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막 3장 - 거울상(1)
4막 침윤
3장 거울상
스타샤가 체스바덴에 도착한 것은 웨인이 편지를 받아든 날로부터 이틀 뒤였다. 이븐이 문을 열고 들어선 응접실에는 벽난로만이 유일한 조명으로, 그 속의 불꽃에 뒤지지 않을 만큼 붉은 머리를 가진 여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븐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웨인도 곧 올 겁니다.”
“오랜만이야, 베르자크 씨. 여기 있을 줄은 몰랐는걸.”
안락의자를 웨인의 몫으로 남겨두고 등받이 없는 소파에 걸터앉은 이븐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우린 구면이지.”
벽난로 앞에 걸어둔, 비에 젖은 외투를 뒤집으며 스타샤가 말했다. 드러난 그녀의 맨팔이 물기로 번들거렸다.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이븐이 물었다.
“그게 가능한 이야깁니까?”
“잔베르에서 죽어가던 당신을 옮긴 게 나였어. 아, 물론 그땐 데릭도 있었고.”
처음 듣는 얘기였으므로, 이븐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으나 곧 고개를 꾸벅여 감사를 표했다. 그도 모르는 사이 그의 삶은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빚지고 있었다.
“사실이라면 생명의 은인이겠군요. 감사합니다.”
“뭘, 그럴 것까진 없어. 난 물린 자국을 보고 죽여야 한다고 했는데 데릭이랑, 그 밥맛없는 여자 이름이 뭐였지? 아무튼 그 여자가 살려서 데려가야 한다고 우겼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스타샤는 머리칼을 한 가닥으로 모아 물기를 쥐어짰다. 이미 몇 차례 반복한 행동인 모양이었던지 별 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때 데릭이 했던 말이 가관이었지. 여기서 이 남자를 버린다면 우리가 소모품이란 걸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라고 그러더군.”
“데릭은, 교단이 사냥꾼의 목숨을 대하는 방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요.”
살아있는 동안 이븐에게 살갑게 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는 데릭이었으므로, 이븐은 데릭이 그와 같은 말을 했다는 데에 적잖이 놀랐다. 이븐의 목숨은, 로지아의 계획 덕분에 연장된 셈이었지만 데릭의 옹호에도 일정 부분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데릭이 이 붉은 머리 여자의 주장에 동조했다면 지금의 그는 없었을 터였다.
“내 소개를 안 했네. 스타샤 메이츠니르. 이든벨 교구에 소속되어 있어.”
스타샤가 내민 손을 이븐이 마주 잡았다. 그녀의 손은, 이븐의 손 이상으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소매 없이 어깨를 그대로 드러낸 그녀의 상의는 체모를 전혀 가려주지 못했으므로, 이번에도 허공으로 시선을 두며 이븐이 답했다.
“알고 계실 테지만, 소개란 게 원래 이런 법이니까. 이븐 베르자크. 잔베르 교구 소속입니다.”
“늑대굴의 늑대사냥꾼. 당신을 보면 운명이란 게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고어를 제법 아는 모양인지 스타샤가 잔베르와 베르자크의 뜻을 풀이하며 말했다. 이븐도 고어깨나 읽었지만 그녀의 성씨는 도무지 유래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름만 놓고 보면 베소니아 출신인가 싶었으나 성은 남부식인 것 같기도, 혹은 그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는 세젠치아 섬에서 유래한 것 같기도 했다.
문이 열리고 웨인이 들어오며 이븐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웨인은 방금 잠에서 깬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말쑥한 차림이었다. 그는 흰 셔츠에 검은 조끼를 갖춰 입고 앞주머니엔 회중시계의 줄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수통도 잊지 않고 챙겨, 그는 잠을 깰 요량으로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안락의자에 앉았다.
“늦을 것 같으면 어디 근처에서 하룻밤 보내고 오란 말이야.”
“영감님, 안녕하셨어요?”
