이 되어 한풀 꺾인 기세로 말했다.
“아무튼 모범이 되란 말이야. 병아리가 자네 행동을 보고 배운다고.”
병아리라 불린 남자는 머쓱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노인의 밑에서 사냥꾼의 일을 배운 지 이제 석 달째에 접어든 그는 노인의 눈에는 여전히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이븐이 보기에는 그럭저럭 품이 잡혀 있었다. 이븐은 실실 웃으며 또 공연히 노인을 찔러보았다.
“그럼 웨인은 암탉쯤 되시는 모양입니다.”
“그래, 자넨 약병아리고.”
입담이 걸기로는 웨인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으므로 이븐은 대화 상대를 바꿨다.
“용병 일 하실 땐 주로 뭘 잡았습니까?”
“제일 흔한 게 시체귀였지요. 기르던 개가 감염된 경우가 그 다음이었고, 그 밖에는 이름도 모르고 잡은 놈들이 허다합니다. 마을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죄 자기네들이 갖다 붙인 이름만 튀어나와서는······. 또 언제는 큰 송아지만 한 털북숭이 마물을 고생해가며 잡아 죽인 적이 있었는데, 독을 품은 털을 쏘아대서 한동안 코주부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아무튼 그 지방 사람들한테 이름을 물어보니까 왕토끼라고 하데요.”
이븐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 가서 왕토끼 잡느라 죽을 뻔했다고 할 수도 없고, 참 곤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말해보시오, 베른트. 설마 그런 일 때문에 사냥꾼이 되려고 결심한 건 아니겠죠?”
베른트는 대답은 않고 멋쩍게 코끝을 긁을 뿐이었다. 이븐이 또 한 차례 웃었다.
“저도 스승님이나 이븐처럼 멋진 이명이 따라붙어야 할 텐데요. 병아리 같은 걸로 불릴까 봐 겁이 납니다.”
“좋은 별명이 생각나면 저한테만 귀띔 해주십시오. 퍼뜨리고 다녀 줄 테니까.”
“일단은 병아리랑 토끼 학살자만 아니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베른트의 표정이 퍽 진지했다. 사냥꾼의 이명은 대체로 동료가 붙여 주거나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굳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늑대사냥개로 불리는 이븐의 경우 후자에 해당했는데, 그로서는 스스로 깨닫기도 전에 세간에 그렇게 알려진 탓에 마음에 안 든다고 고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검독수리 웨인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사냥꾼이 되기 전부터 이미 큰 송아지 괴물을 처치해 이름 드높은 우리 수습 사냥꾼에게 어떤 이름을 붙여줘야 할까요?”
“겉멋이 먼저 드는 건 못된 버릇이야.”
웨인은 그답게 고지식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런 웨인도 새까만 보울러햇과 역시 검은 외투를 갖춰 입고 은색 스카프를 두른 신사적인 복장을 고집하는 노인이었다. 검은 지팡이칼의 손잡이를 장식한 은제 독수리에 이르러서는 그의 말을, 실속을 먼저 갖춘 다음 겉멋도 갖추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듯했다.
“수습 기간이 끝나면 은퇴하시렵니까?”
“계획은 그래. 근데 교단이 놓아주겠느냔 말이야.”
본래대로라면 이븐을 가르쳤어야 할 데릭이 수습 기간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는 바람에 이븐은 웨인의 밑에서 사냥을 배웠다. 정식으로 사냥꾼이 된 이븐은 잔베르 교구의 소속 사냥꾼으로 발령을 받아 체스바덴을 떠났으므로 웨인의 은퇴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사냥꾼이 된 지 햇수로는 팔 년, 올해 나이가 예순이 넘은 최고령의 사냥꾼은 이번에는 기필코 자신의 자리를 물려받을 제자를 키워내고 말겠다는 집념을 내비치며, 최근에는 사냥단장인 케넌에게 서신을 보내 그를 괴롭히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자꾸 은퇴를 고집하시니까 그렇지요. 마일스아이렌에 한직이라도 얻는다고 하면 케넌도 쌍수 들고 환영할 텐데요.”
