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막 4장 - 전야제(2)
스타샤는 양손의 검지로 팔뚝 정도의 길이를 표시해보였다.
“이만한 길이의 사냥칼을 쓰지. 얕볼 수준은 아니지만, 웨인도 있고 나도 있으니 걱정할 건 없지. 문제는 어떻게 접근하느냔 거야.”
“화살촉은 은일 테고.”
스타샤가 잔을 비우고 담배를 꺼냈다. 은으로 만들어진 무기를 지녔다면 이븐도 재생력을 믿고 무턱대고 접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머릿속으로는 이런저런 가능성들을 계산해보았다.
“우리가 먼저 찾아내서 접근하는 수밖에 없겠군.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는 그 사냥꾼이 정한 장소에서 싸우는 것이니까.”
스타샤 역시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추적은 빠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았다. 가는 곳마다 그들이 쫓고 있는 사냥꾼은 애써 감출 필요를 느끼지 못한 듯, 흔적을 남겼고 그 흔적을 따라가면 으레 새로운 사건 현장이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이븐은 문득 이대로라면 영원히 쫓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대화가 끊어진 둘 사이로, 마치 지금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한 남자가 와서 앉았다. 스타샤와 표정을 교환한 이븐은, 그녀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남자를 모른단 사실을 파악했다. 이븐은 오른팔을 식탁 아래로 내려 언제든 총을 뽑아들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남자는 느긋하게 기다란 다리를 포개어 꼰 채, 단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닦았다.
“데어도크 씨를 쫓고 계시는 분들이시죠. 저는 카일이라고 합니다.”
“교단 소속이십니까?”
이븐이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카일의 예스러운 복장과 가시넝쿨이 수놓아진 영대(領帶)를 보고 지레 짐작했다. 단안경을 다시 안와에 끼운 카일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권총의 손잡이를 잡은 이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릴 더 적절한 날이 후에 있을 겁니다. 지금은 데어도크 씨에 대한 얘기를 해보도록 하죠.”
“나는 누군지 모르는 자식이랑은 얘기 안 해.”
스타샤의 말이었다. 그녀 역시 언제든 뽑아들 수 있도록 왼손으로 칼집을 쥐고 있었다. 담뱃불을 눌러 끈 오른손은, 이윽고 칼의 손잡이에 얹어졌다.
“그렇다면 제가 드리는 말씀을 듣기만 하시면 되겠군요. 저는 루퍼트 데어도크 씨를 돕고 있는···”
“개수작 부리지 말고 네가 누군지나 말해.”
스타샤가 빠르게 뽑아든 칼로 카일의 턱을 받쳐 들었다. 여관의 사람들이 스타샤를 쳐다보자 그녀가 위협적으로 말했다.
“신경들 끄셔.”
카일의 오른팔이 움직이는 것을 감지한 이븐은 얼른 몸을 일으켜 세우며 허리 뒤에서 사냥칼을 꺼내 내리찍었다. 카일의 헐렁한 소매가 칼에 뚫리며 식탁과 고정되었다. 이븐은 사냥칼의 손잡이를 여전히 쥔 채로 말했다.
“목에 칼이 겨누어져 있는 상황이면, 몸가짐을 좀 더 조심스럽게 해야지 않겠나.”
카일은 오른손을 다시 식탁 위로 내려놓았다.
치익-
내려놓은 오른팔이 사냥칼에 닿는 순간 난 소리를 이븐과 스타샤가 놓칠 리가 없었다. 그건 은이 부정한 마물의 살을 태우는 소리였던 것이다. 빠르게 눈빛을 교환한 이븐과 스타샤는, 위협을 거두고 진짜 공격에 나섰다. 이븐은 권총을 뽑아들었고, 스타샤는 납도 한 칼을 눌러, 예의 발도를 준비했다.
방아쇠에 걸린 이븐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칼 손잡이를 누르고 있던 스타샤의 손에 힘이 빠지는 건 동시였다. 그리고 벌어진 카일의 웃옷 틈에서 새까만 팔들이 튀어나와 이븐의 손목을 붙잡고 스타샤가 내지른 칼날을 막아낸 것도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븐은 붙잡힌 오른손에서 권총을 떨어뜨려 왼손으로 받아내고 연달아 방아쇠를 당겼다. 네 발 모두 명중이었다. 스타샤가 카일의 힘이 빠진 틈을 타 칼날을 당겨 다시 칼집에 밀어 넣었다. 총격으로 굽은 허리를 다시 똑바로 펴며 카일이 말했다.
“무례하시군요.”
이븐이 쏘아 맞힌 카일의 배에서 네 개의 팔이 더 튀어나왔다. 주먹을 쥐고 있던 그 팔들은, 이윽고 주먹을 펴 잡아낸 탄환 네 개를 식탁 위에에 떨어뜨렸다. 탄환은 다시 써도 될 만큼 찌그러진 데 없이 멀쩡했다. 여전히 이븐의 오른팔을 붙잡고 있던 마수(魔手)에 돌연 힘이 들어간 것은 그때였다.
이븐은 불시에 찾아온 고통에 놀라 황급히 팔을 빼려 했으나 카일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그의 손목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마수의 손아귀 안에서 이븐의 손목뼈가 으스러졌다.
