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막 1장 - 전장으로부터의 초대(1)
5막 비주(比周)(*)
사냥꾼이 정치적인 목적을 꾀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기실 13세기 중반 사냥꾼의 등장과 거의 동시에 그들은 그들 자신이 점하고 있는 특수한 위치; 교단의 대민 지원 방책이자 권위의 정당화 수단이라는 역할 때문에 교황청을 하나의 구심점으로 삼아 대륙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역학의 주요 행위자가 되어 왔던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이들 사냥꾼의 직업적 특성으로부터 얻어지는 특수한 기질이 정치적 목적의 실현 과정에서도 발현되는바, 극도의 효율을 추구하고 때로는 비인도적 수단을 획책함에 있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는 것이다.
- 외젠 파브네스, 『이면의 전쟁』
사냥 수칙 둘. 누구에게도 뒤를 맡기지 말 것.
- 웨인 헬라이드
1장 전장으로부터의 초대
“그걸로 피를 걸러내는 거야?”
“걸러낸다기보다는 약품 처리를 해서 다시 주입하는 거예요. 주요한 감염인자는 대체로 혈액 속에 있기 때문에 증식과 분열을 억제하는 화학 물질을 혈관에 투여하는 거죠. 감염이 진행됨에 따라 몸의 자가 면역 체계는 무너지고······.”
스타샤는 그만두라는 뜻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진료실에 누군가 참관하기는 오랜만이었던 터라 들뜬 로지아는 못내 아쉬운 표정이 되었다.
“이런 걸 다른 사람한테는 못 해? 내 말은 이게 그 특수한 대상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스타샤가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고 애를 먹고 있자 로지아가 얼른 말을 이어받았다.
“상용화는 어려울 거예요. 제가 꾸준히 연구하고 있는 것도 감염을 억제하는 방법이지만 아직까지는 성공 사례가 이븐밖에 없고, 사실 이븐의 몸도 다 알지는 못하거든요.”
“성공이라기보단, 실패를 조금씩 뒤로 미루는 거지.”
왼손으로 눈과 이마를 덮은 채, 이븐이 말했다. 나흘 전, 잔베르에 도착한 날에도 이븐은 동일한 진료를 받았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물질의 함량이 더욱 늘어난 듯, 약이 여느 때보다 독했다.
“매 순간 작은 승리를 거두는 거죠. 커다란 승리는 그런 식으로 오는걸요.”
로지아의 낙관적인 견해에 또 다시 비극의 그림자를 드리우려다, 이븐은 그만두기로 했다. 이븐이 다시 침묵으로 돌아가자 로지아와 스타샤가 대화를 재개했다.
“데어도크 씨 일은 유감이에요. 장례는 어떻게 치르기로 했나요?”
“웨인이 알아서 하기로 했어. 어차피 알고 지내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만한 일도 아니니까. 별일 없으면 체스바덴에 묻히겠지.”
체스바덴은 사냥꾼으로서의 루퍼트가 태어난 곳일 뿐 아니라 동시에 그의 고향이기도 했다. 부펜하르크 지역에서만 죽인 사람의 수가 기십 명에 이르는 탓에 시끄러운 일을 피하고자 그의 시신은 체스바덴에 묻는 것으로 잠정적인 합의를 보았던 터였다.
“메이츠니르 씨는 안 가보시게요?”
“뭐, 장례식? 그런 델 가서 뭐 하겠어. 난 케넌한테 보고할 것도 있고··· 아, 그렇지, 참.”
그제야 진료실까지 이븐을 찾아온 이유를 떠올려낸 스타샤가 말을 이었다.
“케넌이 왔어. 응접실에서 기다리는 중이야.”
“직접?”
루퍼트의 죽음과 그를 둘러싼 여러 정황들을 적은 서신을 마일스아이렌에 있는 케넌에게 보낸 것이 엿새 전이었으므로 지금 즈음해서 도착한 것은 예상한 수순이었다. 다만 다른 누군가를 시킨 것이 아니라 마일스아이렌에 있는 그의 자리를 비우고 잔베르까지 직접 왔다는 사실이 이븐을 놀라게 했다. 이븐의 표정을 본 로지아가 묻지도 않은 말에 단호하게 답했다.
“단장님이라도 어쩔 수 없어요. 아니, 교황님이 오셔도 이건 빨리 못 끝내요.”
*
“이븐.”
고개를 꾸벅여 인사하는 이븐에게로, 백발의 남자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남자는 그 뒤를 따라 들어온 스타샤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스타샤.”