“대체 날 얼마나 부려먹어야 직성이 풀리겠느냔 거야. 자네부터가 그래. 나한테 배워서 두 명분의 일을 해낼 정도가 됐으면 족히······.”
칭찬에 인색한 웨인의 입에서 칭찬 비슷한 무엇인가가 나오기 무섭게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이븐이 기분 좋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세 달 동안 주야장천 지청구만 들어온 베른트가 부러워 죽겠다는 듯,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앞서가던 웨인이 갈림길에서 멈춰 서며 말했다.
“여기서 갈라지자고. 자네가 베른트를 데리고 같이 가게.”
“제가요? 스승은 웨인 아니었습니까?”
이븐이 오기 전 이미 언질이 있었던 모양인지 정작 당사자인 베른트는 가만히 있었다. 웨인은 설명하기 귀찮다는 투로 투덜거렸다.
“다른 사냥꾼하고도 합을 맞춰 봐야 해서 그런 거니까 군소리 말게. 어떻게 된 게 한 마디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
“의심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거 웨인이 가르쳐준 겁니다.”
“까불면 주먹 날아간다. 자네한테 제일 많이 했던 말인데 그건 기억하나 모르겠군.”
“까분 기억은 많은데 맞은 기억은 없는 걸 보면 어지간히 느린 주먹이었던 모양입니다.”
웨인은 배은망덕한 놈으로 시작해서 잘못 가르쳤다는 자책으로 이어지는 한탄을 낮게 읊으며 하수도의 수로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이븐이 베른트를 보고 말했다.
“그럼 우리도 가봅시다.”
베른트는 등에 지고 있던 자신의 무기를 꺼내들었는데, 양손으로 쥐고 사용하도록 설계된 전투망치의 머리는 한쪽에는 해머를, 다른 한쪽에는 스파이크를 각각 갖추고 있어 상황에 따른 적절한 타격을 가능케 했다. 이미 용병으로서 경력을 쌓아온 베른트였으므로, 이븐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지만 수습 기간 중에 사냥꾼이 죽는 일은 비일비재했으므로 또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좀 멀다고 생각되거든 달려들지 말고 내버려 두십시오. 제가 처리할 테니. 가까이 붙는 것만 쳐내주면 저도 일이 한결 수월해집니다.”
베른트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 역시 긴장한 모양인지 전투망치를 쥔 손에 핏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아, 그리고······.”
“시야에서 벗어나지 말라고요?”
이븐이 하려던 말을 정확히 예측한 베른트를 보며, 비로소 이븐은 그가 같은 스승의 밑에서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잘 아시는군요. 갑시다.”
찰박이는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나기 시작한 것은 오 분 여를 말없이 걸은 뒤였다. 둘 모두 입은 굳게 다문 채 소리에만 집중했으므로, 전투가 목전에 있음을 동시에 깨달았다. 이븐은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앞으로 나아가 벽에 걸려있던 횃불에 램프의 불을 옮겨 붙였다.
습기로 눅눅하게 젖어 매캐한 연기를 참으며 한참을 대고 있어야 했다. 횃불에 불을 붙인 이븐이 모퉁이를 돌자 살지고 거대한 시궁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큰 놈은 몸을 세우자 무릎 높이까지 올라왔다.
베른트는 신중하게 자세를 고쳐 잡으며 이븐의 옆에 섰다. 이븐이 두 마리를 연달아 쏘아 터뜨렸다. 하수도의 벽에 튄 살점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들 앞으로 달려든 시궁쥐를, 베른트가 아래서 위로 올려치며 배를 터뜨렸다. 천장에 부딪혀 곤죽이 된 시궁쥐가 일차로 살점을, 다시 수로로 떨어지며 이차로 오물을 이븐과 베른트에게로 뿌렸다.
“제기랄, 베른트. 일이 끝나면 목욕은 내가 먼저요.”
“손님이지만 그건 양보 못 하겠습니다. 죽인 수로 정하죠. 이 대 이!”
- 작가의말
“불릴까봐”를 “불릴까 봐”로 바로잡았습니다. - 2019.07.26.4:37
“눌러 붙은”을 “달라붙은”으로 수정했습니다. - 2020.01.3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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