이븐의 손목을 잡은 마수를 끊을 기세로 스타샤가 휘두른 칼은, 카일의 다른 마수에 막혔다. 그러나 스타샤의 공격도 그녀 나름대로의 계산을 담은 모양인지, 막은 마수가 잘려나가며 허공에서 새까만 손이 빙글 돌았다. 속도를 잃은 칼이 두 번째 마수에 잡히려는 차에 스타샤는 재빨리 칼을 거두었다.
그 모든 동작이 이븐의 눈으로도 겨우 쫓을 만큼 빠르게 이루어졌다. 카일의 마수가 마침내 이븐의 손목을 놓아주며 그를 밀쳐냈다. 약간 휘청거린 이븐은 자세를 다잡고 스타샤와 마찬가지로 한껏 경계하며 잠시 물러섰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제 소개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주사위의 세 번째 눈, 카일로파드 자작(子爵)입니다.”
“주사위···?”
부러진 뼈가 어긋나지 않도록 오른손목을 왼손으로 바로잡으며, 이븐이 말했다. 카일의 소개는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러나 스타샤는 그 의미를 이해한 듯, 본격적인 싸움을 예감한 것인지 외투를 벗어던지고 어깨의 가죽끈을 조였다. 카일의 뒤로, 이븐의 총소리를 듣고 내려온 웨인이 칼을 겨누고 섰다.
“루퍼트를 감염시킨 게 네놈인가?”
세 명의 사냥꾼에 둘러싸였으나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카일은 내뻗은 마수들을 거둬들였다. 마수의 예리한 손끝이 상의 속으로 들어가며 옷깃을 여몄다. 그는 넘어진 의자를 바로 세우고 다시 그 위에 앉았다.
“감염이 적절한 표현일지 모르겠습니다. 낭비되고 있던 힘을, 그것을 알맞은 곳에 쓸 수 있는 이에게 전해주었으니 활용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베르자크 씨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셨을 테죠.”
이븐은 경계하던 자세를 풀고, 역시 넘어진 의자를 세워 마주 앉았다. 그는 식탁에 꽂혀 있던 사냥칼을 뽑아들어 다시 허리에 걸었다.
“주사위가 어떻고 자작이 어떻고 하는 얘기는, 나중에 따로 듣기로 하고, 그 활용이란 것에 대해 더 듣고 싶은데. 내가 제대로 추측한 거라면, 이 활용은 죄 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필요로 하는, 다분히 인신공양적인 성격을 띠는 것 같던데. 어때, 내 말이 맞나?”
“인신공양이라,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희생의 덕으로 데어도크 씨가 더욱 강해진다는 겁니다.”
“살 찌워서 잡아먹을 심산이 아니라면, 루퍼트가 강해지는 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지?”
카일은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마물들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요? 그리고 왜 그것들은 당최 줄어들지를 않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네놈이 자살하면 진지하게 고민해 보도록 하지.”
스타샤가 여전히 칼의 손잡이를 쥔 채로 신랄하게 말하자 이븐이 약간 억울해져서 말했다.
“스타샤, 내 입장도 좀······.”
“마물의 주둥이에서 이 따위 소리를 듣는 날이 오다니 나도 어지간히 오래 산 모양이야.”
웨인이 했다면 더 적절했을 말은, 스타샤의 입에서 나왔다. 즉,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봐, 마물 양반. 자작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나에 대해서도 알고, 루퍼트의 일에도 관여한 건 알겠어. 그런데 도무지 뜬구름 잡는 얘기뿐이로군. 우리가 여기서 당신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나? 없다면 전투를 다시 시작하지.”
“아, 베르자크. 서두르지 마십시오. 내가 죽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면 당신들은 날 죽일 수 없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인내의 미덕을 그다지 중히 여기지 않는단 사실은 알았으니 오늘의 대화는 제가 짧은 몇 마디를 더 얹는 것으로 끝맺도록 하지요. 첫째, 데어도크 씨는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소를 적어둔 쪽지를 여기 건네 드리도록 하지요.”
카일이 조끼의 앞주머니에서 꺼내 식탁 위에 내려놓은 쪽지를, 이븐이 손 안으로 가져와 슬쩍 읽었다. 테네그림 숲. 이곳에서 멀지 않았다.
“둘째, 우리가 데어도크 씨에게 힘을 드린 대가로 데어도크 씨는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적은 결코 여러분 사냥꾼들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최종 해결책. 내가 아는 한 그런 이름이 붙은 일치고 제정신인 일이 없던데.”
여전히 그 내용을 말하지 않는 카일을 향해, 이븐이 좀 전에 들었던 정보를 다시 읊었다. 카일은 또 한 차례 빙긋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냥꾼 여러분, 다시 만날 기회가 있겠지요.”
그는 자신을 소개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해보이고는 여관의 문을 향했다. 스타샤가 공격 자세를 취하자 웨인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문이 닫히고 카일이 사라지자 스타샤가 얼른 항의했다.
“죽였어야죠!”
“그런 게 가능할지도 의문이지만, 가능하더라도 여기서는 아니야.”
웨인은 침착히 답하며, 카일이 앉았던 의자에 앉아 이븐이 건네준 쪽지를 살폈다.
“그래도 숲이면 우리한테 유리한 거 아닙니까?”
나무들이 화살을 막아줄 것으로 생각하며, 순진하게 묻는 이븐에게, 루퍼트의 전투 방식을 소상히 알고 있는 웨인이 핀잔을 주었다.
“내 보기에 자넨 이미 송장 같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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