호명하는 것으로 인사를 갈음하는 것은 이 말수 적은 사냥꾼의 버릇이었다. 이븐은 이렇게 이름을 불림으로써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 받는 느낌이라 기분이 묘했다.
“오랜만입니다, 케넌.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침묵으로 더 많은 말을 하는 케넌이 늘 그렇듯, 그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고개만 살짝 끄덕여 보였다. 무릎 높이의 탁자 위에는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븐은 자리에 앉으며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랐다. 다시 끓인 듯, 김이 피어올랐다.
“마일스아이렌은 한가한 모양이에요. 단장님이 자리를 다 비우시고.”
스타샤가 이븐과 마주해 앉으며 말했다. 말을 끝낸 그녀의 입에는 당연하게도 곧 담배가 한 대 물렸다.
“한가하지는 않네. 국경에서 황제 폐하의 용병들과 의회의 군대 사이에 무력 충돌이 있었어.”
케넌이 너무 차분하게 말한 탓에 이븐과 스타샤는 잠시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되짚어보느라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이븐이 음울하게 말했다.
“결국 전쟁이 시작될 모양이죠.”
이번에도 역시 케넌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병사로서 종군 경험이 있는 이븐은, 전쟁이 단순히 병사들 사이에서 죽고 죽이는 정도로 그치지 않는단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은 종양과 같아서 서서히, 그리고 완전히 그것이 벌어지는 일대의 모습을 바꿔 놓는다.
전쟁이 인류사가 도약할 기회를 마련한다는 뢰펭겐의 주장은 절반만 옳았다. 도약은 발판을 필요로 하고 그 발판의 역할은 대체로 그 시대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인 이들이 수행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술하지 않았으므로.
“아니, 교황이 그걸······.”
스타샤는 교황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고 있는 사람 중 하나가 케넌이라는 사실을 곧 떠올리고 얼른 말을 고쳤다. 케넌은 스타샤가 예의를 갖추는 몇 안 되는 상대였던 것이다.
“교황 성하께서 그걸 내버려 두셨어요?”
“의회가 교황 성하께서 보내신 특사의 예방을 거절했네. 지금으로선 손쓸 방도가 없어.”
게헤만과의 전쟁, 그것도 특히 동부 국경에서의 전쟁이라면 그웬돌라드 지역의 사냥꾼인 이븐에게는 넘겨들을 수 없는 문제였다. 바로 그 동부 국경이라는 것이 그웬돌라드 지역과 게헤만 공화국이 맞닿은 경계를 일컫는 때문이었다.
“이건 이따 마저 얘기하도록 하세. 지금은 데어도크에 관해 얘기하도록 하지.”
케넌은 웃옷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코에 걸쳤다. 그는 탁자에 놓아두었던 서류를 손에 들고 유심히 살폈다. 웨인이 장례 절차와 시신 운반의 문제로 일찌감치 체스바덴으로 출발해버린 탓에 이븐과 스타샤가 둘이서 머리를 쥐어 짜내며 썼던 서신이었다.
“노블 다이스에 대해서는, 이제 이븐도 알겠군.”
“감췄던 겁니까?”
이븐의 말에 불만의 기색이 담겨 있음을 눈치 챘음에도, 케넌은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만 저어 보였다. 풀이하자면 귀족의 주사위, 웨인과 스타샤의 설명에 따르자면 군주급 마물이 하나나 둘도 아니고 여섯씩이나 모인 집단이라는 것이었다.
공작, 후작 하는 식으로 오등작이 있고, 거기에 소공녀 하나를 더해 각각 주사위의 여섯 눈을 상징으로 삼는 이 마물의 군주들은 사냥꾼 최후의 적이라는 이명에 걸맞게 사냥꾼이 점차로 더 높은 단계의 마물을 사냥해감에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마주치게 되는 모든 악의 원흉이었던 것이다.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지만, 교단 입장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마물들을 뒤에서 지휘하는 군주들이 있다는 사실이 멍청한 인간들한테도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냐고.”
스타샤가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에 담뱃재를 털며 말했다. 사냥단의 비밀주의적 성향은 그 내부의 구성원에 대해서도 차별 없이 적용되는 모양이라, 애써 캐묻지 않으면 구태여 알려주지 않는다는 태도는 스타샤를 포함한 대부분의 고참 사냥꾼들이 견지하는 것이었다.
*다른 속셈이 있어 참되지 못한 일로 한패를 이루는 것(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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