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막 3장 - 거울상(2)
“스테이시.”
“영감님, 제가 그렇게 부르는 거 별로···”
“놓게.”
웨인이 방을 나갔다. 스타샤는 꽁초를 벽난로 속으로 던져 넣고 한 대를 더 피워 물었다. 표정이 험악했다.
“웨인이 저러는 건 처음 보는데.”
침묵이 불편해진 이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스타샤는 기침을 콜록거리며 반쯤 남은 담배를 다시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남은 담배는 벽난로가 마저 피웠다.
“죽일 놈 살릴 놈 그래도 자기 제자들은 끔찍이 아끼니까.”
스타샤가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 벅벅 긁었다. 아까 악수를 나눈 손이었다. 이븐의 표정을 보고 그녀가 덧붙였다.
“몰랐어? 저 양반 제자만 셋이야. 사 년 전인가 오 년 전에 루퍼트를 가르쳤고, 이 년 전엔 당신이었고, 지금은 또 애송이 하나 키우고 있잖아. 교단에서 평생공로상 같은 거라도 줘야 한다니까.”
“전혀 몰랐습니다.”
“실력이야 어떨지 몰라도 기본기가 튼튼하니까. 보고 배우기에는 저만한 양반도 없다는 거겠지.”
이븐은 납득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븐에게 있어서도, 사냥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에는 언제나 웨인의 목소리가 함께 했다. 더욱이, 그가 웨인으로부터 배운 것은 단순한 전투 기술만이 아니었다. 사냥에 지친 이븐의 몸이 쉽고 빠른 길을 찾으려들 때, 웨인의 올곧은 신념은 그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 몸속에 흐르며 역류처럼 작용했다.
“루퍼트는 어떻습니까? 셋이서 쫓아야 할 만큼 어려운 상댑니까?”
스타샤는 팔걸이에 기대어 두고 있던 자신의 칼을 집어 들고 칼집을 매만졌다. 이븐의 눈에는 그 모양새가 무척 이채로웠다.
“인간이었다면··· 물론, 그랬다면 싸울 이유도 없었겠지만 아무튼 나 혼자로도 충분한 상대야. 문제는 감염됐단 거지. 이건 나보다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감염된 사냥꾼이 어떤 식으로 전투에 임하는지 말이야.”
“재생력.”
이븐이 내뱉은 단어에 스타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생력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에는 끈질긴 생명력 외에도 몸을 돌보지 않는 무모한 공격이 있다는 점에서 이를 갖춘 마물을 상대하는 일을 까다롭게 만들었다. 바로 그 때문에 마물을 상대하는 데에는 전문가로서의 사냥꾼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보다도 당신, 말 좀 편하게 하지? 슬슬 불편해지려는 참이니까.”
“원한다면, 그러도록 하지.”
이븐 역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으므로 쉽게 수긍했다. 스타샤가 굽힌 팔을 휘휘 돌리며 말했다.
“그래, 이제 서로 편해졌으니까 어깨 좀 주물러 볼래?”
*
남자가 손을 가져다 대자 마물의 꿀렁거리던 목에서 팔뚝만한 주홍빛의 벌레가 기어 나왔다. 벌레를 뱉어낸 마물은, 속을 비운 가죽 포대처럼 허물만 남아 늘어졌다. 남자의 손을 타고 기어오르던 벌레는 팔을 헤집고 그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팔에서 시작된 떨림이 남자의 온몸으로 번졌다. 벌레는 그의 피를 타고 흐르며 이내 그의 몸에 녹아들었다. 남자가 짧게 한숨을 토해냈다.
“후-.”
그는 몸을 펴고 고개를 돌려 문 쪽을 쳐다봤다. 거기엔 두 사람의 형체가 서 있었다. 달갑지 않은 말투로, 남자가 말했다.
“계속 따라다닐 셈인가.”
남자가 있는 쪽을 향해 걸어오며, 키가 큰 쪽이 답했다.
“계약의 조건을 확실히 이행하시는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남자는 의자를 찾아 앉았다. 달빛이 그를 내리비추며 새하얀 금발을 드러냈다. 젊고 탄탄한 육체를 가진 미남자였다. 그러나 불편한 심정을 대변하듯 찌푸린 표정과 닳아빠진 옷은 오점으로 작용하며 그 이상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일을 어렵게 했다.
