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막 3장 - 우리 중의 하나(1)
5막 비주
3장 우리 중의 하나
투르게네프 대령은 콧수염이 잘 어울리는 근엄한 인상의 군인이었다. 말릭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하임벤어를 구사할 줄 알았기 때문에 긴급회의는 큰 무리 없이 진행되었는데, 이븐은 이 사실이 황제와 각료들의 용병단 선택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했다.
“보그단 투르게네프. 당신들, 나를 대령으로 부르는 것이 편할 거요.”
용병단에도 훈장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바 없었으므로 그의 가슴에서 짤랑거리고 있는 훈장들은 아마도 용병으로 활동하기 전에 군에서 받은 것이리라고 이븐은 생각했다. 대령은 말수가 적었는데 그의 하임벤어 실력이 짧아서라기보다 입가에 팬 주름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본래부터 과묵한 양반인 듯싶었다.
대령의 옆을 지키고 서 있는 이바셴코 중위는 하임벤어를 몰랐으므로 줄곧 입을 다물고 있다가 간혹 말릭의 도움을 받아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어떤 의견 개진이 아니라 사실관계의 재확인일 뿐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회의의 진행은 말릭이 도맡게 되었다.
“그 문신은 혁명 이전 게헤만에서 죄수들을 페텐도르 감옥섬으로 보낼 때 찍었던 낙인입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살바도스에서 그런 문신을 새긴단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게헤만 놈들이 일부러 시체를 여기다 던져두고 마물들이 꼬이게 한 겁니다.”
문신을 발견하고 나서 길길이 날뛰던 말릭은, 증거로서의 시체를 운반하는 중에 힘이 빠져 어느 정도 진정되었지만 여전히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이븐이 놀란 것은 마르셀의 태도였다. 말릭과 마찬가지로 문신의 의미를 알고 있던 그는 말릭 이상으로 분노했고, 마을로 돌아오는 내내 붉으락푸르락했던 것이다.
“속단할 수 없어요. 무엇보다도 나는 이런 계획을 짜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정도로 치밀한 이들이 문제의 문신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드네요.”
아블린은 그렇게 말하면서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이븐에게 보냈지만 그는 좀 전부터 한 발 물러서서 이 모든 상황을 관조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체의 옷을 다 벗겼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게다가 우리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 주검시체가 살을 다 뜯어먹어서 증거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을 겁니다.”
“주검수채겠죠, 말릭. 아무튼 이건 효용에 비해 지나치게 품이 많이 드는 일이에요. 마물이 반드시 시체에 꼬인다는 보장도 없고, 그 마물이 우리 진영을 공격할 거란 보장도 없어요. 거기다가 그런 시체를 운반하기에 게헤만 진영은 여기서 너무······.”
아블린은 열에 들떠 말을 늘어놓다가 곧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대령은 놓치지 않고 그녀를 추궁했다.
“방금 말은 무슨 뜻으로 하는 거요?”
아블린이 채 뭐라 말하기 전에 대령이 천천히 힘을 실어 덧붙였다.
“당신이 하는 말은 마치 내게 우리가 벌인 일인 것처럼 들리고 있소. 나는 우리에게 향해지는 어떤 비난을 모두 좌시하지 않을 것이오. 설령 당신이 교황과 사냥단으로부터 대리인이라고 하더라도 용납은 불가한 행동이오.”
