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막 4장 - 전야제(1)
4막 침윤
4장 전야제
“시신은 모두 옮겼습니다만, 저건 시(市)로 가져가기엔 위험해 보여서 일단 간단한 조치만 취해뒀습니다.”
“잘했군.”
헥터 경위의 말에 웨인이 간단히 대꾸했다. 경위가 가리킨 것은 비어버린 육신의 껍질이었다. 은으로 된 말뚝이 사지에 박혀 그것은 마치 동물을 해부해 놓은 것처럼 보였다.
“아, 이분은 안드레아 구마사제님이십니다.”
진회색 수단을 입은 중년 여성 쪽으로 웨인이 시선을 돌리자 경위가 얼른 그녀를 소개했다. 웨인이 보울러햇을 벗어 가슴에 얹고 마주 인사했다.
“웨인이오.”
“예,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내잠충이나 그 비슷한 마물인 것 같은데, 어떻게, 짐작 가시는 바가 있습니까?”
안드레아의 허리에는 녹색의 파시아가 둘러져 있었다. 건장한 체격과 짧게 잘라 뒤에서 묶은 머리 때문에 앞에서만 보면 남자로 착각할 만했다. 보울러햇을 다시 눌러쓴 웨인이 온통 피로 칠해진 바닥과 회벽을 둘러보며 침통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쫓고 있는··· 마물의 소행이오.”
“그렇다면 더 빨리 쫓으셔야겠습니다.”
스타샤가 시신의 옆에서 그 소릴 듣고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웨인이 안드레아의 눈을 직시했다. 그의 청회색 눈동자에 헤아리기 어려운 복잡한 심정이 담겼다. 쏘아본 이에게 저주를 내린다는, 맹금류를 닮은 흉안(凶眼)이었다.
“그 말은, 응원으로 생각하리다.”
“아뇨, 재촉입니다, 사냥꾼.”
칼집의 끝으로 바닥을 내리찍는 소리가 안드레아의 말을 삼켰다.
“진짜 못 들어주겠네.”
스타샤가 큰 걸음으로 웨인과 안드레아가 있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좀 전까지 스타샤로부터 시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던 이븐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뭔데 우릴 재촉해. 당신이 사냥단장이야? 당신이 뭐 교황이라도 되냐고.”
안드레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난 구마사제입니다. 주께서 내려주신 사명으로 선량한 이들을 마수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들의 영혼을 지키지요. 이 수도사들이 때 아닌 죽음을 맞았을 때 가장 애통해하는 것 역시 구마사제로서의 내 일이고요.”
“나는 이 개자식을 거의 한 달 동안 쫓았어, 알아? 그 동안 권속을 세 마리나 잡아 죽였고. 당신같이 팔자 좋은 인간들은 늘 우리가 해낸 것보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떠들어대길 좋아하지. 왜? 그건 언제나 남는 장사니까. 이십 년 전만 해도 악령을 쫓는답시고 불쌍한 인간들 두들겨 패기나 하던 게 당신들, 구마사제 아니었나? 사냥꾼들 후광 빌려다가 장사해먹을 거면 낯짝이라도 공손해야지.”
삿대질하며 적의를 쏟아내던 스타샤가 시신을 가리켜 보였다.
“내잠충 같은 소리하네. 시체를 살펴보기나 한 거야? 그리고 그 내잠충도 우리 사냥꾼들이 붙인 이름인 건 알고나 있냐고.”
마지막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이븐이 차분한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항마연구원에서 붙인 이름이지.”
스타샤가 고개를 홱 돌려 이븐을 쏘아보자 그가 덧붙였다.
“연구원이 사냥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교황청 산하의, 독립된 기관이니까.”
“넌 좀···”
“이보시오, 안드레아 신부. 여기 이 사냥꾼의 말이 심했다면 내 사과하리다. 하지만 최선의 노력이라는 것도 결국 인력의 연장선상에 있는 탓에 언제나 최선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오. 감독관을 자처할 양이 아니라면 책망은 접어두시오. 우리는 우리의 양심과 책임감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도 바쁜 사람들이니.”
웨인의 음성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븐은 그것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킨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급속히 냉각되어 가는 분위기를 의식한 것인지 헥터 경위가 얼른 끼어들어 화제를 돌렸다.