“이제 두 번째군요, 루퍼트.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실망스러운 진행 속도입니다.”
“닥쳐.”
루퍼트는 대화의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으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둘의 뒤에서 또 다른 형체가 다가왔다. 그것은 레이스가 복잡하게 장식된 고풍스러운 옷을 입은 소녀였다. 종종 걸음으로 마물의 시체에 다가간 소녀는 무릎을 굽혀 그것을 손으로 찔러 보았다.
“정말 신기해, 카일. 어쩜 이럴 수 있을까?”
카일이라 불린 남자는 소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예의 바르게 답했다.
“속이 완전히 비었습니다. 되살려 쓰지는 못할 겁니다.”
카일의 말에 소녀는 자신의 새까만 머리칼을 매만지던 손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장이 카일의 가슴높이에도 채 미치지 못했다. 카일은 다시 루퍼트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그를 추궁했다.
“이래서야 최종 해결책은 요원하기만 하군요. 사냥꾼 때문에 그러십니까?”
“이 정도로 충분해. 그놈들이 어디 있는지 말하기나 하라고.”
카일이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루퍼트. 당신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지금 몸으로는 그들 중 하나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할 겁니다. 몇 번이나 경고 드렸건만 이 일을 너무 쉽게 보시는군요.”
“대체, 얼마나!”
루퍼트가 팔을 휘둘러 주먹으로 벽을 때렸다. 건물이 울리며 석회가루가 떨어졌다.
“얼마나 더 잡아먹어야 한다는 거야!”
“처음부터 말씀 드렸습니다만 양보다는 질입니다. 당신의 고집 때문에 불필요한 희생만 늘어나고 있어요. 대체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입니까?”
카일이 손으로 건물의 안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서, 바닥에 깔린 시체들의 모습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났다. 그것은 마치 해안의 바위에 다닥다닥 붙은 벌레들의 등껍질 같았다.
“탁월한 신체 능력, 강인한 골격, 그리고 누적된 경험에 이르기까지. 사냥꾼만 한······”
“그만!”
루퍼트가 고함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가 벽에 부딪히며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그는 분노를 삭이며 낮게 깐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얘긴 이미 끝났어.”
“아뇨, 루퍼트. 당신은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말한 카일이 이번에는 소녀를 향해 말했다.
“아가씨, 우리 신사님께 고민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조금 덜어드리는 게 어떨까요?”
“가만있어, 아저씨. 안 아프게 해줄게.”
조그맣고 예쁘장한 얼굴에 천진한 미소를 담은 채, 소녀가 루퍼트를 향해 다가갔다. 루퍼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휘둘러 자신에게로 접근하는 소녀를 밀쳤다.
“저리 꺼져, 이 더러운 마물아!”
소녀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지켜보던 카일의 단안경에 이채가 서렸다.
“잡아, 카일!”
바닥을 짚고 일어난 소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작은 몸이 분노에 휩싸여 바르르 떨렸다. 카일은 단단히 여미고 있던 웃옷의 앞섶을 풀어헤치고 남자를 향해 섰다. 돌연 그의 몸에서 수 개의 새까만 팔이 튀어나와 루퍼트의 사지를 붙잡았다.
“나는 안 아프게 하려고 했어. 근데 아저씨가, 아저씨가 잘못한 거야. 소피는 나쁜 아이가 아냐. 나쁜 건 아저씨야.”
들어 올린 소녀의 손끝이 날카로워졌다. 소녀는 자신의 흑발을 다른 손에 움켜쥐고 날카로운 손가락으로 머리칼의 끝을 잘라냈다. 움켜쥔 소녀의 손 안에서 그것은 몸을 부풀려 새까만 거머리들로 화했다. 루퍼트가 카일의 마수(魔手)에 결박된 채 몸을 뒤틀었다.
“카일로파드, 이 개자식······!”
거머리를 움켜 쥔 소녀의 손이 루퍼트의 얼굴에 가 닿았다. 고개를 돌리려던 그의 노력도 헛되이, 거머리들은 온 얼굴을 뒤덮으며 구멍이란 구멍은 모조리 찾아 기어들어가 그의 몸에 섞여 들었다. 그가 내지른 포효가, 거머리가 목구멍에마저 기어들어가며 익사자의 유언과 같이 뒤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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