문장은 다소 어색했지만 그 의미는 그대로 전해졌다. 잠시간의 침묵 속에서 이븐은 마르셀의 표정을 살피다 그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는 그것이 자신의 고견을 요청하는 눈짓이라고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아블린, 자네 말에는 모순이 있어. 첫째로 시체에 반드시 마물이 꼬인단 보장은 없다고 했는데 이미 마물 한 마리가 둥지를 틀었지. 둘째로 용병들을 공격한다는 보장 역시 없다고 했는데, 대답해보게, 내 앞에서 죽어간 그 젊은이는 뭐란 말인가? 용병들이 벌써 둘이나 죽었어. 거기다가 그 정도로 악취를 풍기는 시체 더미라면 주검수채뿐 아니라 다른 마물들도 끌어들일 테고, 그렇다면 먹잇감을 두고 벌이는 경쟁에서 내쫓긴 놈들은 이 마을로 향할 거야. 만약 정말로 이런 계획을 실행한 놈이 있다면 그놈부터 잡아 죽여야 해! 사냥단 창설 때부터 사냥꾼 노릇을 해온 나이지만 이토록 더러운 짓거리를 보기는 처음이야.”
“결과론적인 이야기잖아요. 저는 계획의 단계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고려했다면, 그것은 무척 낮았을 테고 실행까지 나아가려면 너무 많은 비약이 필요하다고 말씀 드리는 거예요. 마르셀,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서 당신 의견이 더 타당해지는 건 아니에요.”
아블린의 마지막 말은 마르셀을 자극한 듯했다. 그는 엽궐련을 쥔 왼손으로 그들 앞에 놓인 탁자를 내리쳤다. 떨어진 재가 뒤이은 고함에 흩어졌다.
“그래서 자네가 나보다 이 마물들에 대해 더 잘 안다는 겐가? 전 교황은 내게 단장 자리까지 권했어. 자네가 누구와 얘기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아두란 말이야!”
“그 얘기 좀 그만하세요! 전혀 상관도 없는 얘기잖아요.”
이바셴코가 이 때 아닌 언쟁에 의아해져서 말릭에게 베소니아어로 뭔가를 묻자 말릭이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중재의 필요성을 느낀 이븐이 차분한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진상을 조사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얼음송곳 용병단의 입장은 이해할 수 있지만 치우침이 없다고 여기기는 어렵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 하나 있다면 교황청 소속의 사냥꾼으로서 저희의 활동 영역은 제국에 국한되지 않는단 것입니다.”
에둘러 하는 말이었으므로 대령은 말릭에게 통역을 요구했다. 말릭이 통역해주는 말을 들은 대령의 표정이 어두웠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오, 위대한 사냥꾼. 당신은 제국에 소속되어 파견해진 인물로 게헤만도 그것을 알고 있다고 나는 보여지오. 더욱이 여기 머물면서 우리의 편제와 상황을 눈으로 보았던 사람, 그러므로 전력 노출을 염려하는 나는 적군 진영에 가는 당신을 막을 것이오.”
더듬더듬하면서도 부하의 통역에 기대지 않고 외국어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대령의 인내심은 놀라운 것이었다.
“나는 여기에 대응하는 많은 방안들을 강구할 것이오. 최고로 온건한 방안은 회담을 제안하는 것이지만 최고로 정당한 것은 총과 칼로 대답을 하는 것이오. 나는 나의 전우들의 죽음에 상당하는 대가가 있기를 신께 맹세컨대 실현하는 사람이오.”
“아뇨, 투르게네프 대령님.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당신의 직업이 증명해줍니다. 당신은 용병이죠. 전쟁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에요. 아까 내가 하려던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셨죠? 대답해드리죠. 나는 이게 당신들이 벌인 자작극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요. 전쟁을 일으켜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말이죠.”
이븐이 당혹스러워져서 아블린을 쳐다보았다. 전쟁터에서 가장 먼저 죽는 것은 흔히 말하는 대로 용맹한 이도 아니었고, 우둔한 이도 아니었다. 그건 자신의 적개심을 숨길 줄 모르는 이였다. 이바셴코가 다시 말릭에게 통역을 요구했다. 말릭은 귀엣말로 그녀에게 방금 아블린이 한 말을 설명했다. 이윽고 이바셴코가 씹어뱉듯 던진 말이, 이븐의 당황한 정신을 붙잡았다.
“시에쓰빈.”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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