“목격자들··· 은 없지만, 그래도 도움이 될 만한 증언들을 제가 전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그렇지, 우리 경관들이 말을 타고 이동한 흔적도 찾아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지금 보여드리겠습니다.”
웨인이 말없이 경위의 뒤를 따랐다. 스타샤의 독설로 얼굴이 벌게진 안드레아가 콧김을 뿜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교단이 뭣 때문에 당신들에게 그렇게 막대한 지원을 하는지 아시란 말입니다! 사냥꾼들이 마물을 잡아 죽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건 사실이지요. 하지만 감염되면 그 공이라는 것도 말짱 뒤집어엎는 게 당신들 사냥꾼 아닙니까?”
“웨인!”
이븐이 놀라서 소리쳤다. 스타샤마저 아연실색한 표정이었다. 뽑아든 칼끝을 안드레아의 목에 겨눈 채, 웨인이 나직이 경고했다.
“말을 삼가시오, 신부. 검만이 예의를 상기시켜준다면 내 마땅히 그리하리다.”
“이 따위 뻔한 협박을······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당신을 상대로 대화를 시도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뿐이오.”
웨인이 거둔 칼을 칼집에 밀어 넣었다. 칼이 닿았던 안드레아의 목에 핏방울이 맺혔다.
*
“그 작자가 뭘 알고 한 말일까?”
스타샤의 말에 이븐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웨인은 일찌감치 식사를 끝내고 술도 마다하고 숙소로 들어간 참이었다.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가도 수틀리면 불같이 화를 내는 그녀였으므로, 이븐은 스타샤와의 대화에 익숙해지는 데 애를 먹었다. 특히 중재자로서의 웨인이 없을 때는 더 그랬다. 이븐이 쳐다보기만 할 뿐 대답은 않자, 스타샤가 답답해져서 부연했다.
“감염된 사냥꾼 어쩌고 한 거 말이야.”
“그런 눈치는 아니던데.”
“확실한 거지?”
스타샤의 비위에 맞춰줄 수도 있었지만, 이븐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 대답했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 서신이 오고가는 중에 말이 샜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신부도 막연하게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웨인을 떠본 걸 수도 있지.”
“알려져서 좋을 게 하나도 없어. 그건 이해하지?”
“정치야 내 전문 분야가 아니지만, 일이 더 커져서 사람들이 알게 되면 우리 행동이 은폐로 비치지 않을까 모르겠네.”
“그러니까 그 전에 우리가 잡아야지.”
스타샤가 허공에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가상의 목을 으스러뜨렸다. 지켜보고 있던 이븐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스타샤가 눈을 흘겼다.
“뭐야, 왜 웃어?”
이븐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어보였다. 항상 심사가 뒤틀려 있는 그녀였지만 말과 행동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단순한 구석이 있었다. 덕분에 이븐은 얼굴도 모르는 동료이자 자신의 사형(師兄)이기도 한 사냥꾼을 죽이러 가는 동안에도 유쾌한 기분일 수 있었다. 불충분한 대답에 대한 응보로 정강이를 걷어차고자 식탁 아래서 움직이는 스타샤의 발을, 이븐이 두 다리 사이에 끼워 막았다.
“그보다도 루퍼트란 자에 대해서 더 얘기해주는 건 어때? 활을 쓴다고 했나?”
잘도 그런 구식 무기를 사용한다고, 총을 사용하는 사냥꾼으로서 이븐은 생각했다. 문제는 급조된 사냥조(組) 구성이 원거리 무기를 든 상대를 대적하는 데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스타샤와 웨인은 모두 칼을 무기로 사용했고 이븐이 아는 한, 비도(飛刀)와 같은 원거리 대응책을 익히지 않았다. 그나마 대응이 가능한 이븐의 권총도 실상 마물에게 유효한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유효 사거리로 알려진 거리보다 더 가까이 접근해야만 했다.
“교단에서 만들어준 활을 쓰는데, 양끝에 무슨 도르래 같은 걸 달아서 시위를 당기는 속도가 엄청 빠르다고. 활이라고 방심했다간 속사 맞고 골로 가는 거지. 네가 들고 다니는 권총 약실 돌아가는 속도랑 맞먹을걸.”
“공방의 창의성과 숙련된 사냥꾼의 실력이 우리에겐 재앙이군. 근접전에 대해서는 좀 희망적인 소식이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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