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막 2장 - 전쟁터의 장의사들(1)
5막 비주
2장 전쟁터의 장의사들
“케넌이 걱정이 많은 모양이지.”
입에 굵직한 엽궐련을 문 채로, 남자가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마르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챙이 넓은 중절모를 쓰고 있어 인상이 흐릿했다. 다만 코로부터 이어져 내려와 입을 감싸는 두 줄기 검은 수염은 쉽게 잊힐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븐은 정식적으로 서로를 소개하기는 처음이지만 언젠가 두어 번 마주친 적이 있음을 알았다.
“생트바이룬에서의 일도 있었으니까 사전에 철저히 대비하자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 그가 짐작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 때문에 마르셀의 심경은 불편해 보였으므로, 이븐은 공손히 답했다. 이븐의 예상과는 달리 베소니아 용병들은 막사가 아니라 마을에 주둔하고 있었다. 덕분에 숙식은 역시 그가 예상한 것보다 더 쾌적하게 제공될 터였고 이런 식의 전쟁이라면 한 번 더 치를 용의가 있다고, 이븐은 생각했다.
“그때 자네는 사냥꾼이 아니었을 텐데.”
“병사였습니다.”
엽궐련을 손에 옮겨 쥔 마르셀이 탁자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들이 불빛을 받아 빛났다. 하나같이 굵직한 금반지들이었다.
“고생 많았겠군. 여기서는 별로 할 일이 없을 거야. 시체도 거지반 정리가 끝났어. 시체귀 정도면 용병들이 알아서 처리를 하는 모양이더군.”
“제가 오기 전에 한 차례 싸움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벌써 정리가 되었다면 그렇게 큰 규모는 아니었던 모양이죠.”
마르셀이 모자를 벗어 머리를 한 차례 뒤로 쓸어 넘겼다. 기름 바른 머리가 새까맣게 번들거렸다. 드러난 얼굴은 케넌과 비슷한 연배이거나 그보다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였다.
“용병 측에서 죽은 이가 여남은 명이고, 게헤만 쪽 사상자는 스물 남짓이라더군. 우리도 도착한 뒤에 지휘관한테서 전해들은 거야. 용병들이 자기네들 시신은 다 수습을 해놔서 일이 줄었지.”
“어쩌다가 전투까지 벌어졌답니까? 게헤만 의회가 군사를 보낸 건 무력시위를 통한 통제령 철폐가 목적이라고 들었는데요.”
이븐이 넌지시 던진 말에 마르셀의 미간이 좁아지며 굵은 눈썹이 맞닿았다.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잊어버려. 사냥꾼은 사냥만 한다. 그 이상으로 뭘 하려거든 사냥단을 나가서 해.”
“그래도 우리가 어떤 상황에 던져져 있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케넌이 그에게 내린 또 다른 명령을 의식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븐은, 오히려 사냥꾼이기 때문에 항상 넓은 시야를 확보해둘 필요가 있다고 믿는 부류였다. 그는 자신의 의식에 스스로 말의 눈가리개 같은 것을 채워두고 싶지 않았다. 마르셀이 엽궐련을 깊게 빨아들인 뒤 연기와 함께 말했다.
“난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믿지 않아.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 상황이라는 걸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제 나름의 결론을 이미 내린 이들이거든. 그러면서 순진한 얼굴로 묻는 거지.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떤 것 같나요? 우리는 뭘 해야 할까요? 답은 이미 자기 손에 쥐고 있으면서 말이야. 어때,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면 스스로가 시대에 발 맞춰 나아가는 교양인같이 느껴지나? 자네가 준비한 답은 뭐지, 베르자크?”
이븐은 마르셀의 날선 언변에서 이 중년의 사냥꾼이 경멸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븐은 그를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지 않도록 신중히 단어를 골라 말했다.
“정치적 태도와 비정치적 태도를 양극단에 놓고 당신과 나를 그 위에 위치시킨다면, 감히 예상컨대 저와 마르셀 당신의 사이는 그리 멀지 않을 겁니다. 저도 사냥 밖의 번잡한 일들에 대해서는 구태여 신경을 쏟고 싶지 않습니다. 그럴 능력도 없고요. 이 전쟁이라는 것도 도무지 내 이해력을 아득히 넘어서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공화주의라든지 보수 반동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입니다. 제가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사냥에 대해 지니는 도구적 가치에 주목하는 때문입니다.”
“이해를 시도할 만큼 상황은 복잡하지 않아. 마물이라면 쫓아가서 죽이고 마물이 아니면 내버려둔다. 그뿐이고, 그 이상은 없어. 이해가 됐나?”
이븐은 더 이상의 논쟁이 무의미할 것이란 생각에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마침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며 그들의 대화를 중단시켰다.
“마르셀, 나가봐야겠어요.”
분명하고 힘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이븐은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돌려 이 새로운 인물에게로 눈길을 던졌다. 파견된 마일스아이렌의 사냥꾼들이 불만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케넌의 말은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사전에 알리지 않고 국경에 나타난 이븐의 존재를, 마르셀은 기대하지 않았던 모양이었고 그건 새로 나타난 이 인물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잔베르 교구의 사냥꾼, 이븐 베르자크입니다. 안드로스 단장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여러분을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동부 국경은 제가 담당하는 구역이기도 하니까요.”
“반가워요. 아블린이에요. 마르셀하고는 이미 얘기가 된 모양인가 보죠?”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나눈 이븐은, 그러나 아블린의 말에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에 있는 장신구가 그의 정신을 빼앗았던 것이다. 아블린은 코끝을 황동과 같은 금속으로 덮고 있었는데, 이 불빛을 반사해내는 빛나는 코의 용도를 그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다.
“네, 그렇습니다. 방금 도착해서 얘기를··· 나눴습니다.”
“쳐다봐도 돼요. 이게 궁금한 거죠?”
이븐이 시선을 피하자 아블린이 자신의 코끝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븐의 두 눈이 다시 그녀의 얼굴을 향하자 아블린은 그 황동 코를 손으로 잡고 흔들어 빼냈다. 그러자 뭉텅 잘려나간 그녀의 코가 눈에 들어왔다. 누렇게 드러난 코뼈를 옅고 투명한 피부가 덮고 있었다. 그건 아무리 좋게 말해도 보기에 편한 광경은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황동 조각을 끼워 넣고는 이 장면이 이븐에게 전해준 충격이 재미있다는 듯 짓궂은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앞으로 얼마간 같이 지내야 할 텐데 궁금증은 빨리 해소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아블린, 무슨 일이 있어서 온 것 아닌가?”
마르셀이 둘을 지켜보고 있다가 걸걸한 목소리로 아블린을 일깨웠다.
“병사들이 뭘 봤다고 해서 같이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이번에도 피(血)깔따구 같은 거 아냐? 그것들은 산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단 얘기 분명히 했지?”
“이번엔 죽어도 아니라는데요. 기어 다니는 걸 봤다고 하니까 송장벌레가 아닐까 싶어요.”
물론 이들이 엄지손가락만한 벌레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 터였다. 이븐은 그들이 말하는 송장벌레가 온갖 짐승의 시체를 몸에 휘감아 몸집을 부풀리는 습성을 지닌 불쾌한 마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르셀이 술잔을 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방의 한 편에 기대어 두었던 거대한 석궁을 집어 들고 역시 마찬가지로 벽에 기대어 두었던 볼트들을 어깨에 걸었다. 그것은 작살만큼 크다고 하면 과장일 테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볼트라고는 결코 부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마르셀이 엽궐련을 입에 문 채 말했다.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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