말도 말라는 듯 웨인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웨인이 내민 수통을 손을 들어 거절한 스타샤는 대신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깊게 빨아들인 담배가 빠르게 타들어가며 바닥에 재를 떨어뜨렸다.
“그래, 어떤 애송이가 제 몸 간수를 못해서 감염이 되었나?”
뿜어낸 연기가 흩어지며 스타샤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의 표정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애송이가 아니에요.”
수통을 든 웨인의 손이 멈칫했다.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루퍼트 데어도크. 감염된 건 루퍼트예요.”
“허.”
웨인이 탄식을 내뱉고 등받이에 털썩 몸을 기댔다. 안락의자가 눈치 없이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며 웨인의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흔들리는 의자를 발로 멈춰 세우고, 웨인이 물었다.
“확실한가?”
“내가 죽을 뻔했어요. 확실해요.”
웨인이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믿을 수 없군. 믿을 수가 없어.”
“감염도··· 종류가 다양하죠. 무엇에 감염되었는지 아십니까?”
둘의 대화에서 겉돌기만 하던 이븐이 스타샤를 향해 물었다. 대답하는 그녀의 표정이 묘했다.
“통제 가능한 종류냐고 묻는 거라면, 아냐. 이미 권속을 세 마리나 만들어서 수십 명을 죽였지. 패혈충을 알고 있어?”
“직접 본 적은 없고, 문헌으로만 접했습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패혈충에 감염된 마물에겐 권속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없을 텐데요.”
일단 사람의 몸에 들어가면 속을 모두 파먹고 자신의 장기로 대체한다는 이 끔찍한 마물은, 뇌를 가장 마지막에 먹어치운다는 점에서 특별히 불쾌한 마물의 반열에 올랐다. 말인즉슨, 자신의 몸이 이 작은 벌레에게 다 갉아 먹히는 와중에도 피해자는 제정신을 유지하지만, 육신의 주인은 이미 뒤바뀐 뒤여서 자신의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사람을 죽이고 그것을 양분으로 삼게 된다는 것이었다.
“루퍼트가 패혈충에 감염됐단 건 아냐. 패혈충을 부리는 군주가 루퍼트라는 거지.”
“케넌은, 케넌은 알고 있나?”
웨인이 이토록 당혹해 하는 모습을, 이븐은 처음 보았다. 그러나 당혹스러운 건 이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년 전 잔베르가 그 지경이 되었던 것도 군주급 마물이 나타난 탓이었다. 이븐이 그를 마침내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요행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완전하지 못해서, 그 늑대인간의 군주가 다른 이에게로 힘을 전이시키는 것을, 이븐은 막지 못했다.
“감염 사실을 알게 된 게 보름 전이었어요. 케넌한테도 알렸죠. 절대 혼자 쫓지 말고 근처의 사냥꾼들한테 협조를 요청하라던데요. 이쪽으로 와서 망정이지, 서쪽으로 갔으면 다모크 그 인간한테 도와 달라고 할 뻔했어요.”
다모크라면 이븐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바로 그 자신의 활약상이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면서 다모크에 견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븐은 스타샤뿐 아니라 웨인도 무엇 때문에 그 유명한 다모크를 꺼려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잘못되면 다모크라도 불러야 할 걸세. 누굴 가릴 처지가 아니야.”
“오기 전에는 웨인이 가르치고 있다던 애송이까지 데려가야 하나 생각 중이었는데, 마침 일이 이렇게 되었네요.”
스타샤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븐을 쳐다보았다. 사나운 눈매를 가진 그녀가 웃어 보이자, 이븐은 왠지 모르게 섬뜩해져 한기를 느꼈다.
“내일··· 내일 다시 이야기하세. 정리를 좀 해야겠어.”
“아뇨, 정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이건 명백한 얘기인걸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웨인을, 스타샤가 팔을 붙잡아 단호하게 막았다.
Commen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